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81화 (81/261)

81. 태부, 시우 (2)

무너진 굴은 천장과 바닥, 벽과 벽 사이를 들러붙게 했다. 좁은 공간 속에 오가는 대화는 자연히 그 목소리가 낮아졌다.

“구조 말입니까….”

친위대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젊은 남자였다.

나는 그의 이름도 몰랐으나 시우는 그의 인생까지 아는 것이 틀림없었다. 따뜻한 눈으로 그를 보던 시우는 염려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법왕이 있잖느냐. 알아서 수색대를 보내올 게다. 우리가 여기로 온 걸 비밀로 한 것도 아니잖느냐.”

내가 이름을 모르는 친위대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하긴 법왕님이라면 그러실 분이지요.”

“아암. 그렇고말고.”

시우의 장담에 또 다른 친위대원이 끼어들었다. 역시나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신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어서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여기, 오래 있기 좋은 곳은 아니어서요.”

“바닥도 축축하고 원.”

“그러게요. 어서 법왕님이 오셔야하는데.”

살아남은 친위대원들 모두가 한 마디씩 그렇게 말을 보탰다.

훌쩍이던 이세가 고개를 쳐들었다.

“법앙이 와…?”

“예, 올 겁니다. 올 거예요.”

시우는 다시 웃으며 그런 이세를 다독였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기보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이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수색대를 보내리라는 것, 어떻게든 구하러 오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치아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내가 그랬다는 것에 놀랐고, 다음 순간 냉정하게 그 감정을 털어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천사님.’

천사는 대답이 없었다.

‘천사님. 이제 충분히 봤습니다. 됐으니까 빨리 어느 쪽을 파야하는지를….’

“…음?”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었다.

친위대원 중 한 사람이었다. 다시금 우르르, 소리와 함께 벽과 땅이 울었다.

멀찍이서,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무언가가 진동하는 소리.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시우도 곧 그 소리를 깨닫고 귀를 기울이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이세였다.

“아빠마마… 물이….”

바닥에 물이 고여 들고 있었다.

본래 이곳은 암반수를 도시에 끌어들이기 위해 뚫던 굴이었다. 왕국민들은 부족한 치수(治水)의 기술을 시행착오로 때워나갔다.

그러기에 지식이 아닌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굴이 무너질 때 벽이….”

길어봤자 5분이면 사방에서 새어나온 물줄기가 고요한 암살자처럼 차오를 것이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세와 시우, 모든 친위대원들을 솜털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죽여 버릴 것이었다.

이 사실을, 시우와 친위대원들은 한순간에 깨달았다.

이세의 목소리, 바닥을 본 것, 그로부터 5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 운명이란 앞으로 5분밖에 남지 못한 삶이었다.

마지막 남은 5분의 삶에서, 시우와 친위대원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남겨진 5분의 삶에서, 시우는 우선 이세의 자그마한 몸을 껴안아 주었다.

“이세.”

아비가 아들의 이름을 속삭였다.

“나의 아들.”

속삭였다.

“비류아 님의 아들….”

많은 것을,

조금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왕국의 태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빠마마…?”

이세가 불렀다.

시우는 대답하는 대신 친위대원들을 향했다. 그들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물이 새는 곳을 막아라.”

그런다고 완전히 막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시우도, 친위대원들도 알았다. 하지만 막은 만큼 줄어들 수는 있었다.

“바닥에 고인 물을 마셔라.”

그런다고 완전히 마실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시우도, 친위대원들도 알았다. 하지만 마신 만큼 비울 수는 있었다.

“천장을 파라.”

잘못하면 천장 전체가 무너질 것이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상황조차 천운이라는 것을,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알았다. 말을 꺼내는 시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말했다.

“어떻게든 이세 폐하를….”

반론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물이 새는 곳을 찾아 흙으로 막았다. 바닥에 고여 드는 흙탕물을 마셨다. 맨손으로 천장을 파서 그 흙이 바닥에 고인 물을 빨아들이게 했다.

조금이라도 누수를 막고자.

조금이라도 침수를 막고자.

흙탕물을 너무 마신 남자가 꿀럭, 진흙 같은 색깔의 물을 토했다. 곧 입을 틀어막았다. 필사적으로 구토를 억누르는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있었다. 그렇게 토기를 억누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가 되었고, 잠시가 지나자 그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그는 불룩해진 배와 입을 틀어막은 채 죽었다.

5분 뒤에는 한 명이 똑같은 이유로 죽었다.

다시 5분 뒤에는 또 한 명이 죽었다.

그들은 발버둥쳤다.

계속해서 발버둥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아빠마마….”

이세가 그 광경을 보았다.

이 굴에 처음 들어왔던 그 때처럼 시우는 자신의 아들을 무등 태웠다. 천장을 거듭 파내느라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아들의 발목을 잡고서, 그렇게 파낸 천장 끝에 아들의 머리가 닿게끔 발돋움했다.

시우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괜찮습니다.”

물은 계속 차오르고 있었다.

“괜찮습….”

시우의 목소리가 물에 잠겼다. 입술이 물에 잠긴 것이었다.

“움직이지,”

시우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흙탕물의 수면이 찰랑일 때마다 수염에 감싸인 입술이 드러났다가 스러졌다. 그럴 때마다 물고기가 뻐끔거리는 거품처럼 목소리가 새었다.

“움직이지 마시고….”

마지막 순간, 그 입가에 떠오른 것은 선이 굵은 미소였다.

“나의 아들,”

그리고 마침내 수면이 시우의 얼굴을 덮었다.

“아빠마마…?”

대답이 없었다.

“아빠마마… 아빠마마.”

대답이 없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읏….”

이세가 머리를 감쌌다. 바로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실천하려는 것처럼, 이세는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있었다.

물은 그 이상 차오르지 않았다.

어두운 굴 안에서 한 소년이 아비의 무등을 탄 채 머리를 감싸고 있는 광경만이 남았다.

어째서인지 눈앞의 광경이 점점 희미해졌다. 꼭 누군가가 풍경화에 물을 쏟은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나는 눈을 떴다.

◈          ◈          ◈

“법왕님?”

목소리.

“법왕님, 괜찮으십니까? 법왕님.”

눈을 뜨자 제사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누리와 흑치사라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음.”

나는 눈가를 닦았다.

“일단,”

제사장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향을 가늠했다.

나는 간신히 말했다.

“저기.”

“네?”

“저쪽입니다. 저 쪽으로… 직선으로.”

숨이 막혔다. 말을 해서 막힌 숨을 밀어내면서 나는 하누리를 보았다.

“하누리 아가씨, 될까요? 저 쪽으로 쭉… 저렇게.”

하누리는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돼. 되는데… 그 방향은 파던 굴이 아니잖아? 맨 벽을 뚫는 식이 되는데,”

“그래도 저쪽으로… 얼마 안 떨어져있습니다. 최대한 조심해서… 되나요?”

하누리는 고개를 저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그녀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잠시간 침묵이 있고, 그녀가 말했다.

“해보자.”

좋다.

나는 흑치사라를 돌아보았다.

“수맥이….”

안 이어지는 말을 억지로 계속해서 이어 붙였다.

“저 너머에 물이 차있어요…. 잘못해서 더 차오르지 않게, 물을 좀 빼가면서, 어떻게 잘. 아가씨. 부탁할게요.”

겨우 말하고서, 나는 허리춤에서 도끼를 붙잡았다.

“하누리, 흑치사라. 어디를,”

내 온몸은 피로를 잊은 듯 절박했다. 등 뒤로 제사장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했다.

5분.

고작 삶의 여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조차, 시우와 친위대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일을 했다.

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도 괜찮았다. 설득도 추론도, 분노도 슬픔도 나중으로 미루어도 괜찮았다.

그것은 5분이 아니라 5년이어도, 5년이 아니라 500년이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지금 내가 해야하는 일.

저 안에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땅 속에서 익사한 아비의 무등을 탄 채 울고 있었다.

“…이 쪽으로.”

하누리가 말했다.

동시에 나는 도끼를 내질렀다.

“흐읍!!”

벽에 도끼가 자루까지 박혔다.

원래 한 번 파냈던 곳이 아닌 만큼 흙은 딱딱했다. 그러나 지진이 한 차례 흩어준 탓인지 평소보단 연했다. 알실라제 강철로 만들어진 도끼는 쉽게도 벽에 박혀들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팔을 휘둘러서 벽을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뭐해! 다들 도와!”

하누리가 소리쳤다. 그녀도 알실라제 강철 단검을 들고 내 옆에 붙어 벽을 파는데 일조했다. 알실라 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파낸 흙은 왕국민들이 모여들어 치우고 날랐다.

“그 쪽은 피하세요.”

흑치사라와 나투아 인들이 방향을 조정했다.

하누리가 숨을 헐떡였다.

“법왕, 이 너머에?”

“여기에.”

나도 숨을 헐떡였다.

“여기에, 있어요. 아직 살아 있어요.”

임무 창에 실패 표시가 아직, 아니, 빌어먹을.

임무 창 같은 건 치우고 좀,

“살아 있을 거예요.”

“그래.”

하누리가 말했다.

“살아있을 거야.”

그리고 더 말없이 작업이 이어졌다.

팔을 휘두르면서 내는 숨소리, 흙벽을 쪼개는 쇳소리가 한동안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끼가 단단한 무언가에 닿았다. 암벽이었다. 흑치사라는 손짓으로 사람을 한 차례 물린 다음 거기에 귀를 댔다. 그리고 말했다.

“이 너머… 물이 차있어요….”

“어디를,”

“여기.”

횃불을 들고 한 차례 암벽을 살펴본 하누리가 결을 스윽 손가락으로 훑었다.

나에겐 똑같이만 보이는 그 선을, 가장 먼 선조, 가리비수로부터 이어져온 월족의 도끼술로 찍어 쳤다.

쾅…!

한 번 더,

쾅…!

한 차례 더,

쾅…!

그러자마자, 물이 터졌다.

“으풉!”

가까이 서있던 이들이 움찔하여 물벼락을 맞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암벽을 내리찍었다. 안에서 터져 나오는 물의 압력이 그런 나를 도와주었다.

잠시가 지나자 그 곳에는 사람이 허리를 들이밀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횃불을,”

제사장이 횃불을 가져왔다. 구멍 안에 빛이 흘렀다.

곧, 무언가가 드러났다.

시우의 등이었다.

“….”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친위대원들이 바닥에 엎어져 죽어있는 가운데, 시우는 그저 꼿꼿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흠뻑 젖은 목덜미에는 조그마한 소년의 양 다리가 얹혀 있었다.

“태부 각하.”

대답이 없었다.

“시우 님.”

대답이 없었다.

하누리가 내 옆구리를 잡고서 뒤로 밀었다.

“비켜봐. 내가 들어갈게.”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그녀가 훌쩍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와 비슷한 체구를 가진 알실라인들 몇몇도 너머로 넘어갔다. 그들은 삽, 곡괭이, 단검, 도끼 등 모든 도구를 써서 입구를 넓혔다. 우리 모두가 들어설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태부 각하께서….”

왕국민들이 신음했다.

누구나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않은 현실이 그곳에 있었다.

왕국의 태부는 선 채 죽은 그대로, 자그마한 아이를 무등 태우고 있었다.

아아.

“어서… 뭔가, 어서….”

내가 말했다. 제사장이 나서 아이를, 왕국의 국본을, 시우의 아들을 아비로부터 내려놓았다.

“법왕님, 이세 폐하께서,”

“물을,”

누군가 물을 주었다.

나는 한 모금 물을 머금고, 입에서 입으로 이세에게 건네었다. 그 다음에는 물을 빨아들여 치우고, 다시 새로운 물을 이세의 입 안에 넘겨주었다.

몇 차례 그렇게 했을까,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기침 소리.

“우….”

이세가 기침했다.

물기와 흙먼지 가득한 목소리로 이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마마…?”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꾹, 이세의 몸을 안아주었다. 이세가 기침할 때마다 몸이 작게 떨렸다.

살아서 느낄 수 있는 떨림이었으며, 살아서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아빠마마….”

그런 내 품을 아비의 품으로 착각했는지, 이세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아비 잃은 소년이 그렇게 정신을 잃고 난 이후에도, 나는 한참이나 이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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