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내가 왕국이다 (4)
다음 상대를 찾는 내 질문에, 대답을 대신한 것은 긴 정적이었다.
최소한 지금 남아있는 작자들 가운데 나한테 덤벼들 만한 깜냥이 있는 녀석들은 없었던 것이다.
아리야가 깨달은 듯 신음했다.
[최초의 성녀: 애초에, 지목해서 도발했던 것도 지금을 위한 포석이었군요.]
‘그렇소. 남겨두면 성가셔질 것들을 미리 정리했지.’
[최초의 성녀: 그냥 둬도 죽을 이들을 굳이 또 머리를 박살내서 죽인 것도 그래서….]
‘최대한 잔혹하게 갔지. 망설여 주길 바랬거든.’
그리하여 바라던 대로 되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더 이상 결투를 제기하는 자가 없는 것 같네요.”
사람들을 향해 나는 말했다.
“지금부터 왕국의 모든 부와 거기에 속한 전사들은 제 휘하에 들어옵니다.”
정적이 있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아삼 부장이었다. 외눈으로 내 모든 결투를 지켜보던 그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영원히 말이오?”
나는 도끼들을 허리춤에 찼다.
“16년.”
이세가 20살이 될 때까지.
“앞으로 16년간, 제가 군권을 맡도록 하겠어요.”
“약속할 수 있소?”
“달의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요.”
아삼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아삼 부장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이들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찾아든 정적 속에서, 나는 마침내 부장이나 전사들이 아닌 이들을 향해 말할 수 있었다.
"왕국민들이여.”
나는 제사장에게 빙의했을 무렵을 떠올렸다. 신전에서 주어지고 있을 연설 기능 또한 떠올렸다.
“시왕님께서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커다란 재난이 이 왕도(王都)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말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오늘,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었다.
“많은 분들께서 의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달의 여신께서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내리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이런 응보를 받아야하는지.”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화산이 폭발했고 그 여파가 우리를 덮쳤다. 그뿐이었다.
아리야의 피난길 임무 때 여러 개의 폭풍이 상륙했던 그때처럼, 자연은 그렇듯 아무런 의도도 없이 우리에게 지독한 짓들을 저지르곤 했다.
“저는 법왕으로서, 여신의 뜻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한 자연에게 ‘의도’를 상정하는 것이 지도자의 과업이며.
“왕국에 앞으로 수많은 환난이 닥쳐올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지침’을 부여하는 것이 지도자의 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먼 시조, 최초의 성녀와 첫 번째 예언자가 환난을 이겨내었던 그 때처럼, 우리는 그 환난들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일을 했다.
“오늘,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묵묵히 그 일을 했다.
“그러나 오늘, 하나의 별이 졌습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그 일을 했다.
"그 별은 우리 왕국을 인도했습니다. 굽어 살폈습니다. 우리가 이따금 갈 길을 잃어 헤맬 때, 우리의 앞길을 비추었습니다. 예, 여러분. 왕국의 아버지, 태부 각하께서 작고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여러분은 지금 슬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애도하는 소리가 저한테도 들려옵니다. 왕국을 굽어 살피시는 선조들도 눈물을 흘리며, 달의 여신께서도 당신의 가장 충실한 종이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여러 가지를,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제단에 바쳐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태부께서는 여러분의 눈물보다도, 여러분의 땀과 피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류아를 생각했다.
"왕국의 안위. 영광. 평화. 이것이 태부 각하께서 생전에 바라셨던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땀을 흘린다면 단지 왕국의 안위를 위하여, 우리가 피를 흘린다면 다만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삶을 바친다면 오직 왕국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왕국을 생각했다. 500년 뒤의 왕국을 생각했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냈던 인연들을 생각했다. 몰려들던 야만족들을 생각했다. 어전에 들이닥쳤던 놈들을, 놈들이 날렸던 화살을, 화살 앞에서 순수하게 웃던 얼굴을, 그녀를 감싸고 죽었던 나를.
내가 여기 있게끔 만들었던 그 변덕을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했고.
"여러분은 태부 각하의 시체에서 그분의 죽음만을 보십니까? 저는 서 있는 채로 죽은 태부 각하의 몸에서 여태껏 그분께서 바치신 땀과 피, 마지막으로 그분의 삶을 봅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들을 살리는데 모든 것을 바친 한 남자를 생각했다.
"왕국의 장래에."
이세를 생각했다.
"왕국민의 안위와 영광, 그리고 평화의 상징에."
생각하며 말했다.
"태부 각하께서 숨을 거두신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는 태부 각하의 삶을 지켜야 합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장례의 예법이라면, 죽은 자의 삶을 지키는 것은 진정한 애도이고 추모일 것이므로.
"태부 각하께서 그리 하신 것처럼,"
나는 말했다.
"저는 저의 땀과 피, 삶을 모두 각하의 일생을 따르는 데에, 그리하여 국본 되시는 이세 폐하를 지키는 데에 바치겠습니다."
나는 돌아섰다.
금자탑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위에서 자고 있을 4살배기 소년을 향해서. 아직 아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린 아이를 향해서.
"우리의 주군께서 장차 장성하시어, 왕국 전역을 밝혀줄 또 하나의 거대한 별이 되실 때까지."
나는 말했다.
"16년 후의 그날까지, 저는 앞서 인도한 별빛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수호할 것이며, 다음 세대의 별자리에 제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왕국민 모두가,
그들의 모든 선조가,
하늘의 대리자가 내 말을 듣고 있었다.
+
<역사변이점>
- 건국 15년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 삼국 협상 / 난이도 B ]
[ ★ 맞선 / 난이도 B ]
+
바로 그 순간, 모든 임무에 달성 표시가 찍혔다.
그리고 세상이 크게 흩어졌다.
◈ ◈ ◈
눈을 뜨자, 나는 저승에 돌아와 있었다. 아직 재건이 끝나지 않아 황량한 거리와 곳곳에 서성이는 흐릿한 망자들이 나를 반겼다.
물론 진짜로 반기는 존재도 있었다.
“가리비수-!!”
펄쩍, 지붕에서 뛰어내린 야리소연이 나를 덮쳤다. 저승의 내 몸은 법왕마냥 생전의 내 몸과 다를 바 없는 비실이여서, 나는 나동그라지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워메!”
“고생 많았어, 가리비수!”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부벼 대며 말하는 야리소연. 나는 한숨을 지으면서 그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아, 좀…. 뭐냐. 낯뜨겁게 시리.”
“낯 좀 뜨거우면 어때서! 엄청 고생했는데, 우리 서방!”
“고생이야 늘 하는 거지. 됐어.”
“에이씨, 뭐야. 진짜. 답잖게 시리.”
야리소연이 투덜거리면서 일어섰다. 천으로 온몸을 감싸 한 단계 막을 걸러 전해지는 목소리가 그 위에 보태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간신이여. 평소 같았으면 양 허리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치켜세우면서 ‘음핫핫하하하! 제가 완전 제대로 해낸 거 보이십니까! 캬! 스스로 생각하지만 참 어쩜 이렇게 용 쩌는 인간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요. 다들 감탄하십쇼들!’ 어쩌고 하면서 주접을 떨 시점 아닙니까?”
이 양반은 정말.
“대체 절 뭘로 보고 그러십니까?”
“당신을 당신으로 보고 그럽니다.”
“아, 됐고요. 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시왕님은 어디에… 아. 저기 계시군요.”
저승의 궁전 앞 한복판에 비류아가 앉아 있었다. 아리야가 그런 비류아의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하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비류아. 걱정하지 마세요.”
“….”
“시우는 죽었잖아요? 그리고 여긴 저승이구요. 그러니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요.”
“…음.”
비류아는 아리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리야. 그대는 여러모로 선량하고 또 상냥하다만, 지금 그 말이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여 입에 담고 있는 거라면 나로서는 여러모로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어어, 그, 그런가요? 저는 그냥 음… 그러니까.”
아리야가 쩔쩔맸다. 야리소연이 낄낄거렸다.
“괜히 머리에 꽃 꽂은 게 아니라니깐.”
“아 쫌! 그 얘기는 그만하자구요!”
아리야가 빽 소리 질렀다. 야리소연은 어휴, 무서워라 하면서 겁먹은 시늉을 해보였다.
저승의 닻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겨우 좀 나도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웃는군요.”
천사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웃으니 좋으십니까?”
“아니요, 재수 없습니다.”
단칼에 말하는 천사님.
언제나처럼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그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다….
“뭐 제가 좀 웃는 모습이 재수 없다는 소리들을 듣기는 했습죠. 주로 야만인들한테 말이죠.”
“문명인이라고 다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웃는 모습‘도’ 재수 없다 아니었습니까? 당신을 보고 과연 재수 좋다 여기는 이들이 있기나 했을지 궁금합니다.”
“어허. 절 뭘로 보시고. 저 생전에 제법 인기 좋았습니다? 태학관 똘똘이 하면 절 뜻하는 말이었다 아닙니까. 그뿐인가요, 몇 차례 말했지만 고백도 참 많이 받았고…. 다 거절했지만 말이죠.”
“‘확실히 해두자. 내가 너희 찬 거다?’인가요…. 세기의 간신인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소갈머리 좁은 사내가 이 세상에 있다니 정말이지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고 할지. 여긴 저승이니 저 세상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아?”
야리소연이 끼어들었다. 천사는 낙낙한 옷감으로 야리소연의 얼굴을 뒤집어씌워 숨통을 조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읍읍?! 뭐, 뭐하는 거야 얌마!”
“세상에서 가장 쓰잘데기 없는 딴지를 들은 기분이니까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적 평형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야리소연과 천사가 아둥바둥하는 꼴은 아리야와 비류아에게도 영감을 준듯했다. 먼저 아리야가 우와… 소리를 내면서 감탄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언자님을 상대로도 몇 번 흐트러지지 않았던 천사님을 저렇게 평정심을 잃게 만들다니….”
“잠깐, 아리야. ‘날 상대로도 몇 번 흐트러지지 않았던’이라는 구절이 꼭 필요한 거요?”
내 말에 아리야는 죄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더 캐물을 수 없었던 것은, 때마침 비류아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천의 시왕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야리소연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존경심이 들 지경이로군.”
뭐가 그러게 말이다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시왕님.”
“음.”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뭐든 말하는 게 좋겠지.
“일단,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야 그대가 했지.”
“그래도요.”
“음.”
그뿐. 그리고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때로는 그냥 침묵으로 족할 때가 있다.
“자!”
그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아리야가 손뼉을 쳤다.
“좌우간 수고하셨어요, 예언자님!”
“고맙소, 아리야.”
“에헤헤, 네. 이제 보상을 받을 시간이네요!”
그렇게 말한 아리야는 저승의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첫 번째 입주자로서 몇 차례 내가 보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아온 만큼 보상이 뜨는 타이밍을 나름 알게 된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아리야가 허공을 바라본 그 순간, 바로 그 곳에서 축포가 터졌다.
[ 축하드립니다! ]
보상 수여가 시작된 것이었다.
[ 왕가의 안위를 보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삼국간의 평형상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혼인을 통해 당신의 가문을 결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언제나와 같은 문자들이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다만, 이번에는 ‘역사변이도’ 대신 다른 것이 떠올랐다.
[ 인과(因果) 포인트를 산출합니다. ]
음?
[ 은월을 지켜라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3p 획득합니다.]
[ 삼국 협상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4p 획득합니다.]
[ 맞선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3p 획득합니다.]
“어….”
[ 인과(因果) 포인트를 총합 10p 획득했습니다. ]
“인과 포인트라고?”
뭐야,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