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왕국민 (2)
“그럼 말씀하신 것처럼, 가리비수 부장과 야리소연 부장이 도착하는 대로 사와라 부를 제압할 채비를 하겠습니다. 알실라의 지원을 받을 만한 여건이 못 된다니, 결국 놈들만 제압하면 된다는 거니까요.”
아삼 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다른 부로 이상한 말들이 새지 않게끔.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입주자 여러분. 그 밖의 의견 있나요?’
[첫 번째 은월: 야. 나랑 니 이름을 딴 부가 있다는 거 나쁘지 않은데 좀 헷갈린다. 나중에 좀 뜯어고칠 수 없어?]
‘다음.’
[최초의 성녀: 민초들을 위로하는 건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네요. 예언자님. 저 제사장, 굉장히 일을 잘하고 있어요. 저승에 오면 같이 일하고 싶은 타입이네요.]
‘입주자가 어찌 결정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소만, 그리 된다면 그대 아래 넣어 주리다. 다음.’
[개천의 시왕: 시우와 이세를 구해야만 한다.]
그 말은 인간 비류아로서 꺼낸 것이 아니었다. 시왕 비류아는 곧바로 자신의 말에 대한 설명에 들어갔다.
[개천의 시왕: 사와라 부가 지금 곧장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전부터 외세와 내통해왔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시우가 없다면, 그리고 이세가 없다면 행동에 나서려는 부장들은 점점 더 많아질 거다. 그것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왕국은 망하겠지요. 불과 15년 만에.’
[개천의 시왕: …그렇다. 시우는 말 그대로 이 나라의 태부이고, 이세는 의미 그대로 이 나라의 국본이니까.]
그렇다면.
“아삼 부장님.”
나는 아삼 부장을 돌아보았다. 부하 전사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던 그의 외눈이 나를 향했다.
“예, 법왕님?”
“태부 님과 이세 폐하께서 현재 실종되셨다는 사실, 숨겨주세요. 건재하시다고, 금방 돌아오실 거라고 말해주세요.”
아삼 부장의 외눈이 커졌다. 곧 가늘게 변했다. 그가 허리춤에 찬 알실라제 강철검만큼이나 차갑고 날카롭게.
“설마하니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이상한 생각이라면, 태부 님과 이세 폐하께서 없어진 틈을 타 제가 왕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한다거나 말인가요?”
“예, 그런 생각 말입니다.”
“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그러고 싶어도 못한다.
이세는 지금 유일한 은월의 핏줄이다. 사수하지 못하면 임무가 실패한다. 그것은 내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며, 억겁의 시간 동안 저승에서 배회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물론 내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은 아니었다.
“민초들의 불안을, 그리고 다른 부장들의 동요를 피하고 싶을 뿐이에요.”
쌈박한 알실라 사람들에게 쌈박한 말이 먹히듯, 꼰대에겐 또 꼰대의 말이 먹히는 법이다.
좋은 꼰대는 팔짱을 끼었다. 나는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오래 숨겨달라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잠깐이면 충분해요.”
“그 잠깐이 언제까지인지 정해주십시오.”
“제가 시우 님과 이세 폐하를 구출해 올 때까지요.”
아삼 부장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거북이를 닮은 얼굴로 날 굽어보던 그는, 곧 외눈을 살짝 크게 떴다.
“법왕님께서 직접 가실 셈입니까?”
“예.”
‘은월의 피를 지켜라.’
이번 건국 15년 임무의 첫 번째에 올라있는 사항이었다.
‘그리고 임무의 철칙 중 한 가지.’
임무는 해결할 수 있는 시기에,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주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왕님께서 없으면 이들은….”
“제사장이 있어요. 신관들도. 맡길 거예요.”
아삼 부장은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타박을 준 제사장과 신관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왕국 식자층 1세대는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좋은 꼰대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는 광경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산허리 수로 쪽으로 향하실 겁니까?”
“그러고 싶지만요.”
나는 한숨을 지었다.
“그 전에 한 명.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요.”
◈ ◈ ◈
나투아와 내통하여 내란을 꾀했던 자, 바울 부장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감옥이란 탈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튼튼하게 지어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바울 부장은 무사했다. 지진이 있었을 때 한 차례 넘어진 것인지 무릎과 가슴에 멍이 들긴 했지만, 감옥이 지하에 지어진 만큼, 그 밖에는 다친 곳 하나 없었다.
나는 그런 바울 부장과 마주 앉았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바울 부장은 그런 내게 이를 갈았다.
“니가 보기엔 안녕한 것 같냐, 새끼야?”
나는 담담하게 그 반응을 받아들였다. 상식적으로 자길 감옥에 가둔 사람한테 ‘아이고, 안녕하고말고요. 그 쪽은 안녕하십니까?’ 같은 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외세와 내통하기는커녕 반란을 꾀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따라서 지금 내가 바울 부장에게 기대할 수 있는 안부 인사란 부모님 안부와 대가리 상태에 대한 안부뿐이었다. 어느 쪽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풀어드릴 수 있어요.”
“뭐?”
“그 뿐일까요. 오늘 저지른 죄도 불문에 붙여드릴 수 있고요.”
“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나는 그저 신전에 와봤더니 웬 소란이 들리기에….”
함께 왔던 흑치사라가 한 걸음 나섰다. 단지 그 뿐, 흑치사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바울 부장도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바울 부장에게 나는 말했다.
“이전에 저지른 죄들도 모조리 다 불문에 붙여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믿고?”
“그 말씀이 저를 어떻게 믿느냐는 물음이라면, 여신의 이름으로 약속한다는 말로 대신할게요. 그리고 만약 ‘나를 어떻게 믿고’라는 의미로 꺼내신 질문이라면….”
나는 천천히 일어서 감옥의 울타리를 붙잡았다. 몇 번이나 쪄내고 말린 끝에 옻칠까지 한 대나무는 질기고도 강했다.
“바울 부장.”
나는 말했다.
“올해로 태어나신지 48년이 되셨지요. 18년 전, 서른 살 되던 해에 비류아 님께서 이끌던 왕국군, 당시 월족 기병 부대에게 아버지를 잃는 통에 씨족을 통솔하는 자리에 오르셨고요.”
“…그래서 뭐? 그거야 모두 아는 일인데.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진 만큼, 날 비롯한 바울 부, 아니, 바울 씨족은 모두 다 월족에 대한….”
“네.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하지만 모두가 모르는 것, 특히 바울 씨족들이 모르는 사실도 있어요.”
나는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월족 기병 부대에게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줬던 것이 당신이라는 것 말이에요.”
바울 부장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뭐라고? 그게 무슨….”
개천 임무 당시, 비류아와 시우를 상대로 천사님의 과거시를 써서 알아낸 일들을 전했던 것과 똑같았다. 상대만 아는 사실을 담담하게 입에 담음으로써 상대를 뒤흔드는 것 말이다.
다만 이번에는 나 자신의 통찰력과 신력으로 알아낸 것처럼 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천사의 과거시조차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개천의 시왕: 그 증서는 지금도 내 묘 한켠에 안장되어 있을 거다.]
“시왕님께서 설마하니 그 모든 비밀을 홀로 품은 채 떠나셨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바울 부장은 이를 꾹 깨물었다.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세게.
“18년 전에 이미 내통했던 자. 그리하여 아비를 죽게 만든 자가 지금 또 외세와 내통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바울 부장님. 같은 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할 것 같나요?”
“증거도 없는 소리를….”
“없을 것 같나요?”
바울 부장은 답하지 못했다.
음.
‘역시 말싸움을 할 때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위치에서, 이런 개자식을 궁지로 모는 것이 가장 즐겁지.’
[첫 번째 은월: 잘 한다, 우리 남편!]
‘고마워. 근데 응원하긴 이르다 좀. 더 잘할 거거든.’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마 당신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을 거예요. 시왕 폐하는 떠나셨지만, 증서까지 남겼던 몸. 그 증서가 언젠가 공개되지 않을지,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을지 전전긍긍했겠지요.”
바울 부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나투아와 내통한 것. 급하게 행동에 나선 것도 그래서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쩌자는 거요?”
바울 부장은 여전히 반항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투는 반 공대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앞뒤가 안 맞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계시겠지요.”
“어떤 것이?”
“부장님은 내통과 배신을 통해 씨족을 장악했어요. 그리고 지금 또 내통과 배신을 통해 독립을 하려 했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내통했다는 증거가, 증인이 생긴다구요. 새로운 약점들이 계속 생기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도 어찌 하겠소?”
이제는 태도에서도 힘이 빠졌다.
바울 부장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마른세수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첫 단추를 그리 꿴 것을. 한 번 어긋난 단추니 계속 그렇게 꿸 수밖에는… 젠장. 나투아 뱃놈들은 이걸 ‘백상아리 등 위에 올라탄 형국’이라고 말하더군. 어찌 하겠소? 내가 백상아리를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거기 뒤에 선 아가씨 팔을 물어뜯은 괴물이란 건 알지. 등에서 떨어져 먹히지 않으려면 꾹 붙들고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지 않겠소.”
바울 부장이 털어놓는 소회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킬을 썼다.
[ 독심술을 사용합니다. (1/3) ]
[ 바울 부장의 생각을 읽습니다. ]
<염병할.> <어쩌다가 이렇게.> <처음부터.> <아버지.> <자유.>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폭로당하다.> <추해.> <내통.> <늙음.> <두려움.> <만약 내가….> <안 돼.> <용납할 수 없는 일.>
명제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내통을 하지 않았다면 좀 더 자유로웠을 텐데.>
<폭로당해서 끌려 내려올까 봐 두려워.>
<아버지.>
나는 이해했다.
18년 전, 야심만만하게 아비의 권좌를 이어받은 젊은이는 지금에 이르러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살아오며 두 번의 내통을 했으나, 그 내통의 이유는 판이하게 달랐다.
얻기 위해 저지른 내통보다 잃기 싫어 저지른 내통이 그의 가슴에 더 시리게 박혔을 것이다.
“바울 부장님.”
나는 고개를 기울여 그를 보았다. 마치 그의 심정을 모두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모든 것을 불문에 부쳐드릴 수 있어요.”
바울 부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신 살아있는 내내 댁의 꼭두각시가 되라고? 젠장, 일 없소.”
손을 내젓는 그 모습에 한 쪽 눈썹을 일그러뜨린 것은 내가 아닌 하누리였다.
“일이 성공했다면 나투아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거잖아? 그보다는 나은 거 아냐?”
바울 부장은 하누리에게 넌 또 왜 끼어드냐고 쏘아붙이진 않았다. 다만 한 차례 손사래를 치면서 흑치사라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 일이 성공했다면 나투아와는 대등한 거래 상대가 됐겠지. 설사 그 뱃놈들이 나와 주고받았던 것들을 폭로해도, 그 때는 그냥 그 거래 관계를 끝장내면 되는 거고. 뱃속 시커먼 뱃놈들이 지껄여대는 소리잖소? 그쯤이야 얼마든지 개소리라고 몰아붙일 수 있지. 하지만 법왕, 댁은….”
바울 부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법왕, 댁은. 중간에 끊어진 말은 그러기에 온전한 문장보다도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법왕, 댁은.
“그 제가,”
나는 말했다.
“다시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을 거예요.”
바울 부장이 멈칫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요.”
바울 부장은 입술을 열었다. 다물었다. 잠시 후 말했다.
“‘이 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오며 저지른 모든 일들. 저지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을 그 모든 일들이요.”
내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