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75화 (75/261)

75. 종을 울려라 (2)

모여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던 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사절단을 맞이하러 한창 신전을 쓸고 닦다가 횡액을 당한 하인들, 평소보다 조금 더 공들여 빤 옷이 더럽혀진 신관들. 심지어 조금 전 바울 부장에게 끌려왔다가 거꾸로 바울 부장을 투옥시킨 전사들까지,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몰렸다.

누군가가 “법왕님….”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 신음에, 나는 응답해야만 했다.

“사지가 멀쩡한 자는 일어서서 구조 작업을 벌여요!”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아시겠어요?! 이제부터 이곳이 우리의 거점이에요. 부상자는 전부 여기로 옮기도록 하세요!”

그래. 부상자를 한곳에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저기에 부상자가 흩어져 있으면 집중할 수가 없다. 정리하는 것. 수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조기에 조금만 더 정리와 수속에 애썼더라면, 그 때도, 야만족들이 왕국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아니, 젠장.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 생각할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그래, 지금.

“혼자서 구조하지 마세요! 3명이서 조를 짜서 움직이세요!”

조직의 편성. 그렇다. 이것도 중요하다. 여럿이서 움직이면 질서가 생긴다.

열댓 명 정도 되는 하인과 신관, 전사들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버, 법왕님. 하지만 사람이 너무 부족합니다. 다른 부에 전갈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들여야······.”

“조용히!”

나는 잔말을 무시하고 하인과 신관, 전사들을 차례차례 지목했다.

“하인 한 명! 신관 한 명! 전사 한 명! 이렇게 조를 짜도록 하세요. 도움이 더 필요하면 여기로 하인을 보내요. 들것 따위가 필요해도 하인을 보내고요. 어디에 몇 조를 보낼지는 제가 판단할게요. 빨리 움직이세요. 알겠어요?!”

“예, 예!”

“대답 더 크게!”

그제야 사람들이 악을 썼다.

“예!”

좋다.

침착하지 못하겠다면 악이라도 쓰는 편이 나았다. 공포에 질려서 꼼짝하지 못하느니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이 백만 배는 나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살해당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장소를 일일이 지정하여 구조대를 보냈다.

“1조와 2조는 나루터로! 대하에 휩쓸려간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예!”

“3조는 창고에서 삽과 밧줄을 가져오세요! 수레랑 들 것 주에 무사한 게 있다면 그것도! 4조는 휘장을 모조리 거두세요! 붕대로 쓸 거예요! 5조는 신전 정문을 열고요! 여기가 거점이라는 걸 백성들한테 알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6조, 7조, 8조는 3조가 오는 대로 바로 산허리 쪽으로! 태부 각하와 이세 폐하를 구조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명령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등을 돌렸다. 하누리와 흑치사라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그녀들은 불안감이 가신 얼굴이었다. 적대감도 없었다.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일종의 믿음, 재난을 마주한 순간 마침 옆에 있는 사람과 나누게 되는, 어떤 긴급한 신뢰가 있었다.

“여러분은 잠시 저와 가도록 해요.”

흑치사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로 말인가요…?”

하누리도 당혹해했다.

“맞아, 법왕. 댁이 지금 자리를 비워서는….”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죽으려 들고 나를 죽이려 하던 이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자연의 폭력 앞에 사람은 어느 나라의 누구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리라.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에요.”

나는 제사장을 돌아보았다.

“제사장, 이 자리는 잠시 맡기겠어요.”

제사장은 고개를 수그렸다.

“예, 법왕님.”

좋아.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흑치사라, 그리고 하누리를 데리고 달려갔다.

신전 바로 근처에 그것이 있었다. 뾰족하니 높았지만 삼각뿔 구조로 견고하게 지어져, 이 난리통에도 무너지지 않은 채 우뚝하니 서있는 그것이 있었다.

개천 임무당시, 내가 아직 처음으로 빙의하기 이전 이 몸의 주인이 돌을 나르며 쌓아올렸던 건축물.

“이게… 왕국의 상징이라는 그 건물이군요….”

“시왕의 금자탑….”

흑치사라와 하누리가 흘린 감탄사처럼, 대하 건너편에서도 보일 만큼 높다란 건물, 왕국이 여기에 도읍을 틀었다는 증거물이었다.

“올라가요, 함께.”

그 증거물을, 우리는 타고 올라갔다.

계단을 통해서 위로, 위로, 계속해서 위로 뛰어올라갔다. 흑치사라가 체력의 한계를 느껴 휘청거리면 나와 하누리가 붙잡아 부축했다.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지휘 본부가 이곳에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해요.”

오르면서 내가 말했다.

“무너진 건물 아래 갇혀 있을 백성들한테. 혼란에 빠져 헤매고 있을 민초들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며, 그대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만 해요.”

거기에 누군가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 희망의 본질이다.

계단은 점점 좁아졌다.

“그렇지만… 어떻게 알리나요…?”

“왕국의 법왕은 마법을 부릴 줄 안다던데, 마법으로?”

나는 쓰게 웃었다.

스킬을 두고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테고, 날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마법에 가깝기야 했다.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첫 번째 은월: 아, 씨발. 내가 내려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돌이라도 하나 날라주고 싶은데….]

[개천의 시왕: ….]

하지만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하는 것뿐이다.

나는 손에서 불을 뿜어내지 못하고, 바위를 손대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다.

단지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숨이 차올랐다.

“으….”

흑치사라가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는 나도 잡아주지 못했다. 애당초 나는, 이 법왕의 몸은 비리비리해서 육체를 움직이는 데에 걸맞지 않았다.

“아, 진짜.”

하지만 하누리, 얼굴 반쪽이 녹아내린 이 조그마한 소녀는 그런 우리 둘을 동시에 잡아끌 정도의 여력이 있었다.

“니들 체력 좀 키워라.”

“그 말씀… 오랜만에 듣네요….”

흑치사라가 조금 웃었다.

“저도 앞으로는 꽤 듣게 될 것 같고요….”

나도 따라 웃었다.

“등신들.”

하누리의 투덜거린 방점을 찍은 순간, 마침내 계단이 끝났다.

“마법은 못 써도.”

나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거든요.”

금자탑 옥상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하늘이 섞인 바람이었다.

“….”

내 팔목을 잡은 흑치사라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8층 높이 건물의 꼭대기였다. 우리 세 사람의 까마득히 아래에 저택들이, 길거리가, 그리고 허공이 놓여 있었다.

나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여러분.”

내가 말했고.

“응.”

하누리가 답했고.

“예….”

흑치사라가 답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종을 치는 나무기둥의 왼편으로 다가섰다. 정 반대편에서, 흑치사라가 나무기둥의 오른편으로 바짝 붙었다. 두 사람이 각각 왼편과 오른편에 붙자, 커다란 나무기둥은 부레를 잃은 물고기처럼 쉽게 움직였다.

그 기둥 위에, 하누리가 올라탔다. 균형을 잡고, 기둥에 자신의 체중만큼 무게를 실었다.

우리 셋이 눈을 마주쳤다.

‘하나, 둘.’

정확히 숨결을 맞추어서 나무기둥을 뒤로 젖혔고.

‘셋.’

힘껏, 앞으로 밀었다.

나무기둥은 우리 세 사람분의 무게를 실은 채 그대로 청동의 종에 부딪혔다.

종이 울렸다.

하늘이 울렸다.

다시, 종이 울렸다.

하늘이 크게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눈길로 숨을 맞추며, 계속하여 나무기둥을 밀었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백성이 들을 수 있도록. 무너진 건물에 파묻힌 아이가 들을 수 있도록.

저 멀리 산허리 한복판에, 입구가 무너져 어둠 속에 있을 시우와 이세가 들을 수 있도록.

종을 울렸다.

“….”

열두 번.

도읍지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어디에 있든, 어디를 보고 있든,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도록 정확히 열두 번의 종소리를 울렸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나무기둥을 멈춰 세우고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리소연.’

[첫 번째 은월: 응, 됐어.]

야리소연의 말대로였다.

백성들이, 신전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          ◈          ◈

우리들은 금자탑에서 내려왔다.

신전 앞은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누리가 감탄했다.

“개 쩌네.”

쩐다는 말이 본래는 알실라 쪽에서 유입된 사투리였던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흑치사라가 입가를 가렸다.

“정말이네요…. 다들 모여 들었어요…. 법왕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아니요, 대단할 건 없어요. 소리가 나면 그 쪽으로 오는 게 사람들의 심리….”

“아니요….”

흑치사라가 우후후, 웃었다.

“역시 법왕님이 대단하신 거예요….”

“어째서요?”

“그야, 음… 그 자리에서, 제가 법왕님을 안고 뛰어내렸을 수도 있는 일이고….”

흑치사라는 슬쩍 하누리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누리는 칫 소리를 내더니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고 보니 목덜미에 칼 꽂기 딱 좋은 기회였는데. 고걸 딱 놓쳐버렸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하지 않을 일은 이제 굳이 입에 담지 말지요.”

“어라, 하지 않을 일이라고 어떻게….”

물론 나는 ‘물리위기감지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으니까요’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려고 하셨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아까 전에 했겠죠. 지금 와서 그러기엔 좀 많이 늦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하도록 해요.”

흑치사라는 우후후, 한 차례 더 웃었다. 하누리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뒷짐을 졌다.

일단의 무리가 나에게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왕국은 현재 법왕인 내가 관할하는 신관들-식자 및 준 관료 계층과 태부인 시우가 관할하는 부장들-전사 및 호족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다가온 것은 우리 똘똘이 제사장, 그리고 신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아삼 부(部)의 부장과 그 전사들이었다.

“법왕 예하,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날 대신하여 현장을 맡았던 제사장이 고개를 수그렸다.

“종이 울렸을 때, 예하께서 울리셨음을 알았습니다. 혹시 그… 예하마저 무슨 큰일을 당하실까봐, 내심 걱정을 좀 했습니다.”

‘무슨 큰일’을 말하는 동안 흑치사라와 하누리를 한 번 쓱 둘러보는 걸 보면, 제사장도 내가 뒤통수에 칼빵을 맞을까봐 적잖이 걱정했었나보다.

“불길한 소리를 입에 담는구먼. 자중하게.”

아삼 부장이 나지막하게 질책했다.

“법왕님‘마저’라니. 배웠다는 사람이 단어는 똑바로 써야지. 아니면, 무엇인가? 태부 각하와 이세 폐하께 큰일이 벌어졌다고 제사장은 확신하는가? 대단한 충성심이구만, 그래.”

그 빈정거리는 말에 제사장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물론 제사장이란 위치는 자신들이 전사들과 그닥 관계가 좋은 것은 아니며, 또 이 재난 상황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들을 자극해선 안 된다는 사실쯤은 알아야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아니에요, 아삼 부장님. 저는 그저 법왕 예하를 보고 너무나 안심한 나머지….”

“우리 모두 안심하고 있네. 여신의 가르침을 받은 지 10년이 넘었으면 좀 진중할 줄 알아야지.”

아삼 부장은 지긋하게 나이가 든 대머리였다.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꼰대같은 소리만 늘어놓았던 만큼,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다 상처를 입었는지 오른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상하신 곳은 없습니까, 법왕 예하.”

“보다시피 괜찮아요.”

나는 덧붙였다.

“손님으로 오신 아가씨들도요.”

그 말에 아삼 부장은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가 뭐라 더 초를 치기 전에 앞질러 말했다.

“그보다 부장님이 걱정되는군요. 눈을 다쳤나요?”

“예에. 마구간에 말을 집어넣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마구간이 부서지면서 나무쪼가리가 튀더니 그만.”

아삼 부장이 코웃음을 흘렸다.

“재수도 옴팡지려니. 뭐 이런 일도 있는 법이지요. 전장이 아니라 도읍지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는 건 좀 화가 납니다만은.”

“…조심하세요.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남은 눈도 시력을 잃을지 몰라요.”

“하. 뭐 당분간은 장님이 될 일이 없을겝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수명.”

아삼 부장은 쉰 기침을 게워냈다.

“이 늙은 것의 눈깔이 지금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대책을 논의하시지요.”

“기본적인 지시는 전달한 참이에요. 종도 울렸구요.”

“그리 보입디다. 예하. 아주 잘하셨습니다.”

신전 앞은 이제 천천히 재해 대책본부로 기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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