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82화 (82/261)

82. 내가 왕국이다 (1)

그 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날,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었다.

◈          ◈          ◈

시우.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너를 닮은 녀석을 떠올렸다. 네 모든 언동이 그 녀석을 연상케 해서 나는 널 쉬이 좋아하게 됐더랬다.

하지만 너는 결코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정확히는 내가 깃든 이 몸의 주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처음 봤을 때 이 남자는 하잘 것 없는 노예 소년이었다. 심지어 네가 경애하는 사람에게 반란을 일으킨 수괴의 피를 이은 더러운 존재였지. 그런 존재를, 네가 경애하는 사람이 직접 곁에 두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네게 이 남자를 좋아해달라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네가 이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니었을 거야.

너는 이 남자를 볼 때마다 너 자신을 연상했을 테지. 자신을 짓밟은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주워져 그녀를 경애하고 있던 네게, 이 남자는 거울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을 거야.

날 것으로 드러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너는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에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는 또한 머리가 나쁘지 않아서.

이 남자를 너는 차차 인정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 남자 안에 깃든 나를, 내가 가진 능력을, 그 유용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동족혐오는 쉬이 동질감으로 변했지. 사흘도 지나기 전에 넌 나를 믿게 되었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기꺼이 내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어.

내가 나가고 나서도 그 관계는 이어져서, 너는 이 남자를, 법왕을 굳게 믿고 존중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너를.

음.

나는 몇 가지를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 남자의 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네 경애하는 족장님께 간택 받지 못했을 테지. 이 남자는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었을 것이고 너는 전사로 살다가 전사로 죽었을 것이어서 둘 간의 삶이 교차되는 일은 영영 없었을 거야.

나는 몇 가지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네가 이 남자와 쌓은 관계란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잖아. 그러니 이 관계는 곧 나와 너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 남자로부터 벗어나 있던 15년 간, 너와 이 남자가 쌓아올린 관계가 더 깊을까? 그리하여 이 남자와 너의 관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둘만의 것에 가까운 걸까?

나는 몇 가지를 생각한다.

내가 아직 내 몸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생각해본다. 너를 닮았다 여긴 그 남자를 생각해본다. 나를 염려하고 내가 신뢰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나는 몇 가지를 생각한다.

네가 나를 신뢰하였을 때 나를 신뢰한 것인지를.

네가 나를 염려하였을 때 내가 깃든 이 남자를 염려한 것인지를.

네가 나를 벗이라 여겼음을.

내가 너를 벗이라 부를 수 있는가를.

내가 결국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네게 결코 그것을 말하지 않았으리란 것을.

나는 그렇게 몇 가지를 생각하며,

그리하여 지금은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한다.

죽은 뒤에도 아들을 무등을 태운 채 버티고 서 있던 한 남자의 뒷모습을, 나는 오랜 시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몹시.

◈          ◈          ◈

이세를 구해낸 뒤에도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있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음.’

나는 빌어먹을 임무 창을 켰다.

+

<역사변이점>

- 건국 15년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 삼국 협상 / 난이도 B ]

[ ★ 맞선 / 난이도 B ]

+

‘은월을 지켜라’에 달성 표시가 찍혀있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다시 말해서, 뭐냐면….

[첫 번째 은월: 야.]

음.

‘왜.’

[첫 번째 은월: 그냥.]

‘응.’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간 정적이.

그리고.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아리야.’

[최초의 성녀: 호수이아를 기억하세요, 예언자님?]

누구더라.

아.

‘내가 본보기 삼아 손모가지를 잘랐던 남자 아니오?’

[최초의 성녀: 예.]

[최초의 성녀: 그 사람, 그 뒤 결국 외팔이로 살아야 했어요. 그 뿐인가요. 예언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족장, 사제, 신을 모욕했으니 완전히 따돌림을 당해야 했지요.]

‘내 책임이로군.’

[최초의 성녀: 어느 부분에서는요.]

‘다른 부분은 뭐요?’

[최초의 성녀: 호수이아는 내기를 참 좋아했어요. 소모라 살 적부터 말이에요.]

‘그래서? 언젠가는 똑같이 손모가지 걸고 내기를 했다가 똑같은 일을 겪었을 거다?’

[최초의 성녀: 그리고 예언자님께 손모가지가 날아간 뒤에도 여전히 내기를 좋아했지요.]

나는 침묵했다.

아리야의 말이 이어졌다.

[최초의 성녀: 상상이 되세요? 손 하나가 없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렇게 반쯤 시체처럼 우물쭈물 거리면서 살던 사람이, 그 뒤에도 내기판만 열리면 확 눈빛부터가 변하는 거예요.]

[최초의 성녀: 그리고는 당장 끼어들어서, 야! 나도 좀 끼워줘 하고.]

[최초의 성녀: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를 업수이 여기던 사람들도 내기판에서만큼은 어어, 그래, 하고 얼떨결에 받아줘야 했답니다.]

‘전형적인 도박 중독자였다는 말이로군.’

[최초의 성녀: 예. 답게도 그 사람, 도박을 꽤 잘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최초의 성녀: 손모가지가 날아가도,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라도.]

[최초의 성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할 때는 활력을 되찾는다는 말요.]

음.

[최초의 성녀: 그래서 예언자님. 대체 왜 은월을 지켜라에 달성 표시가 안 찍힌 건가요?]

‘아리야.’

[최초의 성녀: 설명해주세요.]

[최초의 성녀: 설명해주시는 것을 예언자 님께서는 좋아하시잖아요. 또 잘하시구요.]

‘그건,’

나는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어서 부정할 수 없겠군.’

[최초의 성녀: 예.]

[최초의 성녀: 좋아하는 것을, 잘 하는 것을 해주세요.]

세 명의 은월.

나를 나로 남게 해주는, 그럴 수 있게 해주는 저승의 닻들.

‘일단,’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일단은… 은월의, 그러니까 이세의 안위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소.’

[첫 번째 은월: 왜? 4살배기가 굴속에 갇혀 있다 나오는 바람에 병 앓을까봐?]

‘그것도 가능성의 하나지. 제사장 계속 붙여놓고 있는 것도 그래서고.’

하지만 그보다는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

‘시우가 죽었어.’

[첫 번째 은월: 니 탓이 아냐.]

‘고마워. 근데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개천의 시왕: 왕국의 태부가 죽었다는 뜻이다.]

음.

‘시왕님.’

[개천의 시왕: 왕국의 태부는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길잡이가 아삼 부장에게 태부의 실종을 잠시간 숨겨 달라 말했던 것, 아삼 부장이 그 말을 따라 부장들을 휘하에 복속시킨 다음에야 태부가 실종됐음을 밝혔던 것을 기억할 테지?]

[첫 번째 은월: 얌마.]

[첫 번째 은월: 무리하지 마.]

[개천의 시왕: 그런 왕국의 태부가 죽은 것이다.]

[첫 번째 은월: 무리하지 말래도.]

[개천의 시왕: 장례식까지 끝났다.]

[첫 번째 은월: …염병. 누가 내 핏줄 아니랄까봐 고집탱이 하고는.]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야리소연. 자랑스러워하셔도 되겠어요.]

[최초의 성녀: 계속 말씀해주세요, 비류아.]

[개천의 시왕: 그것은 곧 현재 왕국의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 말대로였다.

절대 권력자, 완벽초인, 용 살해자 비류아의 서거 이후 생겨난 권력의 공백.

그것을, 나와 시우가 갈라서 겨우 지탱하던 형국이었다.

‘종을 울리고 내려왔을 때 잠깐 생각했던 것처럼.’

왕국의 지도층은 현재 법왕인 내가 관할하는 신관들-식자 및 준 관료 계층과 태부인 시우가 관할하는 부장들-전사 및 호족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후자가 붕 뜨게 생겼어.’

거기에 건국 초기, 4살배기 후계자, 지진의 여파로 혼란한 도읍지를 더하면 뭐가 나올까?

[첫 번째 은월: 처음 임무 들어왔을 때부터 반란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지.]

[첫 번째 은월: 진짜로 주의해야 될 때가 온 거네.]

‘응.’

바로 이 불안 요소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은월을 지켜라’에 달성 표시가 붙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간신 조련사: …그래서 어떻게 할 셈입니까, 간신이여?]

‘정리하지요.’

불안 요소를 쪼갠다.

‘결국 핵심적인 문제는 군권을 장악할 사람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1 누군가에게 군권을 완전히 넘겨준다.’

즉, 태부 시우가 맡고 있던 자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준다. 법왕인 내가 그 승계의 정통성을 보증한다.

[첫 번째 은월: 그 경우 아삼 부장인가 하는 대머리가 가장 큰 후보가 되겠네.]

[첫 번째 은월: 근데 자기 머리숱도 못 지키는 양반이 군권을 지킬 수 있을까?]

‘야리소연. 늘 적절한 시점에 개소리를 해주는 거 진짜 고맙게 생각해.’

[첫 번째 은월: 그치?]

‘응. 그러니까 이제 사람 소릴 해줘.’

[첫 번째 은월: 그 영감 늙었잖아. 눈도 다쳤고. 아마 오래 못살 건데…. 적어도 나 살던 시절에는 눈깔에 뭐 박히고 그러면 몇 년 시름시름 앓다가 뒈졌거든? 이 시대엔 좀 다른가?]

‘크게 다르진 않아. 기본적인 처치법은 물론 그 때보단 발전했겠지만, 신관 계층이 식자층 노릇 하고 앉아있는 걸. 전문 학자가 생길 때까지는 의학이고 약학이고 죄다 거기서 거기라고 보면 돼.’

[첫 번째 은월: 그럼 어렵겠네. 몇 년 못 버티고 깨꼬닥 해버리면….]

[최초의 성녀: 음… 죽지 않더라도, 나이든 사람이 앓아눕는다는 부분부터가 문제겠네요.]

[개천의 시왕: 그렇다. 군권 장악을 위해 기용한 인물인데, 그 인물이 앓아누워버린다면 바로 군권 누수가 시작될 테지. 기껏 군권을 넘겨준 의미가 없다.]

좋다.

‘1-1 아삼 부장 외의 인물에게 군권을 완전히 넘겨준다.’

[최초의 성녀: 그만한 인물이 있나요?]

‘부장급은 모두 열 두 명. 반기 들다 진압당한 사와라 부장과 내통 전적이 있는 바울 부장을 빼면 열 명. 아삼 부장 빼면 아홉 명. 하나하나 면담하면서 천사님께 과거시 부탁하고, 시왕님께 조언 부탁하면 어찌어찌 추려낼 수는 있을 거요.’

[최초의 성녀: 아, 그렇겠네요.]

[첫 번째 은월: 근데 그렇게 해봤자 시우 열화판일 거 아냐?]

[개천의 시왕: 거기에 더해서, 면담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조언하자면, 솔직히 아삼 부장을 뺄 경우 왕국과 이세에 대한 충성심을 보장할 만한 인물이 없다.]

[개천의 시왕: 설령 내가 충성심을 보장할 인물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개천의 시왕: 분에 넘치는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 그 권력이 군권이라면 더 말을 보탤 여지가 없겠지.]

‘그게 문제죠.’

나는 동의했다.

‘지금 누군가를 선택해서 군권을 넘겨줬다. 그래서 임무 달성 표시가 떴다. 그래도 문제예요.’

임무가 달성되면 아마도 나는 그 시점에서 ‘로그아웃’될 것이다.

그렇게 저승으로 돌아간 다음, 십년 또는 수십 년 뒤에 새로운 인물에게 빙의하게 될 터였다.

[첫 번째 은월: 그리고 또 다시 과거의 자기 자신과 필사적인 힘겨루기를 시작하게 되리라는 거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누굴 골라도 수십 년 뒤에는 잘 익은 똥이 되어있을 거야.’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생각을 해보자.

가령 익명의 똑똑이 부장이 모든 군권을 넘겨받았다고 말이다. 이 가정된 똑똑이 부장은 이름처럼 무척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로, 왕국과 이세에 대한 충성심까지 가득하다. 그야말로 초특급 우량 인재가 따로 없다.

심지어 이 초특급 우량 인재 똑똑이 부장은 20년 동안 병을 앓는 일도, 의욕을 잃는 일도, 타락하는 일도 없다. 완벽하게 군권을 장악하고 군소리 안 나오게 보전한다.

여기까지는 완벽하다.

문제는 이 똑똑이 부장에게 아들내미가 셋 있다는 것이다. 각각 평범이, 쓰레기, 조무래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들내미들은 똑똑이 부장이 갖고 있는 것들을 자신들 또한 마땅히 이어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어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똑똑이 부장이 맡고 있던 군권도 포함되어 있다….

이제 똑똑이 부장이 노쇠하여 죽는다. 그때쯤 성인이 된 이세는 똑똑이 부장으로부터 군권을 회수하려 한다. 어쩌면 똑똑이 부장이 죽기 전에 이미 몇 차례 회수하려 했을 수도 있다. 똑똑이 부장 자체도, 이 가정된 인물은 하여간 온갖 성현의 집합체 같은 인물이니까, 기꺼이 군권을 넘겨주려 했을지 모른다.

근데 똑똑이 부장의 아들내미들과 친척들, 그리고 그 부하새끼들이 그렇게 놔둘까?

당연히 줄다리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줄다리기가 끝날 즈음, 이세가 이긴다면 모르되 이세가 패한다면 왕국 역시 멸망할 것이다.

아니, 이세와 왕가는 그대로 상징물로 남되 군권은 여전히 그 가계에 이어지는 편이 더 가능성 높은 일이려나?

[첫 번째 은월: 와, ■발. ■나 리얼하네.]

[첫 번째 은월: 어디서 본 것처럼 말한다, 너.]

‘봤으니까. 바다 건너 ‘섬’이 딱 이런 정치 체제로 굴러가거든. 왕은 그냥 장식품이고 군권 가진 놈이 다 해쳐먹어.’

[첫 번째 은월: 거참 재미있는 녀석들일세.]

실제로도 재미있는 녀석들이다.

다만 왕국이 그런 재미있는 체제를 갖게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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