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89화 (89/261)

89. 당신을 기억한다 (2)

나는 천사를 향해 말했다.

“천사님.”

“…….”

“저는 제 개입을 통해 시우를 도왔습니다. 그 결과 시우는 비류아에게 청혼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제가 법왕으로서 개입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첫 번째 요소.

운명 개변.

“저는 시우의 조각상을 세우는 것으로써, 그리고 장례식 날 연설을 하는 것을 통해 왕국민들에게 시우를 기억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요소.

기억되는 것.

“따라서,”

나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저는 시우가 이 저승의 입주자로 들어서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

아니, 천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야리소연도, 아리야도, 비류아 역시도 말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천사는 가만히 양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어째서입니까?”

“음? 뭐가요?”

“왜 그렇게 시우를 입주자로 불러들이고 싶어 하는 겁니까?”

천사는 고개를 기울였다. 면사포가 따라 흘러내리며, 그러나 마치 얇은 폭포수처럼 그 너머의 얼굴은 결코 비추어 주지 않은 채 목소리를 걸러내었다.

“비류아를 위한 배려심입니까? 아니면 시우가 죽은 곳이 당신이 빙의했던 법왕의 명령으로 굴을 팠던 곳이므로, 거기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서입니까? 또는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했다면 구할 수 있었으리라는 죄책감 때문입니까? 홀로 남은 이세를 위한 동정심입니까?”

“제 동기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궁금합니다. 대답해주십시오.”

“음.”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시우의 장례식을 주관하면서.

시우를 기리는 연설을 하면서.

그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했으므로, 또한 나는 이 순간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나는 가장 나다운 대답을 했다.

“입주자가 늘어나면 건물 관리 맡길 인재도 늘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건물 관리를 맡기면, 건물 고유 효과 생기면서 임무 수행이 수월해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고요. 캬! 이거 완전 개꿀 아닙니까요?”

“….”

“그러니까 천사님. 천사님이 아니라 천사님을 사도로 보냈다는 그 자모신인지 하는 분께 따져 물어서라도 얻어내야지요. 원래 얻을 수 있는 건 악착같이 얻어내야 호구 소리 안 듣는다 이겁니다. 독식! 독주! 이 시대 정신이 요구하는 것들을 저는 다만 따르고자 노력할 뿐으로….”

“간신이여.”

음.

“네, 천사님?”

“언젠가 말했던 것입니다만.”

천사의 면사포가 흔들렸다.

유채꽃 향기를 닮은 것만 같은 웃음.

“제법 귀여운 부분도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

“저도 언젠가 말했던 것입니다만, 저는 항상….”

“1절만 하세요.”

“넹.”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천사는 가볍게 넌더리를 내고는 - 여전히 웃으면서 -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언젠가 아리야에게 모습을 되찾아주었던 그 때처럼.

“자모신이시여. 맹목과 직시를 관장하는 신이시여. 그대가 저의 곁에 있으니, 저 역시 그대의 곁에 있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천사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했다.

“부디 저희 모두에게 눈앞을 바라볼 힘을 허락하소서.”

천사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것은 슈르륵 기어갔다. 이어 비류아 근처를 서성거리던 한 망령의 몸을 기어올라 뒤덮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어…….”

남자는 얼떨떨해하는 것 같았다. 당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둘 모두 잠시에 불과했다.

“시우.”

남자의 주인.

그의 혼과 뼈를 영원토록 소유한 군주가, 그의 이름을 불렀으므로.

“…시왕 폐하.”

남자, 시우가 황망히 무릎을 꿇었다.

“음.”

비류아.

전설적인 전쟁 군주. 용 살해자. 월족의 어머니.

개천의 시왕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시우는 고개를 수그린 채 부복하고 있었다.

“시우.”

시우가 움찔, 고개를 들었다.

비류아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손을 뻗는 그 동작은 자연스러워서 마치 이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잎사귀가 처지는 것을 연상케 했다.

그 손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우의 귀를 매만졌다.

“나의 부인(夫人)이여.”

“폐하….”

“고생하였다.”

비류아의 목소리 역시 이슬 묻은 잎사귀처럼 파르르 떨었다.

“정말로 고생하였어.”

“…아닙니다, 폐하. 저는… 전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것이,

자르듯,

“그것이 고생이었다.”

비류아는 말하고, 그리하여 잘려나간 가지들을 접붙이듯 이었다.

“네 삶 모두가, 고생이었다.”

그것은 치하의 말이었고, 동시에 위로의 말이었다.

시우는 황송하다는 양 허리를 수그렸다. 그러나 잠시, 그는 곧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다부지게 바뀌어 있었다.

“아니요.”

자각어린 얼굴과 목소리로 왕국의 태부는 말했다.

“제 삶 모두가 행복이었습니다.”

비류아는 잠시 침묵했다.

말했다.

“그러했느냐.”

“그러했습니다.”

시우는 곧바로 답했다.

“음.”

비류아는,

“으음.”

비류아는 몇 번이나 침음을 삼켰다. 말을 삼켰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계속하여 시우의 귓불을 매만져주었다.

탁 트인 저승의 거리 속에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배경으로 남았다.

“예언자님.”

“왜 그러시오, 아리야?”

“예언자님은 정말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음.

음.

으-음.

“그냥 뭐 가끔 혓바닥이 잘 돌아갈 때도 있는 거라오.”

아리야가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천사님 말마따나 귀여운 구석도 있으시구요.”

뭐라는지 모르겠다.

◈          ◈          ◈

전례가 있었으므로, 시우에 대한 호칭은 곧바로 정해졌다.

“시우 님.”

시우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죽음을 두고 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그 또한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을 느낀 나는 법왕처럼 웃어주었다.

“괜찮아요.”

“….”

“시간은 많으니까요. 차분히 생각해주세요.”

애매한 정적이 흐를 적에 판단을 보류하는 것은 언제나 특효약이다. 과연 시우는 헛기침을 했다.

“음, 그런가.”

“예. 그리고 어차피 시우 님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테니까요.”

천사는 분명하게 말했었다. 왕국을 멸망의 위기로부터 완전히 구해내라고.

그리고 그렇게 하면, 이 저승의 왕국을 헤매는 망자들 모두가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리라고.

‘그걸 감안하면, 사실 세 은월은 물론이고 시우도 첫걸음에 불과하지.’

거기에 더해 어쨌든 나는 시우에 비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충분히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시우 님. 당신은 병영을 맡아주세요.”

“좋다.”

그렇게 시우를 병영에 배치시키자, 병영의 정보 창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

[ 시설물: 병영 ]

레벨: 2

문명 수준: 전제 군주제

담당자: 시우 (왕국의 태부)

효과: 궁술(Lv.1), 창술(Lv.1), 검술(Lv.1), 도끼술(Lv.1), 행군(Lv.1) 부여. 불굴의 인내력(Lv.4, 임무 당 3회)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더 이상 씨족이 아니다. 더 이상 부족이 아니다. 이제는 왕국이다!’ 부장들로부터 군권을 넘겨받은 법왕은 각 부를 대표하는 호족들로부터 전사들을 넘겨받아, 그들을 호족들의 전사가 아닌 왕국의 군인으로 다듬는데 안간힘을 썼습니다. 전사들의 시대를 넘어 군인들의 시대가 밝아오는 순간이었습니다.

+

‘Lv.4 불굴의 인내력이라….’

Lv.3이 달인의 수준이란 걸 생각해보면, Lv.4는 명백히 초인의 수준이리라. 하긴 꼿꼿이 선 채 익사한 남자의 인내력을 그 밖의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임무 당 3회 제한이 있는 것도 납득이 가네.’

그야말로 시우다운 스킬.

‘좋아.’

그렇게 시우를 병영에 배치했지만, 시우와 비류아가 서로 더 교감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서로 붙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방해하지 않고 살금살금 물러나왔다.

“어이.”

역시 살금살금 다가온 야리소연이 내 귀에 대고서 속삭였다.

“왜.”

나도 속삭였다.

“너 좀 쩐다.”

“그걸 이제 알았냐?”

“그리고 재수 없다….”

“그걸 이제 알았냐?”

“때려도 돼?”

“안 돼.”

“한 대도?”

“안 돼.”

야리소연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나왔다. 마치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 같은 얼굴이었다.

‘누가 보면 때리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들은 게 아니라 간곡한 부탁을 단칼에 거절당한 줄 알겠네….’

음?

맞아. 그러고 보면.

“야리소연.”

“웅?”

“네가 나한테 깨달라고 했던 서브 퀘스트 있잖아?”

“어어?”

야리소연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건 좀 다음에 가자.”

“어.”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야리소연이 볼을 긁적였다.

“뭐야 너… 그거 기억하고 있었냐?”

“그럼 까먹었겠냐? 이 고귀한 지능을 가진 문명인 님께서?”

“…으으음.”

야리소연은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꼭 천산갑을 코로 쿡쿡 찔러보는 흑표범처럼.

“너 쫌 쩐다 역시….”

“그걸 이제 알았냐니깐.”

“아씨, 으스대지만 않으면. 근데 왜 나중이야?”

“지금 가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거든.”

태학관은 왕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나는 거기서 나름 수석 자리도 차지했던 몸이다. 왕국 제사장이 열 명쯤 합체해서 만들어진 식자층 중의 식자층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런 나도 어디까지나 논리와 문해, 웅변 쪽에 능할 뿐이었다. 무술은 물론이고 약술이나 의술, 제작과 해체 따위에는 그닥 재주가 없었다.

그런 내 사정을 압축해서 들려주자 야리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중에 태학관인지 뭔지 세우면 거기서 약술이랑 의술 배운 다음에 가려구?”

“어허. 그리 어렵게 갈 것 있나. 사람이 말이야,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누가 야만인 아니랄까봐 하여간. 쯧쯧.”

“그러게. 야만인답게 박치기로 머리 좀 깨드릴까, 우리 서방님?”

“아니아니! 머리라는 게 그러니까, 스킬 말야 임마.”

“스킬?”

“응. 스킬 뒀다 어따 쓸라그래.”

“스킬은 웬… 아.”

야리소연이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깨다보면 어쨌든 왕국 의료원이나 궁전 내의원(內醫院) 같은 거 만들어지지 않겠냐?”

질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 다시 말해 치도의 근본 중 하나다.

“언제쯤 생길지야 모르겠지만 뭐. 시우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자면 시간 많이 있잖아? 임무 깨고 또 깨고 하다가 그런 건물 생기고, 거기에 어의(御醫)쯤 되는 양반을 관리자로 앉히고 막 그렇게 되면 바로 깨줄게.”

“….”

야리소연은 물끄럼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질량이 있다면, 마치 얼굴부터 시작해 온몸을 조물딱거리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뭘 보냐?”

야리소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재수없을 만큼 쩔길래.”

내가 좀 그렇단다.

◈          ◈          ◈

그리하여 모든 인과가 집행되었다. 보상도 정산되었고, 인원 배치도 끝났다.

“시우여. 조금 더 위쪽을 주물러보도록 해라.”

“예, 저의 부군(婦君). 저의 영원. 저의 만월이시여.”

닭살을 떠는 양반들이 둘 있었지만 저거야 이해해 줘야겠지.

“저어, 뽀시래기 여러분. 살가운 모습이 보기 좋긴 하지만은, 예언자님께서 임무 들어가면 진지하게 해주셔야 해요?”

아리야도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비류아는 드물게도 헛기침을 했다.

“음, 명심하마.”

시우도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조심스레 천사를 불렀다.

“그… 천사님?”

“예, 무엇입니까?”

“법왕을 향한 의사 전달… 그러니까 메시지인지 하는 것을 혹시 저도 보낼 수 있습니까?”

천사는 난색을 표했다.

“그것은 어렵겠습니다. 마호스 신학 용어로 말하자면 차후 3 패치가 있다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메시지 전달에 가용 가능한 리소스가 부족한 것입니다.”

즉, 시우는 세 은월들처럼 내게 임무 중 직접 조언을 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상관없다.”

비류아는 시우의 귀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지켜보던 중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선 나에게 말하도록. 듣고 타당하게 여겨진다면 바로 전달해주도록 하마.”

“예, 폐하.”

시우가 고개를 조아렸다.

‘좋아.’

조언하는 목소리가 이 이상 늘어나봤자 머릿속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앞으로도 세 은월이 조언을 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준비 끝.’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마치자마자, 천사가 나를 불렀다.

“그럼, 간신이여.”

“예.”

나는 홀가분해진 얼굴로 한 걸음 나섰다.

“다음 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휘황한 빛이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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