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종을 울려라 (1)
하누리. 알실라 화로지킴이의 맏딸.
언젠가 그녀의 얼굴에 쏟아진 쇳물은, 살을 파먹길 그쳤을 때는 지울 수 없는 자국을 그 반쪽에 남겼다. 그녀가 불타기 전에 어떤 외모를 가졌고, 어떤 미소를 지었는가는 오직 멀쩡한 쪽의 얼굴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하누리 아가씨.”
녹아내린 그 오른쪽 얼굴을, 배에 타고 올 무렵부터 그녀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며 걸었다. 그러나 지금, 하누리는 어쩐지 모르게 양손을 올려 시선을 막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 뭐야….”
“나는 내가 아가씨를 사랑할 것이라고는 약속하지 못해요. 다만 그것은 흑치사라 아가씨의 왼팔만큼이나, 아가씨의 얼굴 때문은 아니에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셋은 모두가 세 나라의 특권층이고, 누리는 권리만큼이나 무거운 의무를 짊어지고 있지요. 그런 우리 앞에, 얼굴이 어쩌니, 팔이 어쩌니, 심지어 사랑이 어쩌니…. 너무 사치스러운 소리지요?”
“…그래서 뭐.”
“제가 아가씨들과 결혼하려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듯 양국을 역으로 엿 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아가씨들께 이중 첩자 역할을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더해서 아가씨들이, 그렇네요. 각자가 품고 있을 비밀들을 털어 놓아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요. 저는 제 나라를 사랑하고, 아가씨들이 그 나라를 조금이라도 살찌우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하누리가 이를 사리물었다.
“그거야 나도 잘 알고 있는,”
“하지만 그것은 전부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지의 이유예요.”
나는 나머지 한 손으로 하누리의 눈가를 덮었다.
“결혼하고 나서, 저는 아가씨들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갈 거예요. 아까 보셨다시피 저는 사람의 속내를 읽는 데에 제법 재주가 있거든요? 그런 제가, 아가씨들.”
“….”
“당신들에 대해 알아가겠어요.”
나는 흑치사라의, 그리고 하누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하루에 24시간. 한 시간에 60분. 1분에 60초씩.”
상어가 한쪽 팔을 뜯어 먹었지만, 그러기에 흑치사라에게는 남은 팔이 있었다.
쇳물이 한쪽 얼굴을 녹여버렸지만, 그러기에 하누리에게는 남은 얼굴이 있었다.
“말씀드렸듯이, ‘죽고 싶지 않다.’고 느낄 만한 인생을 약속하겠어요.”
나는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들었다.
“두 아가씨들. 저와 결혼해주세요.”
정적.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제사장조차도.
단지 전해져 오는 심장 박동이, 거의 터질 것처럼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음.’
혹시 내 심장 박동도 여기에 섞인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태학관 다닐 무렵 내가 받아보았던 고백 대사들을 이리저리 얽어서 만들어낸 대사이긴 했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 청혼 대사를 하는 것은 나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첫 번째 은월: 나한테 했던 건 왜 빼먹냐?]
‘그걸 꼭 첫 번째로 쳐야겠냐?’
[첫 번째 은월: 안 치려면 치지 마. 돌아오는 대로 니 대가리 친다?]
‘아, 진짜.’
그래, 어쨌든 이번이 두 번째 청혼이었다. 그리고 청혼이란 건 횟수가 쌓인다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청혼 당시가 워낙에 개판이었던 만큼, 두 번째 청혼을 하는 지금은 그럴싸한 여유를 유지하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두 아가씨의 대답을 기다리던 때였다.
[첫 번째 은월: 야.]
아, 진짜.
‘또 왜 그래?’
[첫 번째 은월: 아니, 그게 말이야.]
‘진짜 이 분위기에 자꾸 초칠 거면….’
“저… 법왕님?”
그 때 현실에서도 엉뚱한 곳에서 소리가 났다. 나도, 흑치사라도, 하누리가 낸 소리도 아니었다.
제사장이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든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 셋 사이에 팽팽하게 조여 있었던 긴장감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제사장, 대체 무슨 일로….”
이 똘똘이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에 초를 칠 리가 없는데.
그런 내 생각처럼, 제사장은 그 ‘어지간한 일’을 꺼내놓았다.
“뭔가 좀 흔들리는 거 느껴지지 않으세요…?”
거기에 호응하듯, 맨 처음에는 탁자 위의 찻잔이.
그 다음에는 호박엿들이 담긴 그릇이.
다시 그 다음에는 탁자 자체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난데없는 이변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혹했다. 특히 나는,
아.
‘야리소연!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
[첫 번째 은월: 아니… 그게….]
[첫 번째 은월: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뭐든 좋으니까 해봐!’
[첫 번째 은월: 응. 내가 바깥을, 그러니까 가장 외곽을 지켜보고 있었잖아? 그런데,]
‘응. 그런데? 뭘 본 건대?’
[첫 번째 은월: 그게… 이런 걸 처음 봐서… 멀찍이 연기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연기?’
[첫 번째 은월: 응. 재 같은 게… 그리고 새까만 불꽃이… 아아, 그냥 창문 열고 봐봐!]
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채 창문을 향해 걷기도 전에, 달그락거림은 더욱 심해지더니 나무로 짜 맞춘 창문이 우지끈 무너졌다.
“꺄악?!”
내가 지금 있는 신전의 집무실은 그 위치가 다소 높았다. 시야를 가릴 것이 없어서 창문 너머에는 대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하 건너편에 희뿌연 산줄기가 하나 있었다.
하얗게 보일 만큼 머나먼 곳에 위치한 산맥이었다. 날씨가 쾌청한 날이 아니고서야 물안개에 감싸여 보이지도 않을 곳. 그 곳이 지금은 다른 의미로 선명하게 눈에 띄어 있었다. 산꼭대기에 붉고, 또 뿌연,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은월: 저게 대체 뭔….]
[최초의 성녀: 그, 그러게요. 대체 뭐죠?]
[개천의 시왕: 나도 저런 건 처음 보는군.]
저승의 입주자들 모두가 당혹하는 가운데, 천사님과 내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간신 조련사: 화산입니다!]
‘화산이잖아!’
멀찍이 놓인 화산이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을 따라 대하가 꾸물거렸다.
[첫 번째 은월: 어, 어어.]
대하를 감시하던 야리소연이 당혹하여 내는 소리만 들어도 짐작이 갔다.
제사장이 중얼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법왕님. 하지만 이것, 확실히 지금 바닥이 흔들리고 있는… 맞지 않습니까? 지금, 서있기가,”
“네.”
내가 말했다.
“똑바로 느꼈어요. 지금 이건….”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집무실이 기우뚱 기울었다.
◈ ◈ ◈
“꺄아악!”
비명이 터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흑치사라를 감쌌다. 하누리도. 그러자마자, 떨어져 나온 나무창문들이 내 등을 후려쳤다.
“버, 법왕님! 괜찮으십니까!”
“머리!”
내가 소리쳤다.
“머리 숙이세요!”
제사장이 황망히 고개를 수그렸다.
“네, 네…!”
세상이 요동쳤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집무실이 온갖 집기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무 판자, 조각, 장식품, 청동 거울 등. 그 모든 것들이 흉기가 되어서 우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욱!”
눈앞이 번쩍했다. 다음에는 다시 등이, 그다음에는 어깨가, 다음에는 또 머리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끄… 끝났나요…?”
떨리는 목소리가 품에서 울렸다.
“…그런 것 같네요.”
나는 겨우 대답했다.
제사장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저기, 방금, 이거 무슨….”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먼 곳에서 화산이 폭발한 것 같다는 사실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때였다.
“불의 뱀이….”
하누리가, 조그만 체구에 걸맞게 다람쥐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며 웅얼거린 소리였다.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시기가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설마 지금….”
불의 뱀.
알실라.
산야와 광물의 지배자들.
“하누리 아가씨.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까?”
나는 하누리의 양 어깨를 잡은 채 물었다. 하누리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입술을 사리물었지만, 곧 선선히 입을 열었다.
“응. 불의 뱀이 자리 잡은 둥지 중 하나가 요 몇 년 간 계속 땅울음을 낸다고… 불의 뱀이 부화할 징조라고, 아버지를 비롯한 화로지킴이들이 말했었어. 그 때문에 나투아와의 연합을 서둘러야 한다고도….”
‘그러고 보면 하누리에게 독심술을 썼을 때 <알실라는 지금 위태로운 상황이다>라는 생각을 읽었었지.’
그것이 이해되면서도,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하누리는 방금 대단히 자연스럽게 알실라의 비밀 중 하나를 토로한 것이었다.
심지어 공범자여야 할 흑치사라는 딱히 말리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위에 나투아의 비밀을 보탰다.
“백 년에서 2백 년 주기로 알실라 쪽에서 산이 말썽을 피운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우리들 나투아로 치면 몇 년 주기로 큰 홍수를 맞아 강들이 합쳐지는 것처럼요….”
음.
“고마워요.”
나는 그리 대답했다.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말에 하누리도, 흑치사라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 구석구석이 비명을 질러댔다.
둘러보니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제사장이 헐떡였다.
“법왕님, 괜찮으신가요…?”
“나는 괜찮아요. 제사장. 당신이야말로… 그리고 대체.”
집무실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갖 집기들이 한 쪽으로 쏠렸으며, 나무뿐 아니라 돌로 만들어진 창틀까지 빠개지는 바람에 찬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노을도 같이 들어왔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을씨년스러웠다.
“법왕님.”
휘청, 자리에서 일어선 흑치사라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피가….”
음.
“괜찮아요. 머리에는 이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제 걱정을 할 때가….”
그렇다.
내 걱정을 할 때가.
‘시왕님!’
[개천의 시왕: ….]
‘시우! 이세!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산허리에 낸 굴에 들어가 있다면 방금 지진에 혹시라도….’
[개천의 시왕: 입구가 무너졌다.]
내 심장도 같이 무너진 것 같았다.
비류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개천의 시왕: 입구가 무너지고, 그 안에 갇힌… 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최초의 성녀: 그, 그럼 안 되잖아요! 빨리 입구를 파낼 사람들을 보내야만….]
[첫 번째 은월: 야, 지금 왕국 도읍지 전체가…. 수로 공사 도중이었잖아. 그래서 특히 더, 방금 무너진 건물들이 지금….]
빌어먹을.
‘알았으니 조용히.’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추가 사항 있으면 그 때들 전해줘요. 다들 잘 살펴보고, 일단, 음,’
임무를 수행중인 것은 나.
현실에 있는 것 역시 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또한 나.
그러므로.
“제사장.”
“예, 예에. 법왕님, 어떻게 해야,”
“신관들을… 아니, 다들 모으세요. 일단 바깥으로… 밖에 나가서 동선을 짜봅시다.”
나는 앞장서 움직였다.
◈ ◈ ◈
신전에서 나온 우리를 맞이한 것은 말 그대로 참상이었다.
“여기, 여기 누가 좀! 여기 사람이 깔려서······.”
“거주구가 더 급해! 전사님들! 전사님들 여기 좀!”
“거주구는 무슨! 태부 각하께서 산허리 수로를 살펴보러 가셨잖아! 빨리 그 쪽으로 사람들을….”
“법왕님은 지금 무사하신 거야?!”
피와 비명.
돌로 지은 건물들은 그 기와가 쏟아져 내렸다. 나무로 지은 건물들은 기둥들이 무너졌다. 바닥이 뒤집히고 사람이 쓰러졌다.
지진이 닥쳐온 것은 채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사람들은 붕 떠올라서 내팽개쳐졌다. 어떤 사람은 벽에 부닥쳐서 팔이 부러졌으며, 또 어떤 사람은 운 나쁘게 건물에 깔리고 말았다. 즉사였다.
“….”
깨부숴진 두개골로부터 흘러나온 누군가의 피는 붉었다. 그리고 새까맸다.
신전 주위로 펼쳐진 거리, 왕국의 도읍지에는 그보다 곱절이나 되는 빨강과 검정이 흘렀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었다.
왕국의 백성들이 죽고 있었다.
이와 꼭 닮은 풍경을, 나는 내가 아직 내 몸으로 살아있을 시절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이빨을 꽉 물었다.
“모두 들으세요!”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