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83화 (83/261)

83. 내가 왕국이다 (2)

야리소연이 상황을 정리했다.

[첫 번째 은월: 그럼 뭐야. 결국 누군가에게 군권을 준다는 건 나중의 똥을 예약한다는 거네?]

[최초의 성녀: 하지만 누군가에게 안 줄 수도 없다는 거지요?]

[첫 번째 은월: 아니면 혹시 뭐 다른 방법 있어?]

생각.

‘2 이세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군공(軍功)을 세운다.’

[첫 번째 은월: 이건 뭔 참신한 개소리?]

‘개소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입증된 방법론이야.’

[개천의 시왕: 당장 주온과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무렵, 내 지지 기반 역시 내가 세운 군공에 의한 것이었지.]

‘예. 그러니까 전쟁 한 판 벌여서 화끈하게 승리한다. 그로써 군권은 왕가의 손에 들어간다.’

[첫 번째 은월: 그러니까 참신한 개소리라는 거지.]

[첫 번째 은월: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안 되잖아. 적당한 놈 때려서 가오 잡는다는 건데, 그렇게 때릴 적당한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데?]

[최초의 성녀: 알실라, 나투아와는 향후 25년간 불가침 조약….]

[개천의 시왕: 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한다고 해도, 평형 상태가 이루어진 지금은 먼저 움직이는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개천의 시왕: 같은 이치로 군사력을 빼서 대륙이나 북방을 칠 수도 없다.]

‘섬에는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 문제로 애초에 도달할 수가 없기도 하고요.’

나는 인정했다.

야리소연은 계속 말했다.

[첫 번째 은월: 무엇보다 이세가 군공을 세운다는 게 좀 많이 개소리야.]

[최초의 성녀: 네, 당장 이세는 지금 4살배기니까….]

‘그렇소. 사실 최상의 구도는 시우가 살아서….’

[첫 번째 은월: 응. 이세 저 쪼무래기가 어엿한 어른이 될 때까지, 한 16년은 살아서 버텨주는 거였다 이 말이지? 이세가 그 때 가서 군공 세우고. 그렇게 군권을 차츰차츰 이양 받고.]

‘응. 자기 아버지한테서 받는 거니 군권 승계도 수월하게 이루어졌겠지.’

[첫 번째 은월: 그치만 이제 다 불가능해진 소리니까 전부 젖혀놓고.]

[첫 번째 은월: 다른 방법 있어?]

음.

‘하나 있기는 해.’

[최초의 성녀: 뭔가요?]

‘별로 마음에 들진 않소만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3 내가 군권을 장악한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야리소연의 황당하다는 반문으로 깨졌다.

[첫 번째 은월: 엥? 네가?]

‘응. 내가.’

[첫 번째 은월: 어떻게? 왜? 그 밖에 문제는?]

나는 마지막 것부터 대답했다.

‘일단 내가 군권을 장악하게 되면, 행정권과 군권 전부를 손에 쥐게 되겠지. 누군가에게 군권을 넘겼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다는 거야.’

[최초의 성녀: 그건 저도 알겠어요.]

[최초의 성녀: 그런데 군권만 넘어가도 이세가 장식품이 될 수 있다는 게 아까 말한 이야기의 요지 아니셨나요?]

‘맞소. 하지만 다른 가문에 넘어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크지.’

나는 내 가슴을 짚었다.

‘만약 다음 임무 때에도 내가 이 몸 안에 들어온다면, 그리고 이세가 적당히 나이가 찬 상태라면, 내 의지 그대로 군권을 반납하면 되오.’

[첫 번째 은월: 올. 근데 하누리 걔 성깔 있잖아. 흑치사라도 만만한 애 절대 아니고.]

[첫 번째 은월: 걔네랑, 혹시 그 때 태어났을 니 애기들이 게거품 물고 지랄하면 어쩌려고?]

‘그거야말로 내가 치워야할 똥이 되겠지.’

[첫 번째 은월: 해탈했고만.]

‘그래도 행정권만 갖고 다른 가문에서 군권을 빼오는 것보다야 훨씬 현실성 있다는 건 사실이야.’

[최초의 성녀: 다음 빙의 때 법왕이 아니라 그 후계자 몸에 빙의하시게 되면요?]

‘외동이면 뭐 똑같이 하면 되오. 외동이 아니면… 그 때부터는 이야기가 복잡해지겠지. 형제자매들과 암투를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겠소.’

야리소연의 말처럼 하누리도, 흑치사라도 만만하지 않다.

만약 법왕이 죽었는데 그 둘이 살아있다면, 형제자매에 더해서 당시 빙의체의 어머니에 속할 둘과도 암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하누리는 그래도 좀 담백한 구석이 있지만은, 흑치사라는 명백히 주온 상위호환. 거기에 수십 년 짬이랑 나투아 친가 지원이 더해지면….’

생각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도 당연.

야리소연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첫 번째 은월: 완전 막장 콩가루….]

이 야만인은 가끔 보면 왜 이리 대책 없이 날카로운 눈썰미를 자랑하고 난리일까? 이것이 야생의 감이라는 걸까?

[개천의 시왕: 그쯤하면 ‘생기게 될 문제’와 ‘왜’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답한 것 같군.]

[개천의 시왕: ‘어떻게’ 할 셈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군권을 장악하겠다는 것인가?

‘그거야말로 제가 말로 해봤자 의미가 없고.’

나는 품에 매두었던 손도끼를 챙겼다.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바로 그것을 기다린 것처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법왕님.”

그것은 제사장의 목소리였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예, 제사장.”

제사장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고개를 수그린 것인지 조금 아래쪽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음.

“제사장.”

“예, 법왕님.”

나는, 잠든 이세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이세 폐하를 부탁할게요.”

제사장은 다시금 깊이 읍했다.

“예, 법왕님.”

바로 얼마 전.

익사해가면서도 아들을 무등 태운 채 버티고 서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이제 그 남자는 죽었고, 지금 나는 살아 있었으므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          ◈          ◈

“태부 각하께서는 정말이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신 거요.”

“영웅적? 신화적인 죽음이지.”

“마땅히 명예의 전당에 들 만하오. 당장 조각상을 만들어서….”

“아니, 아직 조각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거요? 신전 놈들은 대체 무얼 하길래!”

“애초에 그 놈들 하는 일이 뭐 있기야 했소? 시왕님께서 말년에 풀어주셨기에 망정이지, 우리 지나갈 때면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던 것들이….”

“대체 법왕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제꺽제꺽 진행을 해야지 뭐 하는 것도 없이 신전에 턱 틀어박혀서는, 에잉.”

“태부 각하의 장례식도! 마땅히 법왕이 하나부터 끝까지 맡아 진행해야하거늘. 자기 아래 제사장에게 태반을 떠넘겨버리다니 대체 무슨 사람이 그런….”

“아니아니, 누군가는 이세 폐하께 붙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까 그런 비리비리한 양반이 붙어서 뭘 하겠다는 거요!”

“더군다나 두 추물을 신붓감으로 맞이한다지 아마?”

“세상에. 외팔이 병신이랑 괴물딱지 면상이라니. 비위도 좋구만. 비위도 좋아.”

“그러게 말이외다. 여자야 애만 낳을 수 있으면 그만이라지만 보는 맛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달의 여신만 모시다보면 그런 것도 모르게 되나보오.”

“뱃놈들이랑 땅지렁이들이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런 것들을 여자랍시고 보냈겠소?”

“그걸 또 좋다고 받았으니. 쯔쯔. 바닥이 드러난 거지, 바닥이 드러난 거야.”

“노예 출신이 다 그렇지 않겠소?”

“음? 법왕이 노예 출신인가요?”

“허허, 그러고 보니 댁은 부장 된지 몇 년 안 됐지? 15년 전만 해도 채찍 맞고 돌이나 나르던 노예였어.”

“와, 진짜 몰랐네요. 그런 노예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올랐답니까?”

“그거야 당연히 시왕님 은혜 덕분이지.”

“태부님 은혜 덕분이기도 하고.”

“태부님이 그 사람을 좀 아꼈냐고. 보는 사람 배알이 꼴릴 정도였다니깐.”

“뭐 배알까지 갈 건 없고…. 아무튼 그런 사람이 갔는데, 끌끌. 이세 폐하 핑계로 장례식장엔 나와 보지도 않아?”

“사람이 덜 된 거지.”

“노예 출신이라 그렇다니깐.”

“음, 그치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세 폐하께 붙어 있어야하지 않겠소이까?”

“누가 뭐랬나? 이세 폐하께는 다른 사람도 붙어 있을 수 있다 이거지.”

“가령 누구?”

“그야 당연히 나 같은 사람이 붙어 있어야지. 가리비수 부를 다스리고 5백 명의 전사를 거느린 이 몸이 말이오. 그래야 이세 폐하께서도 든든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겠소?”

“허허, 그건 너무 앞서 나가는 것 아니오? 나 야리소연 부장이야말로 삼백의 정병을 갖고 있소이다. 그 삼백이 모두 기병이지. 시왕님 시대를 기억한다면 기병이야말로 월족의 정수라는 걸 알고 있을 것 아니외까.”

“어허. 월족이 어디에 있소? 하여간 늙은이 티를 못 벗어서.”

“아, 그렇지. 왕국이지, 왕국.”

“왕국 하니 말인데, 왕국의 중심이란 결국 이 도읍지 아니겠소? 그리고 이 도읍지에서 가장 큰 군세를 갖고 계신 건 역시 여기 계신 아삼 부장님 아니시오?”

“….”

“허 참. 듣고 보니 그 말이 사리에 맞는 것 같소이다. 아삼 부장님, 어떻습니까? 태부 각하께서 떠나신 지금 마땅히 아삼 부장님께서 국본(國本) 되시는 이세 폐하의 신병을 맡으셔야 하지 않겠소이까?”

“예끼 이 사람! 신병을 맡다니. 아삼 부장님께서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 기울이시는 것 모르시외까?”

“아,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저는 마땅히 아삼 부장님이야말로 이세 폐하를 보호하시기에 적격이시다, 그걸 모두가 인정하고 계실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인데….”

“그거야 이 사람 생각도 똑같습니다. 하여, 아삼 부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왕의 금자탑 앞.

한 때 노예들이 감독관의 채찍을 맞으며 돌을 나르던 곳에서, 왕국의 군권을 나눠가진 부장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입을 놀려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러 갈래가 합쳐져 만들어졌던 덩어리가 다 그렇듯이, 우두머리를 잃은 지금 그들 사이에선 이전부터 존재했던 알력들이 뱀 혓바닥처럼 넘실거렸다. 균열을 따라 조금 전 없었던 파벌들이 생겨났고, 다음 순간에는 스러졌다가, 또 얼마 지나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 이합집산은 실로 자유로워서 마치 화톳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도끼가 그 화톳불의 중심부를 찍었다.

쾅…!

“음?!”

“아니 무슨….”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부장들이 혼비백산했다. 자신들 한복판에 날아들어 박힌 손도끼를 보고 얼이 빠진 것이었다.

그 손도끼를 던진 장본인, 즉 나는, 천천히 금자탑의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떠들어대던 부장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다음 순간에는 분노가 퍼졌다.

“아니 법왕!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장례식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만은!”

“이 일을 우리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나는 도끼 하나를 더 집어던졌다.

쾅 소리와 함께, 이미 박혀있던 손도끼 자루에 다시금 손도끼날이 파고들었다. 일생 도끼술을 연마해온 이들조차 쉽사리 보일 수 없는 그 신위에 사방이 적막해졌다.

“태부 각하께서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그 신위를 선보인 내가 말했다.

“자신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제게 모든 부의 권한을 맡으라 하셨거든요?”

저벅.

“근데 무슨 일이 생기고 말았네요, 태부 각하께.”

저벅.

“그러니 그 유언, 지금 계승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계단을 모두 내려온 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이 가진 부에 대한 권한들, 제가 모조리 넘겨받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아삼 부장이었다. 지진 당시 한 쪽 눈을 잃은 그가 외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태부 각하께서 정말 그런 유언을 남기셨습니까?”

그의 외눈에는 그의 목소리보다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독심술 없이도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눈빛을 알아들었다.

- 구라지?

그래서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예.”

- 당연하죠.

아삼 부장은 외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가 목소리로-- 그리고 눈으로 말했다.

“그러면, 따를 수밖에 없겠군요.”

- 잘해라.

“예.”

- 고맙습니다.

아삼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는 걸어와 내 뒤에 섰다.

그러자 자연히, 조금 전까지 아삼 부장을 밀어 그 꽁지에 달라붙으려 했던 부장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었다. 보기에 퍽 우스운 꼴이었다.

“아니,”

그 우스운 꼴이 된 부장 중 하나가 당혹하여 말했다.

“그런 말씀을 정말 태부 각하께서,”

“하셨어요. 의심하시나요?”

“그럼 뭐 그런 증서 같은 것을,”

“남기진 못 하셨지만요.”

당혹해있던 부장의 기세가 그 말에 등등해졌다.

“그럼 결국 법왕 당신의 말뿐이란 거 아니요!”

“그렇소!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고,”

“애초에 당신한테 부를 다룰 만한 깜냥이 있기나,”

나는 세 번째 도끼를 던졌다.

쾅…! 두 번째 도끼자루가 아작나고, 첫 번째 도끼날이 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정적 속에서 내가 말했다.

“X발.”

새끼들이.

“혓바닥들이 뭐 그리 길어요.”

그래봤자 나보다 긴 새끼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마음에 안 들어요?”

나도 니들 마음에 안 들거든.

“그럴 때를 위한 해결책이 있잖아요, 우리.”

전사들이잖아, 너네.

“헛짓거리 하지 마시고.”

어줍잖은 정치질 집어치우고.

“자.”

나는 허리춤에서 도끼를 빼냈다.

“불만 있는 부장님들 이리 나오세요.”

하나든 둘이든, 넷이든 여덟이든 간에.

“결투 한 판씩 뜨고 끝장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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