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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100화 (100/261)

100. 삭월(朔月) (2)

인성 쓰레기의 상태는 확실히 나보다 더 심했다. 아직까지 의식을 잃고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뭐.

“우리 딸 장하네.”

제사장에게 불려 온 하누리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같이 불려온 흑치사라는 곤란하다는 듯 뺨을 매만지며 한숨으로 팔 없는 소매를 일렁였지만, 역시나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직설적으로 전달했던 상황을 제사장이 공유했다.

“신전이 항의라는 명분하에 포위당해 있습니다. 항의의 명분이 된 솔로차 도령을 데려갈 겁니다. 무사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요.”

흑치사라는 곧바로 이해했다.

“실제로는… 인질 역할이고요…?”

“…예. 부축을 도와주십시오.”

“정말… 팔 불편한 사람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하누리는 체격이 맞지 않았으므로, 흑치사라가 제사장과 함께 의식 없는 솔로차를 부축하고 섰다. 분명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 두 여인은 그렇게 힘을 맞대어 체구가 큰 소년을 나누어 부축했다.

“우라질 새끼들. 왜 이 좋은 달밤에 짖어대고 나발이야? 병이 든 개새끼도 아니고.”

한편 하누리는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그런 우리 곁을 호위하고 섰다. 두 손에는 어느새 맞선 보러 올 적부터 가져왔던 알실라제 강철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월회가 열리고 있는 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곧 신전의 문가에도 가까워진다는 의미인 바, 서로 언성을 높이며 대거리를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거듭 말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항의를 하러 온 것뿐이오!”

연륜이 배어든 날카로운 외침.

‘이게 솔로마 부장일 테고.’

“그런 사병들을 데리고 말인가!”

그보다 훨씬 젊은 목소리.

‘이게 친위대장이겠지.’

“….”

이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뿐. 다만 회장에 가까이 갈수록 살을 에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하누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가락… 아니, 세 가락쯤 하는 녀석이 단단히도 빡쳤나 보네.”

과연.

‘아직 싸움이 벌어지지 않은 건 간을 보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최초의 성녀: 그런 이세의 기세 때문이기도 하겠군요… 아니, 비류아. 지금 시우랑 굳게 손을 맞잡고 시선 마주칠 때가 아니니까요! 상황에 집중해주세요!]

[개천의 시왕: 음.]

그 기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졌다.

그래서일까. 솔로마 부장의 목소리에는 순간 힘이 빠졌지만, 그는 곧 빠진 만큼의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이들 또한 내 친족이요! 내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외다!”

“그렇게 무장을 하고 말인가!”

“훈련 중이었소! 무장을 풀 시간이 없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지금 무장을 풀면 되겠군!”

신전문을 사이에 둔 채 옥신각신이 오가는 와중.

우리가 신월회장 내부로 들어선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          ◈          ◈

회장 한구석에 우르르 몰려선 이들이 있었다. 주로 아씨들 또는 아직 어린 도령들이었다.

반면, 웬만큼 나이가 들고 체격이 있는 얼마 안 되는 영애들과 상당수의 도령들은 문가에 응집해 있었다. 개중에는 나를 헐뜯고 인성 쓰레기를 비호하던 무리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들 또한 왕국 명가의 자녀들. 지금 이 상황을, 자신들이 송두리째 볼모로 잡힐 수 있는 상황임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 앞에 친위대가 방진을 형성하는 중이었다.

그 숫자를 종합해보면….

‘정예 친위대 15에 어느 정도 싸움에 조예가 있을 명가 자녀 25’

계 40

그 또한 대치 상황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리라.

그리하여 가장 앞쪽, 활짝 열린 문가에, 스미는 달빛을 밟고 선 이세와 친위대장, 그리고 마나가 있었다. 이세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정적을 지키고 있었고, 친위대장은 문 바깥에 있을 솔로마 부장에게 대거리를 하던 중이었다.

‘닮은 얼굴이다.’

인과 포인트 분배 직후, 전 아삼 부장이 쓰러지자마자 이세의 뒤에 섰던 장년인과 쏙 빼닮은 젊은이였다.

‘그 아들? 조카?’

전 아삼 부장의 손주쯤 되리라는 건 확실해보였다.

그리고 마나는….

‘넌 거기서 또 뭐해….’

회초리를 입에 문 채 태연자약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몸이 사시나무마냥 떨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입에 문 회초리도 허공을 찰싹거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은 채, 오히려 한 걸음 걸어 나가며 솔로마 부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다, 당신 아들은!”

생각한 것보다 목소리가 떨렸는지, 딸꾹질을 한 번 한 다음에야 마나는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당신 아들은… 저, 정당한 결투에 패배한 거야! 불만이 있거든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든가 해!”

“무어라….”

솔로마 부장이 헛웃음을 지었다. 곧 짓눌린 짐승 같은 웃음이 되었다.

“나투아에서 온 마녀의 딸 따위가….”

“부, 불만이라도, 있어!?”

솔로마 부장은 잇소리를 냈다.

“됐다! 치워라! 나는 내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해야겠으니까!”

그러며 솔로마 부장은 성큼성큼 입구를 향해 걸어왔다. 가로막혔다.

마나가 물러서지 않고서, 도리어 양손을 펼쳐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이었다.

“내, 내 동생이!”

마나가 외쳤다.

“내 동생이 나를 위해 해준 일이야! 폄훼하는 자는 누구든, 누구든 용서할 수 없어!”

솔로마 부장이 이를 갈았다.

“이 계집이…!!”

“한 걸음.”

차가운 목소리가 솔로마 부장을 갈랐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베겠다.”

팔짱을 낀 그대로 이세가 꺼낸 말이었다. 터져 나온 살기가 모두를 멈추게 만들었다. 솔로마 부장조차.

그렇게 만들어진 침묵.

바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들어선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개중에는 마나의 눈길도 있었다. 솔로마 부장의 앞길을 막느라 겁에 질렸는지 양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 눈으로 날 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등신 언니.’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          ◈          ◈

“당신들은….”

친위대장이 중얼거렸다. 제사장이 그 말을 중간부터 잘랐다.

“여기에!”

제사장은 마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흑치사라와 함께, 만신창이가 된 한 소년을 짊어지고 걸어나섰다.

“여기에, 솔로마 부장! 당신이 보고 싶다던 아드님이 계십니다!”

입구에 몰려서있던 명가 자녀들과 친위대, 그리고 친위대장이 비켜섰다. 이세와 마나는 비켜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신전 문 앞에 선 솔로마 부장까지 훤히 길이 열렸다.

솔로마 부장이 눈을 부라렸다.

“솔로차!”

아비의 부름에 솔로차는 으읏, 아주 약한 신음을 흘렸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는지 눈을 뜨지는 못했다.

“아해를 어찌 이 지경으로! 제사장! 그대가 관리하는 신월회는 전사를 이리 대한단 말인가!”

제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로서는 관리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마나 언니가 말했던 대로!”

나는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것은 제가 신청한 결투라구요!”

앞으로 나서면서, 나는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몸이 워낙에 자그마해 벗어 던질 것도 별로 없었다.

여군주가 지배하던 초원 부족을 전신으로 둔 만큼 내가 살던 시절의 왕국만큼 충격적이진 않았겠지만, 고귀한 가문의 아씨가 스스로 옷을 벗어던진다는 충분히 기행이라 할 법했는지 숨 삼키는 소리들이 어지러이 들려왔다.

하지만 흘러든 달빛이 비춘 것은 내 나신이 아니었다. 그 위를 감싼 붕대, 그러고도 다 가리지 못한 폭력의 흔적들이었다.

“저도 이렇게 맞을 만큼 맞았고, 그래서 저렇게 때릴 만큼 때렸거든요!? 그거야말로 전사의 율법 아닌가요!?”

솔로마 부장은 말을 잃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누리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역시 내 딸이야! 맞는 말만 한다니까.”

그 모습이 솔로마 부장을 열 받게 한 것 같았다. 그가 이를 갈았다.

“이… 얼굴 반쪽이 녹아내린 추물이 여기가 어디라고…! 땅지렁이 모녀들이 아주 끼리끼리 노는구나, 끼리끼리…!”

“오호.”

하누리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역광 드리운 얼굴에 서로 다른 경도를 지닌 웃음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지금 이거. 법왕가의 안주인을 모욕한 거지?”

“너 같은 외국 년이… 옆에 있는 마녀와 함께… 이 왕국을….”

“아~ 꿍시렁꿍시렁 말이 많네, 진짜!”

하누리가 단검으로 솔로마 부장을 가리켰다.

“얌마!”

외쳤다.

“짖어대지 말고 일로 와!”

까닥, 까닥, 단검 끝을 낚시용 찌처럼 움직이며 하누리는 웃었다.

“나 모욕감 느꼈거든? 칼로 말할라니깐. 너도 칼로 말해, 이 쌍놈아. 내 딸이 말한 것처럼 그게 전사의 율법 아니냐?”

“이… 이이….”

“빨랑 와라~. 팔 아프다. 결투하고 끝내자~. 개잡놈아.”

하누리는 명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솔로마 부장은 그 명쾌한 길에 따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해가 갔다. 도끼술 Lv.3에 비견되는 단검술을 이미 맞선 올 무렵에 익히고 있었던 인물과 1 대 1을 뜬다는 건 죽음을 예약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사람이란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되도록 뒤로 미루려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솔로마 부장이 결투 신청에 응해 달려오는 대신 손을 척 휘저으며 다음과 같이 외친 것은 다른 견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 석궁 장전!”

철커덕, 철컥. 솔로마 부장 너머, 신전 앞에 집결한 30명의 사병들이 일제히 석궁을 장전하는 소리였다.

[첫 번째 은월: 뭐야? 끝내 해보자 이거임? 그러기엔 분위기 너무 초쳤는데?]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못이기는 척 물러나야 할 시점이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대놓고 위신이 상해서?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개천의 시왕: ….]

하누리 또한 의외였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이 X발놈 좀 보게?”

“석궁 들어!”

석궁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또한 일제히 울려 퍼졌다.

이세로부터 뻗어 나오는 살기가 한층 더 흉폭해졌다. “힉,” 가장 앞에 나서있던 마나가 주저앉으려는 것을, 어느덧 그 옆에 선 이세가 손을 뻗어 잡아주면서 솔로마 부장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무슨 수작이냐.”

솔로마 부장은 입꼬리를 추어올리려는 것 같았다. 잘 안 되었는지 숯불에 바싹 구워진 미꾸라지 같은 입술이 됐다.

“너야말로 무슨 수작이기에 이렇게 앞까지 나왔냐? 멍청한 새끼 같으니. 화살꽂이가 되고 싶지 않거든-”

다음 순간, 이세는 마나를 뒤로 내던지듯 신전으로 들여보냈다. 동시에 벼락처럼 앞으로 쏘아져 솔로마 부장의 목을 붙들었다.

“뭐라고 했냐?”

강철 같은 손아귀에 목이 잡힌 솔로마 부장은 하던 말을 잇지 못한 채 꺽꺽거렸다. 그 손아귀가 위로 올라갔다.

‘세상에.’

순전한 사람의 아귀힘과 팔 힘만으로, 200근은 족히 될 근육 덩어리 거구를 가진 솔로마 부장의 신체가 위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무슨 거중기도 아니고….’

더 감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들어 올려진 솔로마 부장의 몸이 또한 석궁수로부터 몸을 지킬 방패가 됐다는 사실이었다. 인질 또한.

[첫 번째 은월: 와, 전투 감각 개쩌네….]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비류아. 역시 당신과 시우의 아들이에요!]

[개천의 시왕: ….]

[최초의 성녀: 어… 비류아?]

[개천의 시왕: 잠시만 조용히.]

[개천의 시왕: 왜 놈들이 지금 나선 건지 생각하고 있다.]

저승에서 시왕이 말하는 것과, 이승에서 시왕의 아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의 소리로 겹쳤다.

“그 가시들,”

[개천의 시왕: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붙잡혔는데,]

“왜 안 치우냐?”

[개천의 시왕: 왜 여전히 석궁을 겨누고 있는 거지?]

그 대답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하, X발.”

지금까지 대립 상황을 연출하고 있던 목소리 중 한 축이 허탈하게 말하는 소리였다.

“하여간 솔로마 부장, 저 병신을 끌어들인 내가 잘못이지….”

친위대장.

그가 돌연 마나를 붙들더니 그 목에 칼을 겨누었던 것이다.

“힉.”

마나가 비명을 흘렸다. 그 비명은 곧 지그시 가져다댄 칼날에 의해 멈추었다.

이 또한 벼락같이 벌어진 통에, 도저히 대응할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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