101. 삭월(朔月) (3)
“당신… 무슨 짓을.”
제사장이 말했다. 어처구니없다는 어조.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뭐… 되도록 앞에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친위대장은 어슴푸레하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든 마나의 목을 꿰뚫을 수 있게끔 검을 꾹 갖다 댄 채.
‘개자식이.’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음.
그래. 진정하자.
‘우리 똘똘이 제사장이 저런 반응을 보였다는 건.’
저 친위대장이 지금껏 자기 야심을 잘 숨겨왔다는 뜻.
다시 말해, 저 자식이 주온 급의 연기 천재라는 것이었다.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도 그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흑치사라만이 살짝 숨을 흘렸을 뿐, 여기 있는 모두가 경악에 빠져 친위대장의 인질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기 천재가 행동에 나섰다.’
물러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추가 판돈을 걸면서 들이받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지금 이 상황에 승산이 있노라 자신한다는 뜻이리라.
그 자신의 근거는 금세 밝혀졌다. 몰려서있던 친위대원들이 일제히 환도를 빼들어 사방을 겨누었던 것이다. 신월회 참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벽에 들러붙는 소리로 신전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그 소란 속에서 이세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잔.”
친위대장은 빙긋 웃었다.
“왜요.”
“너와 본좌는 형제와 다름없었는데.”
“그러니까 더 엿같죠, 썅….”
억눌린 증오와 한이 켜켜이 쌓인 웃음이었다.
“우리 동생님은 핏줄 좀 잘 타고 났답시고, 시왕 폐하의 아드님이네, 왕국의 작은 달임네 아주 그냥 똥만 잘 싸도 칭찬을 받았잖아요?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시고 앉아있네? 이 형이 어째야 쓸까?”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본좌에게 검을 가르쳐주셨다. 너도 본좌와 함께 배웠지.”
여전히 나직한 목소리, 그러나 친위대장은 울컥해서 외쳤다.
“지금 감히 할아버지 이야기를 입에 담았냐!?”
친위대장은 여전히 마나의 목울대로부터 칼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와 눈빛으로 그는 수십 번이나 이세를 찌르고 베었다.
“너! 너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이 병신 같은 빡대가리 새끼야! 성치도 않으신 몸으로 너 뒤치다꺼리 해주다가! 아버지도! 심지어 어머니들도… 씨발, 다른 새끼들도 다 처 돌아가지고는. 왕가? 왕족? 그게 뭐 어쨌다고? 기껏해야 나보다 칼싸움에 좀 재능이 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폭발은 다시금 짓무른 웃음으로 졸아들었다. 잠시 후, 친위대장은 다시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아, 씨. 모양 빠져버렸네. 됐고… 상황 알겠지? 이 계집이랑 분위기 좋던데, 그 양반 놔주고 양손 번쩍 듭시다. 이세 폐하.”
“지금 그러는 건 모양새가 안 빠진다 여기느냐.”
“별로. 우리 빡대가리 새끼가 싸움 하난 겁나게 잘 하잖아? 그러니 뭐 어쩌냐. 칼질로는 도통 이길 각이 안 나오는걸. 우리 동생 폐하께서 이 형 이해 좀 해주라?”
“….”
침묵이 흘렀다.
이세는 솔로마 부장을 놔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나를 무시할 수도 없는 듯했다. 아니, 무시할 수 없다기보다는 아예 마나에게 그 시선이 못 박혀 있었다. 그 눈길에는 조금의 거짓도, 일말의 꾸밈도 없었다.
‘이세.’
날 법앙이라 부르던 4살배기 꼬마는, 비류아와 시우의 자식은, 우직하고 무거운 사내로 장성한 것이었다.
‘그거면 돼.’
위에 서는 사람의 가장 큰 조건은 달성한 셈이다.
그것만 충족된다면, 나머지는 누군가가 어떻게든 보좌해줄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그 정직함이 방해가 되는 것이 문제다. 당장 마나를 구한답시고 솔로마 부장을 놔버리면 망한다. 빽빽한 석궁 앞에 훤히 노출되는 꼴이 되니 투항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주온급 인성을 가진 친위대장이 투항한 법왕가의 가솔들을 살려줄 리가 없다.
‘전부 죽는 길이야.’
아마도 그것을, 이세 또한 예리한 전투 감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솔로마 부장을 움켜쥔 그대로 버티고 선 것이리라.
“좀… 씨발. 이 계집이 죽어도 상관없어?”
‘안 돼. 놔줘도 죽어.’
“이세 폐하. 그러고도 사내십니까?”
‘개소리를 아주 골라가면서 하네.’
“이렇게 시간 끌어봤자 아무도 안 와!”
‘이건… 문제가 맞아.’
“내가 니 친위대장이거든? 이 빡대가리 새끼야, 내가 네 경호 책임자라는 걸 꼭 말해줘야 아는….”
“옵니다….”
흑치사라였다.
짖어대던 친위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흑치사라는 이어서 말했다.
“당신… 전부터 좀 못 믿겠어서….”
“…그만한 안배를 해놓으셨다?”
“예… 그러니 올 겁니다….”
“….”
친위대장은 그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듯했다. 다만 허세일 가능성을 생각하는지 머뭇거렸다.
내게는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야리소연, 사실이야?’
[첫 번째 은월: 응. 멀찍이서 온다. 난 저놈들 증원군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네.]
[첫 번째 은월: 다만 좀 거리가 있어. 대략 15분 뒤에나 도착할 거야. 여명이 트겠군.]
그런 야리소연의 말이 들렸을 리야 없다. 아마도 부하들의 동요를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친위대장이 입매를 비틀었다.
“나 지금 당신 딸을 인질로 잡고 있거든, 외팔이 마녀님. 더 지껄이지 않는 게 따님의 무병장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설령 그런 놈들이 온다고 해도 따님이 내게 잡혀있다는 건….”
“마나… 죄송해요….”
목에 붙은 칼날로 파리해진 자신의 딸을 향해서, 흑치사라는 진심과 성의를 담아 고개를 수그렸다.
“죽어주세요….”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저들의 요구에 복종해서는… 어차피 구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받아들여주세요….”
어미가 자신의 딸에게 담담하게 죽어 달라 요구하는 모습.
그 딸이 보인 반응은, 활짝 웃는 것이었다.
[최초의 성녀: ….]
마나는 웃었다. 아까 날 돌아보고 웃었던 그 때처럼, 힘들여 억지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보였다.
“당연하지, 엄마.”
있는 대로 떨리면서도 드높은 목소리였다.
“나는 법왕가의 적녀인걸.”
인질의 친족이 인질을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인질 스스로도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인질극을 벌이던 이로서는 이만큼 피하고 싶은 상황도 없을 것이다. 친위대장은 잇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것처럼 헛웃음까지 지어보였다.
“아주 그냥 쌍으로 미친년들일세….”
“너.”
그런 거짓된 여유를, 하누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죽는다.”
하누리가 말했다.
“내가 반드시 쳐 죽여 버린다.”
친위대장은 기어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고 굳어졌다.
내가 도끼를 집어던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모든 일이 일순간에 벌어지고 끝났다.
“읏…!?”
정확하게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도끼를 본 친위대장이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리하여 도끼는 허공을 갈랐지만, 그것을 예상한 나는 이미 외치고 있었다.
“등신 언니!”
“크아악!!”
마나가 손에 든 회초리로 놈의 민감한 부분을 찌른 모양이었다. 놈이 마나를 붙든 손길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검은 섬광이 두 개, 허공을 짓가르며 치달렸다. 하누리가 집어던진 알실라제 강철 단검, 그것들이 각기 놈의 어깨와 허벅지를 꿰었다. 놈은 마나를 놓을 수밖에 없었고, 마나는 망설이지 않고 놈의 품으로부터 벗어났다.
“제기랄, 다른 놈이 잡아!”
친위대장의 악에 받힌 외침. 환도를 빼든 채 신월회 참석자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협하던 친위대원들이 그 말에 반응했다. 마나와 우리 사이에 친위대원들이 있었으므로, 곧바로 십수 개의 칼날이 마나의 도주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명하겠습니다!”
마나가 풀려났다.
상황이 어찌 튈지 몰라서 아껴두었지만, 이제는 더 아껴둘 필요가 없다.
“구속하세요!”
나는 친위대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 즉각숙청을 사용합니다. (0/1) ]
친위대원들이 주춤했다. 그 칼끝이 움찔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쓰러진 친위대장을 향해 그 칼을 겨누었다. 친위대장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다고….”
생략된 말은, 아마도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느냐?’였을 것이다.
생략된 이유는, 벼락처럼 짓쳐든 발길질 때문이었다.
쿵…!
친위대장이 쓰러졌다. 바깥에서 솔로마 부장을 들고 서있던 이세가 어느새 신전 안에 들어와 친위대장의 목을 짓밟고 있었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순간이동….’
그야말로 신들린 몸짓. 달인 이상의 달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내 도끼술 Lv.3 정도로는 10수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본좌는,”
그 달인 이상의 달인, 2대왕 이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좌에게 부족함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우직하여 묵직한 눈빛이 친위대원을 둘러보았다.
“그대들은 왕국에 충성하는 신민들이다. 평범한 신민들보다 힘이 있어, 전사의 자리에 몸을 두었다. 그런 전사들 중에서도 걸러지고 또 걸러져서, 본좌의 친위에 배치된 것들이 그대들이다. 하므로, 그대들은 왕국 제일의 전사들일 것이다.”
친위대원들이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당장 칼날이 날라 올 것을 예상했는데 돌아온 것은 뜬금없는 칭찬, 적어도 칭찬처럼 들리는 무엇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기사 그들은 모를 것이다.
칼의 날보다 언제나 말의 날이 더 날카로움을.
“왕국 제일의 전사들이니 본좌가 못미더울 만하다. 본좌는 아둔하다. 우둔하다. 그러니 너희가 볼 때 본좌는 왕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치 못할 애송이이며, 2대만에 사직을 말아먹을 얼간이겠다.”
정적.
“그러나 그대들은 무엇이냐.”
이세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친위대다. 친위대의 본질은 왕을 지키는 것이다. 신관들이 본좌를 성력으로 도울 때, 그대들은 마땅히 무력으로 본좌를 수호해야 한다.”
“그래서, 뭔데….”
목을 밟힌 친위대장이 켁켁거렸다. 피칠갑이 된 얼굴로 비웃었다.
“그런데 우리 동생 뒤통수를 쳤으니… 너희도 친위대 미달 아니냐 이 소리? 그렇게 사이좋게 미달이니 니들도 할 말 없다 이거냐?”
이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뭔데? 우리 빡대가리 동생님…?”
“그대들은-- 그저 단순히, 약하다.”
이세가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무슨….”
“그대들이 지켜야 할 왕이 그대들보다 강하다.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
“본좌는 부끄럽다.”
친위대원들이 이세를 바라보았다.
“본좌는 머리가 느려서 다른 사람이 한 번 보면 깨달을 것을 두 번, 세 번 보아야 간신히 헤아린다. 헤아린 것을 기억하려면 다시 세 번 되새겨야 한다. 다른 사람이 쉽게 해낼 일에 군왕인 본좌는 아홉 번의 수고를 기울인다. 본좌는, 본좌의 모자람이 창피하다. 면목이 없어.”
신월회에 참석한 명가의 자녀들이 이세를 바라보았다.
“창피하고 면목이 없어 본좌는 애쓰는 것이다.”
마나가,
“다른 사람보다 세 번 더 생각하는 것이 치욕스럽다. 다른 사람보다 세 번 더 되새겨 기억해야 하는 것이 모욕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좌가 해야 할 일이기에, 언제나 본좌는 치욕과 모욕을 감내한다. 그것이 본좌에게 주어진 유일한 책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흑치사라와 하누리가 이세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어떠한가?”
제사장이,
“그대들은 본좌를 지키기 위해서 더 단련하였는가.”
내가,
“본좌가 본좌의 몸을 수호하는 데 있어 그대들의 조력이 하등 필요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았는가? 창피하다 여겨본 적 있는가? 친위대가, 친위대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치욕이고 모욕으로 느껴진 적은 없는가?”
왕국의 선조들이 이세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해서 부끄러웠던 적은 없는가.”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우리의 왕을 보았다.
“단 한 번이라도, 본좌를 이기기 위해서 미친 듯이 단련하고 수련한 적 있는가.”
이 시대의 은월을, 왕국의 왕관을 짊어진 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