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나라를 살리는 여섯 번째 방법 (3)
법왕.
노예 출신. 시왕에게 전격 발탁되어 개천식을 주도. 행정권을 맡아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으며 태부 시우의 죽음 뒤에는 군권까지 독점한 인물. 법왕의 두 아내가 각기 알실라와 나투아의 지도층 자녀인 만큼 외교권 역시 이 남자의 손 안에 있었다.
마나와 유미는 그런 법왕의 적녀(嫡女)들이다. 그만큼 막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막강한 지위에는 막강한 체면이 따른다.
그래서 나는 차마 소모라 임무 때처럼 제사장 앞에 오체투지를 하지는 못했다. 생각 같아선 진짜 확 오체투지 전격사죄를 단행해버리고 등신 언니만 남겨둔 채 내빼어 편해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참으로 한스러웠다.
“그… 언니가 아직 어려 뭘 잘 모릅니다. 관대하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연히 한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월회가 열리는 신전, 그 곳에 널려있는 무수한 방들 중 한 곳에서 나와 독대하던 제사장은 살짝 웃어보였다.
“괜찮습니다. 그 나이엔 그럴 수 있는 법이지요.”
그러면서 제사장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투아를 통해 대륙에서 들여온 차향이 방 안에 은은하니 퍼졌다.
‘이제야 왕국에도 문화 생활각 좀 보이네.’
하긴 사교계와 차라는 게 떼어놓기 힘든 문화이긴 했다. 나도 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500년 뒤 사람인 내 기준으로도 제법 훌륭했다)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마나 언니가 쫌… 나쁜 아이는 아닌데, 하여간 좀 그래요.”
“후후. 마나 아씨 어머님 되시는 분 친가인 나투아 식으로 말하자면 ‘여러모로 안쓰럽다’는 말씀이려나요?”
“네….”
“그래도 자매간의 우애가 있어 보기 아름답네요.”
그러면서 제사장은 실쭉 웃었는데, 즐거워서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내가 자주 짓는 웃음이네.’
뭐랄까, 잔망스러운 어린 것을 본다는 느낌? 나는 지금 쟤가 왜 저런 미소를 짓는지 생각했고, 이내 깨달았다.
“저 혼자 착한 척을 해서 제사장님께 잘 보이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어머.”
“그냥 쫌… 쟤가 저렇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던 거죠.”
“흐응.”
15년 전보다 다소 주름진 제사장의 입가에 또 다른 의미를 띈 미소가 고였다.
“즉 유미 아씨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려나요? 그러니 어쨌든 제 자매보다는 제가 더 낫습니다, 그러니 잘 봐주세요, 같은 말씀.”
그렇다면 결국 같은 말을 하시는 게 되겠는데요, 하고 눈웃음을 짓는 제사장에게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것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쟤 때문에 저까지 도매금으로 철없는 애로 인식되고 싶지는 않다는 거죠.”
“아하. 이점을 얻기보단 손실을 피하고 싶다? 견고한 사고방식이네요. 듣던 바와 다르게.”
제사장이 방금 말한 ‘듣던 바’, 즉 내가 빙의하기 전 유미가 벌이던 행각에 대해서는 이미 천사님께 과거시를 통해 확인한 바가 있었다.
‘개망나니.’
사실 확인할 것도 없이 추론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책사 흑치사라의 딸 마나는 현재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휘말려 어중간한 모략가 노릇을 하려고 들었다.
그렇다면 여걸 하누리의 딸인 유미에게 사춘기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겠는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근처 아이들을 끌어 모아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거나, 자기랑 의견이 안 맞는 이웃 아이들 패거리를 혼자 달려 들어가 박살을 냈다거나…. 그래서일까요, 사실 마나 아씨는 당신에 비해 얌전하다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그런 마나 언니가 저러니까, 오늘 참 쉽지 않겠다 싶으셨겠어요….”
“예. 기쁜 오산이네요.”
제사장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으, 무슨 오돌뼈 삼겹살도 아니고, 얘 왜 이리 하는 말마다 뼈가 씹혀? 그래도 법왕이 너 잘 대해주지 않았냐?’
그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나는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유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확고한데, 이걸 어떻게 무마하지?
[최초의 성녀: 소문은 원래 과장되기 쉬운 법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어떤가요?]
‘솔깃하긴 하오만… 안 되오.’
[최초의 성녀: 아, 제사장 정도면 법왕가 사람들의 사적 정보 정도는 이미 수집 검증을 마쳐놨을 테니까요?]
그것도 있지만.
‘이 유미한테 쳐 맞았던 패거리 놈들도 신월회에 올 테니까.’
아이 때야 서로에 대한 경계선이 흐릿하다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고, 법왕가의 차녀가 이끄는 패거리라면 그 구성원이 결코 만만치 않을 터. 그런데도 여기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패거리를 이끄는 놈이라면 알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기서는 섣불리 부정하기보다는….’
“저도 언제까지고 말괄량이 노릇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신월회를 계기로 좀 인상을 바꿔놓고 싶었달지… 아무튼 그렇네요.”
“으흠. 예쁜 마음가짐이네요.”
“네에… 그러니 제사장님, 아니, 신월회장님께서 많은 지도편달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에헤헤 웃어보였다. 제사장의 얼굴에 비로소 흡족한 미소가 퍼졌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나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세 폐하께서도 오늘 신월회에 오시지요?”
“예. 그래서 오늘을 신월회 입회일로 정하신 분들이 많아요.”
“저희처럼 말이죠….”
“정말 소문과는 다르네요. 어쩜 이렇게 똘똘하실까.”
행간을 참 잘 읽는다는 그 말에 나는 한 번 더 오돌뼈 삼겹살을 씹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이 말에 대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의 딸이니까요.”
제사장의 주름이 일순 허물어졌다.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듯이. 거기서 누군가의 흔적을 발굴하듯이. 그리고 발굴해 낸 사람 특유의 한숨을 지어보였다.
“그렇네요….”
음.
“제사장님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대단한 분이셨어요.”
즉답이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요. 그 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분은 정말 많지 않을 거예요.”
시우가 비류아를 언급할 때와 꼭 닮은 표정. 제사장에게 법왕이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밑 작업 좀 칠 수 있겠는데?’
[첫 번째 은월: 뭔 밑 작업?]
나는 야리소연의 질문에 행동으로 답해주었다. 구체적으로는 수심어린 표정을 지은 채 눈을 흘긴 것이었다.
“예, 저도 아버지를 정말 존경했어요.”
제사장의 눈길이 살짝 따스하게 변했다.
하지만 내 밑 작업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다보니 저도 막 아버지 욕을 들으면 쫌… 화나고… 어릴 때는 그게 잘 주체가 안 되더라고요.”
“아버님 험담을 들으셨다구요?”
제사장이 멈칫하여 되물었다. 나는 침통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령 “느그 애비 노예 출신이라더라.” 이런 이야기들요.”
“세상에.”
“그런 거 들으면 화나잖아요? 그러다보니 막, 제사장님 들으신 소문처럼 못되게 굴고 그랬던 것도 있어요…. 그게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요….”
제사장은 대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물론 내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법왕의 출신을 들먹이는 치들이 있었다는 데에 분노한 것이었다.
“아니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에요. 유미 아씨는 어리기도 했잖아요? 어린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세상에. 다 뒤집어엎고 다닐 만하지요.”
꺼내는 말마다 오돌뼈가 씹히는 것 같던 제사장은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입에서 살살 녹는 초 고급 업진살 같은 말들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그거 구라잖습니까?]
‘넹. 과거시로 다 검색한 건 아니지만, 내 몸 주인이 망나니짓을 한 건, 그냥 망나니라 그랬던 거겠죠.’
실제로 법왕의 출신성분을 들먹이는 미친놈은 없었을 거다. 최소한 귀에 들리게 하진 않았을 테고. 아무리 꼬맹이들 사이에서라도.
험담도 어느 정도 급수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자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법왕의 지위는 군권을 거머쥔 시점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하지만 구라에 대한 보험은 최소한이라도 필요한 법.
‘그러니까 이렇게 덧붙여야징.’
“으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뜬소문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래도 그걸 들은 순간, 막, 자제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방금 꺼낸 내 일련의 말들은 얼룩처럼 확실히 제사장의 뇌리에 박혔을 거다.
그 말인즉.
“그렇게 저랑 싸웠던 아이들도 오늘 신월회에 입문하겠지요? 바라건대 그냥 원만하게 흘려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내 인상을 세탁함과 더불어, 나랑 사교적으로 적대관계에 설 수 있는 녀석들 모두에게 미운 털 하나씩 박아줄 수 있게 된다는 거다. 마치 흑돼지 오겹살의 껍질에 박혀있는 것처럼 거뭇하고 날카로운 터럭지를 말이다!
[첫 번째 은월: 와, 진짜. 인성 오졌네. 근데 제사장 쟤 똑똑하지 않냐?]
‘그치.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이런 의도쯤 뻔히 읽었겠다마는. 시우가 시왕님 뒷담화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해봐. 어떻게 반응할지 말해줘?’
[첫 번째 은월: 아니 안 말해줘도 돼. 지금 시우가 ‘뭐!? 시왕님 뒷담화가 있었다구!?’ 하면서 날뛰는 거 실시간으로 보고 있어.]
‘시우야….’
같은 이치로 제사장의 냉정함 또한 흐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지만, 확실하게 해두어야 하는 만큼 독심술을 썼다.
[ 독심술을 사용합니다. (2/3) ]
[ 제사장 겸 신월회장의 생각을 읽습니다. ]
<세상에.> <감히.> <대체 어떤 녀석이?> <아무리 어릴 적 일이라고 해도.> <못된 것들.> <법왕님의 출신.> <뜬소문일 수도 있다지만 그런 말을.> <역시 솔로마 부의 후계자인 그 아이?> <아니면 가리비수 부의 차남?> <경계심.>
‘오케이!’
제사장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먹을 떨었다. 이어 살짝 웃어보였다.
“예, 물론이지요. 과거 일이야 과거 일이니 다 흘려보내고, 지금부터의 자기 자신을 중히 여겨야 해요. 화해 주선이 혹시 필요하거든 도와드릴게요.”
화해 주선이라는 중립적인 단어 선택과는 달리,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과거 일로 애들을 차별하리란 게 뻔히 보였지만 나는 그저 웃어주었다.
‘좋아.’
이만하면 신월회장과의 독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셈이다.
1 언니(슬슬 이 호칭이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만)와 나는 별개니까 도매금 취급 금지.
2 사실 나도 불쌍한 녀석이었어….
3 그럼에도 나는! 오늘! 신월회 입문을 계기로 거듭날 거야!
4 아. 그치만 나랑 밖에서 사이 나쁜 녀석들은 일단 의심의 눈으로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은월: 진짜 인성이 세계를 들고 서 있는 수준이네.]
‘원래 친목질하는 곳이 인성질 하는 곳이란다, 이 야만인아.’
[첫 번째 은월: 오늘도 문명인이 아니어서 1승 올린 느낌.]
[최초의 성녀: 저, 저도 일단은 야만인이니깐 1승….]
[개천의 시왕: ….]
비류아가 특유의 방어적인 침묵을 전개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방 바깥. 신월회장으로부터 소란이 들려왔다.
◈ ◈ ◈
신월회는 왕국 상류층의 사교모임이다. 참석해 있는 내내 부채로 입 가린 채 우후후 웃을 필요는 없지만, 소란을 일으켜서 괜히 눈총을 살 필요 또한 없다.
‘아직 왕국에 문화생활이 자리 잡히지 않았다고 해도, 소란을 피우는 것은 등신이나 첫 인상을 쓰레기로 만들고 싶은 녀석 정도 아닐까?’
다시 말해, 회장으로 나온 나와 제사장은 그 자리에 서 있는 등신과 첫 인상 쓰레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응? 내가 무슨 헛소리라도 했다는 걸까?”
처억, 회초리 끝으로 첫 인상 쓰레기를 가리키며 등신이 꺼낸 말에, 첫 인상 쓰레기는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헛소리도 아니지!! 감히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여!?”
그렇게 소리 지르는 녀석은 남자였다. 젖살이 덜 빠진 걸 보면 대충 내 또래로 보였지만 체격이 훌륭했다. 턱과 코 밑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나있는 걸 보면 몇 년 안 지나 커다란 체구를 근육으로 꽉 채운 전사가 되리라는 미래가 훤히 보였다.
‘그래서 미래는 알겠는데 이 녀석이 누구인진 모르겠네. 지금 첫 인상 쓰레기라는 건 알겠지만. 천사님 얘한테 과거시좀요.’
[간신 조련사: 부탁할 줄 알고 소란 날 무렵부터 검색해봤습니다.]
‘캬, 이제 손발이 척척 맞네요. 하긴 오래됐죠, 우리.’
[간신 조련사: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 소년은 방금 당신이 작업쳐서 첫 인상 쓰레기로 만들어놓은 솔로마 부의 후계자입니다.]
과연, 그것이 신월회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운 첫 인상 쓰레기의 정체였다.
그리고.
“저렇게 말하는데, 신월회장이랑 내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
등신은 물론 지금 내 몸의 생물학적인 언니였다.
‘마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