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79화 (79/261)

79. 하누리와 흑치사라

하누리의 선언에, 알실라 인들은 조심스레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중 가장 연장자처럼 보이는 인물이 나서 말했다.

“하누리 아가씨, 우리가 꼭 이 일을….”

“해야 돼.”

하누리는 잘라 말했다.

화로지킴이의 맏딸, 알실라의 특권 계층으로서 결사(決死) 임무에 자원했던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와 달리 시야가 넓었다. 그 넓은 시야에 보이는 것들을 그녀는 하나씩 입에 담았다.

“알잖아. 지금 이 지랄이 난 건 우리 고국 쪽에서 불뱀이 부화해서 그래. 그 말은 여기보다 우리 고국이 더 지랄 같을 거라는 뜻이겠지?”

하누리의 말을 듣고, 알실라 사절단 측에서 나섰던 연장자는 알실라인답게 굴기로 작정한 듯했다. 쌈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안에 왕국의 태부가 있다면, 그걸 구해내지 않는 것이 이 말 타는 자들에겐 손해일 것이고, 알실라 측에는 그만큼 이득으로 돌아올 것 아닙니까.”

“뭣이 어째?!”

왕국 장정 중 한 명이 폭발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조용히.”

“하지만 법왕님! 저 자식 지금 지껄이는 소리가,”

“조용히. 세 번은 말 안 할 거예요.”

왕국 장정이 욱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정이 북받쳐도, 그래서 화가 나도, 이 자리는 그냥 저를 믿고 저한테 모든 것을 맡겨주세요.”

그 말이 왕국의 장정을 설복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납득하도록은 만들었다. 주춤 물러서는 그를 일별하고, 나는 하누리와 알실라 연장자를 돌아보았다.

하누리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아~ 그래. 태부는 임무 목표 중 하나였고. 죽게 냅두면 뭐, 목표 달성이고. 그렇다 이거지?”

“그렇다 이겁니다.”

“아니 썅. 근데 말야 아저씨. 그건 우리 고국에 지랄나기 전 이야기라니깐? 지금 이 상황에 태부랑 여기 법왕이랑 싸그리 다 뒤졌다고 쳐보자고. 근데 그러면? 우리가 왕국 처먹을 수 있냐?”

알실라의 연장자는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하누리는 언제나와 같이 절반 녹아내린 얼굴을 당당하게 드러낸 그대로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우리 고국 지금 뭐하고 있을 것 같냐? 여기보다 백배는 더 될 피해 복구하느라 정신없겠지? 근데 뭐? 임무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데?”

“…그래서 법왕과 함께 금자탑에 올라가셨을 적에도 그냥 내려오셨던 겁니까.”

“응. 뭐 대충 이유의 3할쯤은?”

하누리가 새끼손톱에 묻어나온 귀지를 후, 불어내며 말했다.

알실라의 연장자는 완고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태부를 구조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유야 있지. 법왕!”

하누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애초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누리.”

“도와줄 테니까, 도와주라?”

“예.”

하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있었던 짧은 문답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구태여 그 문답을 풀어 해설했다.

“알실라와 향후 25년간 불가침 조약을 맺을 것을, 그리고 인원과 물자의 교류를 행할 것을 약속하겠어요.”

“들었지?”

하누리가 알실라 사절단의 연장자에게 말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자신이 모범적인 알실라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예.”

그것으로 알실라인들의 참가는 결정되었다.

그러자 남은 것은 나투아인들이었다. 평소 말 많기로 유명한 나투아인들은,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어졌다. 다만 묵묵히 흑치사라를 쳐다보았을 뿐. 하긴 생각해보면 이번 사절단의 나투아인들은 처음 왔을 무렵부터 과묵했다.

흑치사라가 말했다.

“똑같이 25년의 불가침 조약…. 그리고 인원과 물자의 교류를 바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나투아 인들의 참가도 결정되었다.

[최초의 성녀: 저들이 저렇게 선선한 것은 조금 의외네요….]

[첫 번째 은월: 그러게. 피해도 가장 적을 텐데.]

[개천의 시왕: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비류아가 설명했다.

[개천의 시왕: 나투아는 모략에 능하지. 그만큼 과감함이 부족하다. 알실라가 전력으로 기능하기 어렵게 된 지금, 왕국과 전쟁을 치르길 선택한다면 저들은 홀로 그것을 치러야만 한다. 흑치사라와 나투아의 상주가 선선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편지를 써 보낸 것 역시 그래서일 것이다.]

그들에겐 태부와 법왕의 생존 여부라는 변수보다 알실라의 불참이라는 변수가 더 무겁다. 그리고 후자가 확정된 지금 전자는 썩 커다란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바로 조금 전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 사태가 맞추어준 이 평형 관계.

여기서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선택이란 결국, 팔 수 있을 때 은혜를 파는 것 정도였다.

[개천의 시왕: 그 뒤로는 삼국 모두 무한한 눈치 보기에 들어서겠지.]

[첫 번째 은월: 아, 그건 나도 알겠다.]

[첫 번째 은월: 나투아는 알실라가 저 지랄 났을 때 털어먹고 싶을 테고.]

[최초의 성녀: 하지만 그러면 왕국이 대하를 건너 나투아 쪽에 도하해서 빈집털이를 하려 들겠죠.]

[개천의 시왕: 그걸 막으려면 알실라와 손잡고 왕국을 털어먹으려 했을 때처럼, 이번에는 왕국과 손을 잡고 알실라를 털어먹는 방법이 있지만.]

[첫 번째 은월: 그걸 하누리가 불가침 조약으로 막았다 이거지.]

[첫 번째 은월: 역시 쟤 마음에 든다, 나.]

[최초의 성녀: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됐으니까, 나투아도 왕국에게 불가침 조약을 요구하는 게 가장 이득이 되네요.]

[최초의 성녀: 정말이지 절묘한 균형이에요….]

‘뭐 국지적인 분쟁은 계속해서 벌어지겠지만 말이오.’

애초에 불가침 조약 자체가 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염려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법.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지금이 아니라 흑치사라와 나투아 상주가 대하 건너로 전서를 보냈을 때 이미 내적인 합의를 이룩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기에 임무란 두 번째에 있던 ‘삼국 협상’에 달성 표시가 붙었다는 것 정도였다.

“자….”

흑치사라가 방긋 웃으면서 팔 없는 소매를 팔락였다.

“그럼, 굴을 파지요….”

그리고 삼국의 국민들은 그렇게 했다.

◈          ◈          ◈

알실라 인들은 산야의 주인이다.

이들은 산에 구멍을 내고, 그 살을 파내는데 한 점의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땅지렁이라고 불린다.

나투아 인들은 물길의 주인이다.

이들은 강이 나아갈 길을 인도하며, 자신이 만들어 낸 물길이든 그렇지 않은 물길이든 그 위에 띄운 배를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들은 뱃놈들이라고 불린다.

왕국민들은 들판의 주인이다.

이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활을 쏘고 창을 내지른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그냥 무식한 개새끼들이라고 불린다.

땅지렁이들이 파야 할 곳과 들어가야 하는 힘의 가감을 일렀다. 뱃놈들이 혹시라도 터져 나올지 모를 지하수맥을 탐지해냈다. 무식한 개새끼들이 그 무식한 힘으로 굴을 파냈다.

그 환상적인 조화에 더해서, 이미 한 번 파냈던 굴을 다시 파내는 것인 만큼 이들의 작업 속도는 실로 경이적이었다.

“태부 각하!”

그런 속에서, 나는 틈틈이 고함을 질렀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그리고 물론 굴이 무너지지 않게끔 자그맣게 줄여가면서.

“태부 각하! 이세 폐하!”

동굴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이외에는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어느덧 바깥에는 해가 졌다. 추운 밤바람이 불어서 내 등골로 파고들었다.

차가웠다.

나는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태부 각하! 이세 폐하!”

칙, 누군가가 횃불을 켰다. 일렁이는 불길 아래 굴의 내부가 드러났다.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잔인했다. 사방이 흙으로 뒤덮인 속에서 조각난 바위가 젖은 흙 위에 뒹굴었다. 졸졸, 어디선가 흘러나온 물은 한 방울 한 방울이 질량을 가진 모래알처럼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흙더미들이 굴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무너진 것 같은데….”

하누리가 살짝 입술을 사리물었다. 횃불빛 아래, 역광에 가려 멀쩡한 왼쪽 얼굴만 드러난 그녀는 수심에 차 있었다.

아무리 파내어도 더 파내야할 흙이 있었다. 아무리 쪼개어도 더 쪼개야할 바위가 있었다. 그것들이 합심해서 굴을 틀어막고 있었다.

“태부 각하께서….”

삽질을 하던 왕국의 장정 중 누군가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아무도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전원이 똑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이런 곳에 누군가 살아 있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천사님.’

[간신 조련사: …임무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예.’

그렇다면 살아 있을 것이다.

“계속.”

내가 말했다.

“계속 팝시다.”

“하지만 법왕님….”

“이대로 발 돌릴 건가요?”

나는 왕국의 장정을 바라보았다.

“왕국의 큰 아버지이고, 왕국의 국본이세요. 시왕 폐하가 남긴 유산이고요. 먼저 최선을 다한 다음에 생각하도록 해요.”

장정은 입을 다물었다.

왕국은 세워진지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월족이라는 하나의 부족이었다. 그 부족은 여러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가 어느 씨족에 속해있을지, 세워진지 얼마 안 된 왕국에 대해 충심을 갖고 있을지 같은 것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예, 법왕님.”

작업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계속해서 흙을 파내고, 또 파내면서 우리는 산허리로 파고들었다.

“태부 각하!”

흙을 파냈다.

“이세 폐하!”

흙을 파냈다.

“대답해주세요!”

계속해서 흙을 파냈다.

“살아 계시다는 걸 알아요!”

무너진 굴 안에서, 그런 내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사방으로부터 되돌아왔다. 알아요… 알아요… 알아요… 마치 비웃는 것 같은 그 메아리 속에서도 나는 계속 고함을 질렀다.

“야, 적당히 해.”

“예, 법왕님… 목이 쉬셔서….”

하누리와 흑치사라가 각각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삼켰다. 숨과 함께 넘어간 침이 식도 안에 피 맛을 퍼뜨렸다.

“사람을 더 불러오면….”

왕국의 장정 중 하나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알실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더 못 들어와. 지금 이 인원이 한계야.”

“사람들을 불러오되, 같이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작업하시는 분들과 교대하시는 게 어때요? 지쳐보이세요.”

나투아인이 장정들에게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왕국 장정들은 지쳐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를 악문 채 조악한 삽과 곡괭이를 들어올렸다.

“아직 좀 더….”

“아니요.”

내가 말했다.

“교대하세요. 그래야 작업이 더 빨리…. 그게 차라리 태부 각하와 이세 폐하를 위하는 길이에요.”

“하지만 법왕님. 아무것도 안할 수는….”

“괜찮아요. 바깥에 하실 일이 많을 거예요.”

‘야리소연. 그렇지?’

[첫 번째 은월: 응. 도읍지에서는 아직 한창 구조 작업 중이야.]

“나가세요. 도우세요.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죽고 다친 사람이 곳곳에 있었다. 산 사람이 필요했고 멀쩡한 사람은 더더욱 필요했다.

“예, 법왕님….”

그렇게 두 차례 교대가 이어지며 계속하여 굴을 파내가던 무렵이었다.

“법왕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똘똘이 제사장과 신관들이 그 곳에 서있었다.

“제사장? 그리고 신관 여러분.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요?”

“신전 쪽은 대강 다 정리가 끝나서 말입니다. 제 바로 후임한테 인수인계하고 일부 인원 빼서 온 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사장과 신관들의 손에는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밤참거리를 싸 왔습니다. 아, 물론 마실 거리도 말입니다.”

제사장은 광주리에서 이것저것 찬거리를 꺼냈다. 빻은 곡식을 뭉쳐 구워낸 것, 500년 뒤 사람인 나로서는 빵이라고 불러주기 민망했지만 어쨌든 빵이라고 불러주어야 할 그런 것이었다. 먹기 좋게 대나무잎사귀에 감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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