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삭월(朔月) (1)
저승에서 내 장래를 두고 무책임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에도 제사장은 여전히 내 손에 턱을 내주고 있었다. 손을 들어 치우려 하지도 않았고, 말로 놓으라 하지도 않았다.
제사장은, 여전히 뺨을 붉힌 채, 또한 다만 시선을 흘긴 채 말해야하는 것들을 말했다.
“모두 다 유효하다고 쳐도… 여전히 한 가지가 문제예요.”
“어떤 문제인가요?”
“부장들. 정확히는, 전사들이요.”
음.
‘역시 똘똘해.’
안 그래도 염려하던 부분을 제사장 또한 입에 담은 것이다.
◈ ◈ ◈
15년 전.
태부의 장례식 직후, 법왕은 강성파 부장들을 쓸어버리고 군권을 독점했다.
“덕분에 신전 권력과 전사 권력 사이의 균형이 얼추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렇듯 신월회 같은 교류의 장도 열릴 수가 있게 되었고요. 모두 법왕님의 혜안 덕분입니다만….”
하지만, 애초에 신전 권력이 약화된 원인 자체가 45년 전 있었던 ‘검은 도끼의 밤’, 대규모 숙청 때문이었다.
“숙청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금 이 정도 통찰을 보여주고 계시는 유미 아씨라면….”
“아버지의 딸인 저라면.”
“…예, 법왕님의 딸이신 유미 아씨라면 잘 아실 겁니다.”
검은 도끼의 밤 이후 쑥대밭이 된 신관들은 두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철저하게 전사들에게 찍어 눌린 채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던 이들, 나머지 하나는 도끼의 마신 추종자로 대표되는 이들.
“부당하다 여겨지는 강압 앞에서, 사람들은 납작 엎드리거나 맞서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마련이니까요.”
비슷한 일이 전사 계층에도 벌어지고 있다고 제사장은 암시한 것이다.
제사장은 한 차례 더 숨을 흘렸다.
“아씨의 말대로입니다. 오늘 솔로차 도령을 보고 느끼셨겠지요.”
전사 계층 사이에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그들이 폭발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법왕님께서 군권을 왕가에 반납하겠다고 굳게 약조하신 덕분. 구체적으로는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공기가 생겨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1년 뒤, 군권을 왕가에 반납하지 못할 경우 전사 계층 중에 폭발하는 이가 생겨나리라는 뜻이네요.”
“예. 그런데 또한 지금 전사 계층이 ‘군권을 왕가에 넘긴다’는 선에서 납득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왕가가 자신들과 같은 ‘전사 계층’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거고요.”
“…역시, 정확합니다.”
제사장의 눈시울이 젖었다. 목소리도.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단정지었던 사람과 재회한 것처럼.
[최초의 성녀: …제사장과 예언자님 입장을 따져보면 그게 사실이긴 하네요.]
[첫 번째 은월: 그러게. 죽었던 법왕이 살아 돌아온 셈이잖아.]
[최초의 성녀: 네. 생각해보면 굉장히 낭만적인-]
[첫 번째 은월: 그러니깐 결혼 좀 해주지…. 포인트만 1 쓰면 되는 걸 갖구서 순 노랭이같으니….]
[최초의 성녀: 야리소연…. 있잖아요. 좀. 이럴 때는 더 느긋하게 감상에 잠겨 있게 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방금까지 저 되게 뭉클한 감정이 있었거든요? 없어졌고요. 돌려줄래요?]
[첫 번째 은월: 너 쎄게 나온다 요즘…?]
[최초의 성녀: 여러분 모두가, 특히 야리소연 당신이 저를 강하게 하고 있어요.]
[첫 번째 은월: 거 든든하다 야. 비류아 너는 거꾸로 왜 갈수록 약해지냐? 남편까지 옆에 끼고 있으면서.]
[개천의 시왕: 음. 이 일련의 임무만 지나면… 3대만 지나면 나도 개인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적절한 조언을 제 때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대들이 자꾸 비류아 짓이라고 말하는 침묵을 가장하는 것도 줄어들 것이다.]
[첫 번째 은월: 그 말 지켜주라 좀…. 시우 너도 좀 더 제대로 보좌해주고. 사내놈이 말이야, 왔으면 밥값을 해야지.]
[최초의 성녀: 저기요. 괜히 비류아랑 시우 탓하면서 말 돌리지 말고요. 야리소연. 돌려줄래요?]
‘잘들 논다….’
저기 끼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퍼질러 놀고 싶다.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시왕 폐하도, 태부 각하도 전사 계층이셨으니까요.”
하여, 그동안 정리해둔 생각을 말했다.
“이세 폐하 역시 확실히 전사 계층이지만-”
“-마나 아씨도, 저도 신관 계층입니다.”
“흑치사라 어머님에 이르면 아예 왕국민 출신조차 아니지요.”
“예.”
“그리고 그 말은 그런 결혼이 이루어지면, 이세 폐하께서 정국을 주도할 수 없으리란 건 전사 계층도 알고 있을 거란 소리네요.”
“그렇습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오랜 시간 법왕에게 빼앗겼던 군권. 그것이 왕가에 반납된다고 한들, 그 왕가가 신관 계층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게 확실해진다면 기만당했다고 느끼리란 것이었다.
[간신 조련사: 정말 감탄스럽군요. 예시로 든 검은 도끼의 밤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모조리 당신이 뿌린 씨앗으로부터 발아했다는 게 말입니다. 간신이여.]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의 적은 가리비수….]
저승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과는 달리, 전사 계층의 그러한 반응에는 맞는 구석도 있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사 계층 중에 좋은 신부감이 있나요?”
“…정실을 셋 두시자는?”
“예. 둘 두자는 게 전제인데 셋 못 둘 것은 뭔가요?”
그만큼 흑치사라를 견제할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동시에 신전 권력까지 견제할 수 있다면 권력 분립은 한층 더 견고해지겠지.
“하지만 마나 아씨와 저. 이렇게 둘입니다. 하나로는 부족하다 느낄 수도,”
“그럼 네 명.”
“…네 명의 왕후.”
“신월(申月)후와 상현(上弦)후, 하현(下弦)후와 잔월(殘月)후.”
“상하(上下)라는 단어를 걸고넘어진다면-”
“-대충 이리저리 끌다가 상현을 내줘버려요. 어차피 부르는 이름. 그거 내주고 생색낼 수 있으면 남는 장사니까.”
제사장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턱을 잡고 있는 내 손은 치우지 않고서, 고개만 조금 틀어 나를 보면서 말했다.
“유미 아씨.”
“네?”
“법왕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아직 아닌데.”
“예,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한테 고백이라도 해보지 그랬어요?”
“아니요, 어찌 감히.”
“용기 좀 내보지. 그러니까 새파란 딸 상대로 이 꼴 당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라고 제사장은 말했다. 그렇지만, 이라고 제사장은. 몇 번이나.
그리고.
“법왕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예.”
“못됐네요.”
“예.”
“말 잘 들을 건가요?”
“예.”
“이세 폐하랑 결혼도 할 거고?”
“예.”
“비밀로.”
“비밀로.”
제사장이 손을 들었다. 그제야 턱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조심스레, 힘주면 부스러지고 잘못하면 더러워지는 어떤 것을 쥐듯 감싸 쥐었다.
그녀가 말했다.
“삭월이 들 때면….”
달이 없는 밤이면.
“그 날마다 이렇게… 그냥 이렇게.”
그냥 이렇게, 라고 제사장은 몇 번 더 되풀이해 말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더 편해지겠네요.”
“편해진다면….”
“호칭.”
나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굳이 달 없는 밤이 아니어도 저를 ‘유미 아씨’가 아니라 ‘법왕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실 테니까요.”
“아아.”
제사장은 내 손을 감싸 쥔 그대로 손등에 이마를 묻었다. 마치 구원을 기도하는 성자처럼. 또는 속죄를 바라는 죄인처럼.
어느 쪽이든 나는 손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은월: 야.]
[첫 번째 은월: 조심해. 지금 바깥 분위기가 이상하다.]
갑작스러운 경고가 내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 ◈ ◈
“쉿.”
나는 일단 제사장을 조용히 시켰다.
내 손등에 이마를 내주고 있던 제사장이 멈칫하여 나를 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바깥 느낌이 이상해요. 잠시만 조용.”
나도 소곤거리면서 답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대화 흐름 덕일까. 아마 둘 모두이리라. 제사장은 더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예, 법왕님”이라 자그맣게 소곤거렸다.
정적.
그제야 나는 야리소연에게 물었다.
‘바깥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첫 번째 은월: 응.]
‘정확히 어떻게?’
[첫 번째 은월: 아리야. 이건 네 쪽 전문일 것 같은데.]
[최초의 성녀: 그렇네요.]
적대적인 도시 소모라에서 소규모 부족을 이끌던 여인이 대답했다.
[최초의 성녀: 항쟁이에요.]
항쟁.
‘누가? 누구랑? …어떻게?’
[최초의 성녀: 비류아, 저 깃발 어디 쪽인가요?]
[개천의 시왕: 솔로마 부(部).]
[개천의 시왕: 솔로마 부의 현재 부장이 사병들을 모아서 왔다. 명목은 네가 아들을 두드려 팬 것에 대한 항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사병들의 숫자가 많군. 약 30 거기다가 모두 다 솔로마 특제 방패와 석궁을 지참하고 있다.]
완전무장한 석궁병 30
‘신전을 포위할 수 있는 규모군요.’
[개천의 시왕: 잠시. …실제로도 포위되어 있군.]
[첫 번째 은월: 그러게. 20명가량이 추가로 신전 주변에 매복해 있어.]
외곽에 20 추가.
포위 상태.
[개천의 시왕: 이세, 그리고 이세가 데려온 친위대와 친위대장이 맞서고 있다. 수가 적군. 대략 15명. 거기다가 이쪽의 무장 상태는 환도뿐이다.]
30(+20)대 15
이쪽은 방어구 및 원거리 병기 없음.
[개천의 시왕: 다만 아직 싸움이 벌어지진 않은 상황이다.]
[개천의 시왕: 신전 문을 경계로 하여 솔로마 부장 대 이세, 친위대장의 대립 상태다.]
그럴 것이다. 그랬다면 야리소연의 경고가 아니라 피 맺힌 비명부터 들렸어야 했다.
‘싸움이 안 벌어진 이유는?’
[최초의 성녀: 첫째는 솔로마 부 쪽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항의’라는 입장이기 때문이고.]
[최초의 성녀: 둘째는, 뻔하네요. 간보고 있는 거지요.]
간.
[최초의 성녀: 저희도 그런 적 많았거든요. 고돔 족장을 비롯하여 소모라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항의를 핑계로 집단으로 찾아간 다음 정황부터 살펴보는 거요.]
덮치면 100% 이길 수 있는가.
상대측의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정리할 수 있는가.
핵심 인사들을 놓치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는가.
마치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늑대처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면 덮친다.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면 슬그머니 물러난다.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께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지만, 고돔 족장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최초의 성녀: 하나쯤은 항상 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이세의 대비 상태는 어때요?’
[최초의 성녀: 이건 어렵겠네요.]
아리야가 잘라 말했다.
아리야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다만.
‘상대는 그걸 확신할 수 없으니까 아직 공격에 들어가지 않은 거고.’
[최초의 성녀: 오래 가진 못할 거예요.]
[최초의 성녀: 준비를 많이 했네요…. 저 정도 규모를 이만큼 접근시킬 수 있을 정도면, 그렇네요. 친위대 내부에도 내통자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
[개천의 시왕: ….]
비류아의 이번 침묵은 공격적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그리고 타개한 뒤 있을 숙청을 포함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겠지. 평생을 해온 일인 만큼 잘할 것이다. 믿고 맡긴다.
나는 작은 그림에 집중하도록 하자.
‘야리소연. 네 시설 고유 스킬 켜줘.’
[첫 번째 은월: 물리위기감지?]
‘응. 아까 맨손 결투할 때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그 때 좀 무리해서라도 아껴두길 잘했다. 잠시 후, 스킬을 켰다는 야리소연의 보고를 받으며 나는 제사장에게 말했다.
“도끼 있어요?”
제사장은 이번 역시 묻지 않았다. 다만 허리춤의 도끼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알실라제 강철 손도끼. 실제 무기로 쓰기 위해 들고 다녔다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할 제사장의 그것을 나는 잠자코 받아들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에 신음을 흘렸다.
“아버지가 쓰던 거군요.”
내가 법왕이던 시절, 그 때 솔로마 부장의 머리를 깼을 때 썼던 물건이었다.
공교로워라.
“고마워요.”
도끼를 쥐자, 도끼술 Lv.3이 활성화되는 느낌과 함께 몸에 활력이 솟구쳤다.
그 활력을 억눌러 죽이면서 소곤거렸다.
“인성 쓰레기 어느 방에 뒀어요?”
“솔로차 도령 말씀이십니까?”
“예.”
제사장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공손히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여기 바로 옆방입니다.”
‘좋아.’
일단 인질부터 잡는다.
그리고 솔로마 부장이 있는 곳까지 나온 다음, 즉각 숙청을 써서 우두머리를 으깬다. 그로써 상황을 마무리한다.
그러자면 이쪽에도 가용 병력이 필요하다. 많은 필요는 없다.
“제사장님.”
“예.”
“어머니들을 데리고 와주세요.”
제사장은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수그렸다.
“예, 법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