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내가 왕국이다 (3)
태부의 장례식이 막 끝난 직후였다.
내가 서 있는 이 곳, 부장들이 모여 있는 이 장소. 금자탑 주변에는 이목이 많았다. 부장들이 끌고 온 직속 병사들뿐 아니라 장례식을 주관한 신관들, 태부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참관하기 위해 모여든 일반 백성들 또한 수없이 모여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빼는 모습을 보였다간 체면이 상할 터였다. 그리고 ‘체면’과 ‘명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은 이들 중 아삼 부장뿐이었던 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부장들은 대번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전장에는 나서본 적도 없는 작자가!”
좋다.
“시왕 폐하와 태부 각하께서 좀 아껴주셨다고 부뚜막에 올라서서는!”
좋았다.
“하찮은 노예 출신 따위가!”
아주 좋았다.
“방금 꺼내든 말, 저지른 짓거리! 제대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좋았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 저한테 깨지시는 분들은 ‘전장에 나서본 적도 없이’ ‘시왕 폐하와 태부 각하의 총애를 받았을 뿐인’ ‘하찮은 노예 출신’ 따위에게 깨지시는 거겠네요?”
나는 웃으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도끼를 꺼내어 기수식을 취했다.
“그 쪽이야말로 ‘방금 꺼내든 말’과 ‘저지른 짓거리’, ‘제대로 책임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성파 부장들이 노호했다.
“이 개자식이!”
“죽여 버리겠다!”
“허허, 이런 날에 피를 보고 싶진 않았거늘!”
가리비수 부를 통솔하는 부장과 야리소연 부를 통솔하는 부장, 그 밖의 강성파 부장들도 한 마디씩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흉흉한 살기. 바위 몇 개를 박아놓은 것 같은 근육의 결들이 독 품은 살무사처럼 꾸물거렸다.
“자.”
나는 도끼 끄트머리로 그 중 한 명을 적당히 가리키고서 말했다.
“그 쪽 부장님. 이름이 뭐더라… 아, 기억 안 나네요. 그렇네요, 수염 긴 얼간이부터 나오시죠.”
“이 노옴!!”
수염 긴 얼간이는 칼을 빼든 채 바닥을 찼다. 탕…! 걷어차인 바닥에 흙이 사방으로 튀고, 그 기세를 타고 얼간이가 수염을 흩날리며 짓쳐들어왔다.
가리비수 조각상은 내게 도끼술 Lv.3의 힘을 내려주고 있다. 병영에서 얻었던 각종 무술 Lv 및 똑같이 Lv.3인 예언의 위력을 생각해보면, 내 도끼술은 거의 달인의 영역에 달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달인의 영역에 달해 있었던 것은 시우 역시 같았다. 사람은 기술을 갈고 닦음에 따라 누구나 달인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수염 긴 얼간이 역시, 칼의 달인 중 한 사람이었다.
캉…!
달인의 일격을, 나는 비스듬히 튼 도끼날로 튕겨냈다.
손목이 꺾일 법한 부하(負荷),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죽어도 할 말은 없으렷다!”
창노하여 소리치는 수염 긴 얼간이의 입가에는 숨기지 못한 미소가 흉져 있었다. 아예 이 기회에 날 죽여 버리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에게는 그만한 역량이 있었다.
둘 간의 싸움에서 기술이 동등하다면 남는 것은 결국 체력과 질량과 체적비. 다시 말해 신체적 우열의 격차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두말할 것 없이 저 수염 긴 얼간이가 윗줄이었으므로, 나는 시종일관 막는데 급급하다가 쓰러져 목이 따였을 것이었다.
[첫 번째 은월: 뒤로 세 걸음.]
만약 내가 나 혼자서 스킬만 믿고 싸웠다면 말이다.
[첫 번째 은월: 물러서자마자 곧바로 옆으로 한 발, 쳐서 피하고. 응. 사각을 왼쪽 도끼로. 목 줄기. 도끼 들어 찍지 말고, 들어 올리면서 사선으로 그어버려.]
나는 그렇게 했다. 덤벼드는 수염 긴 얼간이의 큰 걸음을 뒤로 세 걸음 물러서 피하며, 수염 긴 얼간이가 그런 날 쫓아오기 위해 한 걸음 더 걸어온 즉시 바로 바닥을 차 옆으로 튀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얼간이의 얼굴, 놈의 입장에선 순간적으로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렇게 맹점으로 이동하자마자 나는 야리소연이 시키는 대로, 원시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기술 그대로, 이동하는 몸놀림에 맞추어 도끼를 사선으로 올려 그었다.
피가 터졌다.
“쿠훅…!”
수염 긴 얼간이가 비명을 터뜨렸다.
[첫 번째 은월: 사람을 경직시키는 데에는 필살의 일격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혈관을 터뜨리는 것도, 아주 얕은 깊이의 상처로 충분해.]
[첫 번째 은월: 그리고 그렇게 일순이라도 경직시킨 순간-]
[개천의 시왕: -필살의 일격을 날릴 틈은 자동적으로 생기게 된다.]
[첫 번째 은월: 아, 씹. 왜 남이 하던 말에서 제일 좋은 부분만 쏙 빼먹냐?]
[개천의 시왕: 야리소연. 내게 묻는 것이라면, 이리 대답해주마.]
[개천의 시왕: 틈을 준 녀석이 잘못한 것이다.]
[첫 번째 은월: 그건 그렇네.]
저승에서 오가는 대화와 같은 이치로, 틈을 준 것은 수염 긴 얼간이의 잘못이었다.
나는 그 잘못을 놓치지 않았다.
도끼를 들어, 한 발 나서며, 체중을 실어 후려쳤다.
퍽…!
도끼가 정확히 수염 긴 얼간이의 경추에 꽂혔다. 수염 긴 얼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꾸르륵, 피거품을 흘리고는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몇 차례 꿈틀거렸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도끼를 들어, 머리를 후려 찍었다.
쾅…!
사방으로 피와 뇌수가 튀었다. 나는 한 차례 더, 또 한 차례 더, 뼈와 살과 뇌가 곤죽이 될 때까지 도끼를 휘둘렀다. 사람들의 질린 시선이 나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서. 마침내 완전히 그 수염 긴 얼간이의 머리가 으깨진 다음에야 나는 도끼질을 멈추었다.
“후우.”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다음.”
그리고 나의 시작이었다.
“당신, 나오세요.”
얼굴에 전투 화장을 덕지덕지 찍어 바른 솔로마 부의 부장을 도끼로 가리켰다.
순식간에 결판이 난 이 싸움에 당혹하던 그는, 내 지목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웅얼거렸다.
“어, 어찌 이런 짓을…. 주, 죽일 것까지는….”
“결투를 하는데 삶과 죽음이 갈리는 건 흔한 일 아닌가요?”
“그, 그래도! 아니, 그래도….”
“그래도?”
나는 도끼를 한 차례 위로 던졌다가 탁, 손잡이를 나꿔챘다.
“그래도 뭐요?”
솔로마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당혹한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이건… 이건 그러니까… 충분히 말로 협의를 할 수 있는 사항을 갖다가….”
“아, 말이 많네요 당신.”
솔로마 부장이 멈칫했다. 나는 비스듬히 웃었다.
“부장은 전사들의 장이 아닌가요? 쫄리면 부장 떼시던가.”
솔로마 부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직속 전사들과 왕국민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로마 부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분노가, 수치심이 차례로 몰아쳤다. 솔로마 부장은 이를 악문 채 칼과 방패를 빼들었다.
[첫 번째 은월: 방패 쓰네. 나 살던 시절에는 드물었던 병종인데….]
[첫 번째 은월: 비류아. 저건 네가 상대해야할 것 같다.]
[개천의 시왕: 알고 있다.]
[개천의 시왕: 기름을 먹여 말린 나무를 휘게 하여 틀을 잡고 그 테두리에 청동과 가죽을 둘러 만들어진 솔로마 씨족의 특제 방패다. 잘못 쳤다간 도끼날이 그대로 스쳐 지나게 될 거다. 그렇다고 테두리를 찍었다간 청동과 가죽에 씹히고 나무에 박혀서 빼내지도 못하게 될 테지.]
‘그럼 어떻게 상대할까요?’
[개천의 시왕: 일단은 대치다. 너는 지금 두 개의 도끼를 들고 있다. 언제든 던질 수 있게끔 자세를 잡아라.]
나는 그렇게 했다. 수염 긴 얼간이의 뇌수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끼가 그렇게 언제든 던져질 수 있게끔 장전되자, 솔로마 부장은 긴장에 가득 찬 얼굴로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몸을 수그렸다.
솔로마 부장이 든 방패의 너비와 높이는 딱 하관과 상반신 일부를 가릴 수 있을 정도여서, 그런 자세를 취하자 그는 드러난 신체 대부분을 보호하면서도 나를 노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
나도 다가서지 않고 그도 다가오지 못하므로, 필연적으로 대치가 이어졌다. 길어졌다.
그리고 숨죽인 채 결투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길어지는 대치를 더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헛기침 소리를 냈다.
“저기 모두….”
바로 그 순간.
[개천의 시왕: 머리를 향해 도끼를 던지는 척해라.]
나는 비류아의 말을 따라 젖혀두었던 어깨를 앞으로 휘둘렀다. 움찔한 솔로마 부장은 머리를 수그리고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개천의 시왕: 바로 진짜로 집어던진 다음 돌격.]
그렇게 했다.
날아든 도끼가 방패 중앙에 박혔다. 쿵…! 솔로마 부장으로서는 예상했던 것보다 약간 늦게 충격을 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큽,” 그 시간차 공격에 흐트러진 솔로마 부장의 숨, 바로잡을 틈을 비류아는 주지 않았다.
[개천의 시왕: 허리를 숙여 두 번째 도끼로 무릎을 찍고.]
나도 주지 않았다.
쾅…!
“크허억!”
연골이 부서졌다. 무릎 뼈가 깎였다. 피와 비명이 터졌다.
솔로마 부장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개천의 시왕: 마무리다.]
나는 무릎에서 도끼를 빼냈다. 역시나 비명이 터졌지만 무시하고, 검을 쥔 손목을 짓밟아 솔로마 부장의 반항 일체를 봉쇄했다. 그 다음에는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퍽,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 사방으로 튄 피와 뼈와 뇌수가 마침표를 남겼다.
“다음.”
내가 말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흐르고 나서, 부장들과 그 직속 전사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 이건 폭거요!”
“그, 그렇습니다! 법왕님, 이건… 그, 신전의 법도가! 어련히, 부장과 신관의 몫이 다르거늘….”
“우, 우리 부장님을! 부장님을 죽이시다니, 이, 이걸 두고 우리 부가 어찌 반응하실지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 모든 반응을 당연히 예상한 바였다
나는 말했다.
“말했잖아요.”
유명을 달리한 솔로마 부장의 방패에 박힌 도끼를 다시 빼내면서.
“꼬우면 덤비라고요.”
부장들을, 전사들을 노려보았다.
“꼭 부장이 아니어도 돼요. 방금 말씀하신 분. 솔로마 부장의 직속 전사시죠? 부장님의 한을 갚고 싶으세요?”
“나, 나는….”
“그럼 무기 들고 나와요. 아가리 털지 말고.”
부장들과 전사들 너머, 그런 그들과 나를 올려다보는 왕국민들을 향해 말했다.
“왕국의 존재를 증거하는 시왕의 금자탑 앞에서, 태부 시우 님의 장례식 직후에 벌이는 신성한 결투입니다.”
말했다.
“결투에 참여하시거나, 영원히 꼬리를 마세요.”
조용히 말했다.
“뒤에 가서 딴소릴 하는 자, 시왕 폐하와 태부 각하, 그리고 달의 여신의 이름으로 저주받을 겁니다.”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들이 압도당해 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자, 그래서.”
나는 도끼를 교차시켰다.
“다음 없어요?”
부장들과 전사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 ◈ ◈
결론부터 말하면 몇 명은 있었다.
“다음.”
그 중의 일부는 기술이 없었다.
“다음.”
그 중의 일부는 체력이 없었다.
“다음.”
둘 다 갖춘 이들 역시 사냥꾼 야리소연과 용 살해자 비류아의 조언이라는 추가점이 없었다.
“다음.”
다시 말해서, 그들 모두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음 없나요.”
마침내 모든 부장과 전사들이 침묵했다.
나는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내가 깃든 법왕의 몸은 체력이 약했다. 그런 몸으로 연속으로 생사결(生死決)을 치루어 낸 것이다.
지치는 것이 당연했고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어지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참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또 누군가가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거듭되면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해도 내가 지쳤다는 것쯤은 저들도 알고 있을 테지.’
그러니까 참았다.
앞으로 다섯 명의 대가리는 더 깨부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듯 가슴을 폈다.
‘자기가 그 다섯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다면 덤벼보시든가.’
당당한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다음 없냐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