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라를 살리는 여섯 번째 방법 (2)
‘당신은 이방인입니다.’
언젠가 천사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빙의체가 쌓아온 인과관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로운 발상으로 목표 달성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세 은월들 역시.
‘근데 이건 아니잖아….’
그 반대, 천사님이 말했던 바와는 완전히 거꾸로 된 상황이었다.
[간신 조련사: 뭐가 거꾸로입니까, 간신이여?]
‘아니 젠장. 생각을 해 보세요, 천사님! 저는 남자라구요!’
[간신 조련사: 예, 그랬지요. 지금은 몹시 귀여운 여자아이입니다만.]
‘즉 제겐 그 동안 남자로서 쌓아온 인과관계인지 뭐시기인지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조금 전까지 제가 오줌 싼 속옷을 갈아 입혀주던 애새끼를, 시왕님과 시우 님 아드님께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꼬맹이를 꼬시러 가야한다니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상황입니까?’
[간신 조련사: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완벽하게 제가 말했던 ‘이방인 이론’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빙의체와 성별부터 다른 데다, 빙의체로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꼬셔야할 상대방에 대한 정보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해 오던 대로 임무를 개판치는… 으응, 특유의 자유로운 발상으로 개척해나가기 딱 좋은 토양 아닙니까.]
‘이런 염병….’
[첫 번째 은월: (완전 큰 웃음)]
‘넌 좀 그만 웃으라고 그러니까….’
[최초의 성녀: 어, 어쨌든 예언자님! 완전 힘내세요! 그리고 지금… (흐느끼는 웃음) 치, 침묵이 길어지고 있으니까요. 어서 대답하시는 편이…!]
젠장, 그래.
될 대로 되라.
“알겠어요, 두 어머님.”
나는 가슴을 펴고서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자괴감을 느끼며, 겉으로는 대담하게 웃으며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세 폐하를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겠어요!”
그런 내 선언에 하누리와 흑치사라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더니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흐음. 내 딸 아니랄까봐 패기 넘치네 아주. 마음에 들어.”
“뭐어… 활기찬 모습은 좋지만, 그 열정이 자칫 부정적인 방향으로 튀지 않을지 걱정스럽네요….”
“아앙? 어째 말이 좀 꼽다, 사라야?”
“우후후… 진정하세요, 하누리…. 그저 신중함이 더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뿐이랍니다…?”
눈앞의 자매 갈등이 매듭지어지고 방향성이 잡히자마자, 곧바로 서로를 견제하는 두 어머니들의 모습이 실로 아름다웠다.
‘하여간 뼛속부터 정치적인 인간들이야.’
지금 같은 국가 초기가 아니라 나 살던 시절의 왕국에 태어났어도 한 자리씩 해먹었을 것 같다. 최소한 태학관에서 장의(掌議)는 몰라도 색장(色掌), 그러니까 반 대표쯤은 거치는 식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반쯤 머릿속으로 현실도피를 하고 있자니, 현재 내 생물학적 육체의 이복 언니 되시는 마나는 다시금 회초리를 입에 물었다가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두 엄마도, 유미도, 호들갑이 심하네.”
지 딴에는 나른하니 교태를 부리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쫌 등신 같을 뿐인 자태로 그녀는 손가락 사이의 회초리를 까닥거렸다.
“폐하를 사로잡는 것쯤이야 나한테는 아무런 문제없대도. 이번 신월회(新月會)에서도 두고 봐. 어디 폐하뿐일까,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할게.”
마치 자신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도 된 양 말하는 마나의 모습이, 나 보기엔 여전히 쫌 많이 등신 같을 뿐이었다.
그건 나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었는지 하누리와 흑치사라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마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얘는 어쩌다 이렇게 컸대?”
‘사춘기라 그래….’
“그러게요… 역시 지아비의 부재가 큰 영향을 끼친 게 아닐는지….”
‘사춘기라 그렇다고….’
“하여간 그 새끼. 저승 가면 두고 봐. 먼저 뒈진 것부터 시작해서 확 두드려 패버릴 테니깐.”
‘얜 왜 이리 꾸준히 폭력적이야. 다시 보기 무섭게.’
“저승이 과연 있기나 할지, 있어도 같은 곳에 갈지 의문이지만요….”
‘그게 있단 말이지. 아마 오게 될 거고…. 새 입주민….’
여러 의미로 심란했다. 이번 임무는 심란의 도가니탕인가?
마나는 계속해서 나른하니 웃어보였다.
“나만 믿어, 엄마들.”
엄마들은 한숨만 폭 내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그렇게 14살의 아리따운 소녀가 된 나는,
‘제기랄! 젠장! 염병할! 빌어먹을!’
지가 멋있는 줄 아는 등신 언니를 데리고,
‘천사님. 이거 좀 어떻게 안 돼요? 다시 합시다. 인과 포인트 분배부터 다시 하자구요. 잘할 테니깐.’
체감상 바로 며칠 전에 내가 속옷을 갈아입혀줘야 했던 애송이를 꼬셔야 하는 신세가 됐다.
‘미치겠어… 죽겠네…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대륙의 어느 학자가 내놓았던 5단계 이론마냥, 부정과 분노와 협상과 우울을 거친 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좋아.’
수용의 단계.
‘어디 해보자.’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임무들 역시 정상적이진 않았다. 무슨 2시간 만에 사람을 구하라지 않나, 핍박받는 부족들 데리고 피난을 가라지 않나, 흑막 속에 들어가질 않나, 노예로 시작하질 않나…. 그런 견지에서 보면 이번 임무라고 못할 건 없는 셈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점들이 있지.’
긍정적인 생각. 밝은 사고방식으로 나는 되뇌었다.
‘가령 나는 남자란 말이야. 남자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뜻이지. 그만큼 남자를 잘 꼬실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된다. 이건 무조건 돼!’
하면 된다 정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몸이 의지로 가득 찼다.
“뭐하니, 동생아?”
회초리를 질겅거리던 마나가 물어왔다. 나는 불끈 쥔 주먹을 슬그머니 풀면서 대답했다.
“이번 신월회 잘하자는 다짐.”
“다짐씩이나 필요한 일이니, 그게.”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 마나가 회초리 끝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동생아. 너는 내 동생이란다. 가슴을 피려무나.”
“왜 하필 침 묻은 쪽으로 내 어깨를 짚는 거야? 기분 더럽게 시리….”
“덤으로 너는 법왕가의 자녀이기까지 하지. 이 또한 네가 가슴을 펴도 좋을 이유란다.”
“그건 좀 가슴을 펴도 될 이유 같네.”
나는 마나의 회초리를 치웠다. 덤으로 어깨에 묻은 침도 닦았다. 자연히 더러운 기분만 남았다.
[첫 번째 은월: 우와. 등신 같은 소리를 되게 자연스레 주고받는다, 너.]
‘뭘 이제 와서 놀래냐, 너는? 너랑 자연스레 대화하는 거 보고 딱 감이 안 왔냐?’
[첫 번째 은월: 뭐 임마?]
‘왜 임마.’
[최초의 성녀: 생각해보면 예언자님은 참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다재다능하시지요. 고풍스러운 말투도 잘 쓰시고 스스럼없는 말투도 잘 쓰시고….]
[개천의 시왕: 귀족가에서 태어나 관료 생활을 했다고 했던가. 그러니 전자는 이해가 간다만 후자는 어디서 온 건지 궁금하긴 하군.]
‘에이. 뭐 어려울 게 있습니까. 태학관 1년생 시절 떠올리면 그냥 자연스레 가능해지는걸요.’
[개천의 시왕: 그 태학관이란 곳은 굉장히 개방적인 분위기였나 보군.]
‘그냥 저 있을 때 기수가 좀 등신 같았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죠.’
그러는 동안 우리는 신전에 도착했다. 또 한 명 내게는 반가운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법왕 가의 자녀분들.”
15년이 흐른 지금도 똘똘한 모습 그대로 제사장은 우리를 반겨주었다.
“왕국민 교류의 장, 신월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
신월회(新月會).
쉽게 말하면 왕국의 사교계다. 나이가 찬 명가의 자녀들은 이 신월회에 들어오는 것으로 친목질의 막을 올리게 된다.
[첫 번째 은월: 왜?]
‘1 대 1로 만나 친목질하면 비효율적이니까. 한 자리에 모여 효율적으로 친목질을 하는 거야.’
[첫 번째 은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15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거 없지 않았어? 왜 생긴 거고 넌 또 뭘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거임?]
‘그야 사회적 지도층이 생겨나면 반드시 사교계가 생겨나게 마련이거든.’
지난 임무 때 왕국에는 이미 부장과 법왕, 제사장 같은 사회적 지도층이 생겨나 있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이 노쇠하기에도,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지위를 잇고자 분발하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위라는 건 혼자서는 유지할 수 없어. 종적인 인정과 횡적인 연대가 필요하거든.’
[첫 번째 은월: 종? 횡? 그건 또 뭔데?]
나는 설명 수준을 낮추었다.
‘가령 니가 가리비수랑 같이 공동 촌장 해먹었잖아? 그건 니네 둘이 숲의 정령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명목으로 위에서 권위를 빌려오고, 또 마을의 위기를 구해낸 영웅이기 때문에 부족민들한테 아래로부터 지지받은 덕분이야.’
이게 종적인 인정.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지. 니가 가리비수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가리비수가 너 힘들 때 도와줬으니 또 오래도록 촌장직 해먹는 게 가능했겠지?’
이게 횡적인 연대다.
‘그리고 사교계라는 건 바로 그 횡적인 연대가 이루어지는 곳이지.’
그 연대를 위한 곳, 신월회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신전의 제사장이었다.
[최초의 성녀: 신전의 권위가 많이 올라갔네요.]
‘그야 내가 강성파 부장들 뚝배기를 죄다 깨버렸으니.’
본래대로라면 부장들의 자손, 즉 전사 계층과 식자들의 자손, 즉 신관 계층은 따로따로 놀았을 거다. 실제로도 그러고 있었겠지. 지난 번 부장들 간에 오가던 적폐 느낌 가득한 대화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나뉜 두 계층이지만 사회 지도층으로 엮인 이상 그야 언젠가는 신월회 같은 통합 사교회를 만들어냈을 거요. 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당겨진 건 식자층의 장인 법왕이 전사장을 겸하면서 군권까지 가져왔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제사장은 바로 그 법왕의 바로 아랫사람이었다. 정치 감각도 나쁘지 않은 똘똘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에게 15년이나 되는 경력이 더해졌다.
그녀를 무시하는 이는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물론 그런 얼간이는 없겠지만 말이오. 멋모르고 설칠 만한 전설급 등신은 15년 전에 이미 죄다--’
“응, 신월회장. 마중 나오느라 수고했어.”
마나가 회초리로 제사장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제사장의 표정이 굳어지고, 시간도 뒤따라 굳어졌다.
‘아 나 미친.’
전설급 등신을 언니로 두었다는 걸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 ◈
마나는 제사장의 어깨를 다시금 회초리로 툭 건드렸다.
“공기가 좀 탁하네. 아빠 살아계실 적에는 좀 더 맑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청소하고 있는 거야? 설마하니 신관들 규율도 제대로 못 잡고 있는 거면 실망인데.”
‘마나야….’
“뭐, 신전에 방문한 게 아니라 신월회에 참석하는 거니까 그 정도는 관대하게 넘어가주도록 하겠어. 하지만, 명심해.”
‘그만해 마나야….’
“나도 동생도 신월회에는 처음 참석하는 거야. 만약 불비한 부분들이 발견된다면 몹시 불쾌할 거야. 나도 동생도 말이야.”
‘나 끌어들이지 마…. 아니 그냥 언급을 하지 마….’
“그러니 신월회장. 긴장하고 있으려무나. 이 법왕가의 적통을 이은 마나가 철저하게 확인해줄 테니까 말이야.”
‘야 이 등신아 진짜….’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마나는 계속하여 제사장의 어깨를 회초리로 건드렸다. 그 툭,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내게는 마치 제사장의 인내심이 한 올 한 올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안 되겠다!
“제사장님!”
나는 마나를 확 밀어내면서 꾸벅 고개를 수그렸다.
“어머나, 유미. 갑자기 왜 끼어들면서 소리를 높이니? 조신하지 못하게 시리. 그리고 제사장님이라니 그냥 신월회장이라고--”
“아버님으로부터 제사장님에 대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설급 등신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크게 외쳐야 했다.
“앞으로 여러 의미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체감상 며칠 전만 해도 턱 끝으로 부리던 하급자에게 절절하게 고개를 숙이며 비는 사람이 있었고, 그게 나였다.
뭘까 이건? 임무라는 건 뭘까 진짜?
[간신 조련사: 그것은 나라를 살리는 구국의 길을 말함입니다, 간신이여.]
‘염병할 나라 그냥 좀 죽으면 안 될까요?’
[간신 조련사: (매우 큰 웃음) 참고: 당신도 죽음.]
누가 좀 살려줘….
아니, 차라리 죽여주라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