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법왕 (3)
“흐으음… 그렇네요….”
흑치사라는 자신의 치아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뗐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마치 겉면을 매끈하게 깎아낸 산호를 연상케 했다.
“그 경우… 저는 나투아를, 하누리는 알실라를 배신하게 되겠네요…?”
나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예.”
“당연히 친정에도 돌아갈 수 없을 테고… 흐음….”
“본래 타국에 혼인하러 왔다는 건 출가외인이 되겠다는 뜻 아닌가요?”
“그렇기도 하네요…. 흐음….”
흑치사라는 시선을 깔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오래된 나뭇결을 눈으로 좇으면서, 어쩌면 흑치사라는 그 후의 삶을 마음속에서 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바닥의 문양이 아니라 마음의 무늬였다.
하누리가 그런 흑치사라를 흘겨보았다
“야. 저 말을 들을 건 아니지?”
“못 들을 건 뭔가요…?”
“아니, 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란 게….”
“하누리…. 이전부터 말해온 것이지만요…?”
흑치사라는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앙상한 목을 그으며 헤죽 웃었다.
“자결이란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법이랍니다…?”
“….”
“그렇게, ‘최종 선택지’는 언제든지 고를 수 있으니… 그 외의 선택지란 많을수록 좋으며… 선택해야 할 시간도 길수록 좋지요….”
음.
확실히 나투아 고위층의 아가씨답다.
지금까지 임무에서 만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물은 주온이었고, 그 다음에는 비류아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목록을 갱신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말의 전장.’
다음 임무에서도, 또 다음 임무에서도, 임무가 쌓여갈 수록 그런 갱신은 계속될 테지.
‘정치와 외교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그 사실이 기쁘기도 했고 염려스럽기도 했다.
“흑치사라.”
그 두 가지 감정 모두를 밀어놓고 말했다.
“그리고 하누리. 저와 결혼하실 경우 얻을 수 있는 것, 잃을 수 있는 것은 둘이 이미 다 말해준 대로예요.”
흑치사라가 얻을 수 있을 것을 입에 담았다.
“생존….”
하누리는 잃을 수 있는 것을 입에 담았다.
“조국의 신뢰.”
제사장은 그런 둘을 한 차례씩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미간을 찡그렸다.
“반면에 법왕님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의 목소리에 열이 올랐다.
“이 둘이 이미 각자의 나라에서 죽은 사람 취급 받고 있으리라고 법왕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투아와 알실라가 서로 굳게 연맹하고 있음 역시 드러났고요. 그렇다면 이 중 누구와 결혼을 하든, 원래 얻으려 했던 것은 단 하나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문호 개방 진전.
지참금.
정치적 영향력.
두 나라에 대한 유화적 손길. 어느 하나 성립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제사장은 강하게 말하며,
“그런 반면, 결혼으로 잃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말씀 나눈 바와 같습니다. 군권 세력 사이에 다툼의 여지가 생길 겁니다. 오늘 바울 부장을 투옥했다고 해도, 아니, 그것조차도 결국은 문제가 되겠지요.”
제사장은 이마를 짚었다. 긴 한숨.
“시우 님께서 군권을 다잡으려 노력하시는 동안, 법왕님께서 맞이하신 이 아리따운 두 처자 분들은- 반어법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법왕님의 목을 노릴 수 있겠지요. 아니면 방금 입에 담은 망할 ‘최종 선택지’를 선택하든가요. 전자는 두말할 것 없이 법왕님의 신변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후자 역시 결혼식 이후에 벌어지면, 젠장. 법왕님!”
“제사장. 개소리 빼고 담백하게 줄여서 말해주자면요?”
“아, 예! 그냥 지금 죄다 모가지를 따버리는 게 싸게 먹힌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흑치사라가 우후후 웃었다.
“후아… 꽤나 열정적인 아가씨네요…?”
“그러게. 쟤 너 좋아했나보다?”
하누리도 한 마디 보탰다.
제사장은 다시금 울컥하려다가 그마저 피곤해졌는지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말씀해주시면 듣겠습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 둘이 모략에 쓰였다는 부분이예요.”
“…모략은 달빛이 비치는 곳에 드러낼 수 없기에 모략이라는 겁니까.”
“예. 그러니 제가 이 처자들과 결혼한다고 하면, 나투아와 알실라 측에서 뭘 어쩌겠나요? 적어도 겉으로는 축복의 인사말을 던져야하지 않겠어요? 속으로 어찌 생각하든지요.”
“그 속으로 어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 축복의 인사말이랑, 좀 더 잘 해낸다면 지참금 조금쯤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좀 더 얻어낼 수도 있지요.”
나는 하누리를 향해 손도끼 자루를 기울였다. 어디까지나 슬쩍.
“하누리. 저와 결혼하면 당신은 조국의 신뢰를 잃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네요…. ‘나는 언제든 법왕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덤으로 법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식으로 썰을 풀면 좋지 않겠나요?”
“첩자가 된 것처럼 굴라고?”
“예.”
하누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좌우로 단층이 난 얼굴에 일그러짐이 더해졌다.
“첩자가 된 것처럼 군다는 건 실제로는 첩자가 아니라는 뜻이지.”
“네. 그러니 실제로는 저를 위한 이중첩자가 되시라는 것이지요.”
나는 흑치사라를 돌아보았다.
“흑치사라. 당신에게도 같은 제안을 할 거예요. 그래서 그 제안을 당신들이 받아들인다면-.”
흑치사라는 우후후, 입가를 소매로 가린 채 웃었다.
“-저희는 생존을. 차후를 도모할 기회를. 그리고 당신들은 이중 첩자를 얻게 된다는 것이네요….”
“그만하면 충분히 타당한 거래가 아닐까요?”
“저희를 어떻게 믿고…?”
흑치사라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법왕…. 당신의 선량한 부하가 걱정했던 것처럼… 오늘밤이라도 저와 하누리는 잠에 든 당신의 목을 노릴 수 있어요…? 음식에 독을 탈 수 있고… 거짓 정보를 전해줄 수도 있고… 응… 할 수 있는 것이 많네요… 참으로 많아요….”
“응. 나도. 솔직히 내 머리가 흑치사라 쟤보다는 딸리는 편인데, 니네 왕국에 해를 끼치고 우리나라에 득을 가져다 줄 방법이 수천 수만 개는 떠오르는걸? 감당할 수 있겠어?”
“그것은 제가 감당해야할 부분이겠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잊지 마세요.”
저승에서 본 야리소연의 자세를 본떴다. 표범처럼 허리를 수그려, 양 손으로 탁자를 짚은 것이다.
“여러분이 제법 공들여 짜온 계략을 저는 그 자리에서 박살냈어요. 그 뿐일까요? 흑치사라. 당신의 조국이 공들여 심어놨을 내통자까지 잡아냈지요.”
“….”
“이미 해낸 일을 제가 왜 두 번은 하지 못할까요? 세 번은 또 왜 못하겠나요? 하누리. 흑치사라. 제가 구태여 말하지 않은 것을 듣고,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은 것을 살펴주세요. 그리고 생각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흘러내린 앞머리로 웃음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말했다.
“두 분이야말로 감당할 자신이 있나요?”
하누리는 말이 없어졌다. 흑치사라는 의자에 기대어 옷자락이 더욱 늘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다시금 흑치사라가 깼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 선택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 사실은 유효하지요….”
흑치사라는 고개를 들었다. 하얀 산호를 닮은 긴 손가락이 그보다 길쭉한 턱을 괴었다.
“생각해보세요, 법왕님…. 법왕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재’를 가할 수단이 없어요….”
그 말에는 하누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죽으면 그만이고, 죽기로 각오하고 왔으니까.”
“그런 상황이니, 저희가 법왕님의 뒤통수를 친다고 해도… 그걸 또 막아내신다고 해도,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니면 뭐 이러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거나, ‘그 고통을 지금부터 하나씩 맛보여주겠다.’거나?”
“조금은 유효하지만… 어디까지나 조금만 유효한걸요….”
제사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거꾸로 웃어보였다.
“천만에요. 고문은 여러모로 유용한 선택지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유용한 선택지가 있는걸요?”
둘 모두, 제사장까지 포함해서 셋 다 그 선택지란 게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나야 물론 기꺼이 대답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분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느끼는 것, 죽기로 각오했다는 것. 모두 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나는 탁자를 짚은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 흑치사라와 하누리 앞에 섰다.
“저는 그 생각을 바꿔줄 생각이에요.”
흑치사라.
어릴 적에 한 팔을 잃어, 늘 한 쪽 소매를 늘어뜨리고 다녀야만 했던 사람.
하누리.
쇳물을 뒤집어써, 얼굴 한쪽이 영영 망가져버린 사람.
이 둘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그리하여 어떻게 이 자살 임무에 ‘자원’하게 되었을지는 상식만 갖고도 추론 가능하며, 무엇보다 하누리를 상대로 독심술을 썼을 때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애물단지.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벗 흑치사라를 그렇게 평가했다.
“분명히, 지금까지 두 아가씨는 재미없는 삶을 살았겠지요.”
나는 손을 뻗어 두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저는 좀 더 재미있는 삶을 보장해드릴 거예요.”
한 여인의 어깨는 높았고, 한 여인의 어깨는 낮았지만, 두 어깨 모두 내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 좋다고 느끼도록. 식사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도록.”
나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저는 두 아가씨가,”
그리하여 나는 축복을 내리듯 말했다.
“‘아아, 살아있어 행복하다.’라고-”
어쩌면 저주를 내리는 것처럼.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다.’라고 느끼게 해줄 거예요.”
그리고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신기하네요.”
흑치사라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릴 적에 그녀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웠다. 느물거리는 기색도, 흐물거리는 기척도, 특유의 금세 흩어지고 마는 미소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여자의 목소리를 나는 이때 처음으로 들은 것이다.
“응. 정말로 신기한 말을 들었어요.”
흑치사라가 나를 보았다.
“법왕님.”
“네, 흑치사라 아가씨.”
“무모한 도전에 불과할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저는 어디까지나 나투아를 이루는 하나의 부품으로서,”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빈 소매를 잡았다.
제사장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제사장이 낸 신음보다, 나는 흑치사라의 빈 소매로부터 전해지는 박동을 조금 더 크게 느꼈다.
나는 천천히 그 빈 소매를 추어올렸다.
“아.”
방심했다는 목소리. 나는 멈추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 계속 걷어 올려서, 기어코 맨 살결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어릴 적, 상어의 이빨이 물어뜯은 그 왼팔은 어깨 죽지와 그보다 약간 아래 팔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세월은 그녀가 잃어버린 팔을 자라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아물게는 해주었다.
오히려 그래서, 그 흉터는 기형적으로 남았다. 비위가 약하다면 구토감을 느꼈을 것이고, 자존심이 강하다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간신 조련사: 당신은 양쪽 전부 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예.’
나는 허리를 수그렸다.
‘다만 전 양쪽 다 숙이는 방법을 알고 있지요.’
임무 달성을 위해 야리소연에게 청혼했던 그 때처럼.
월족을 피난시키기 위해 고돔 족장에게 두 손을 비볐던 그 때처럼.
비류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님을 부르짖었던 그 때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흑치사라의 흉터에 나는 입술을 맞추었다.
“…읏.”
흑치사라가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마치 해안의 절벽처럼 단단히도 굳어진 왼팔의 잔해가 내 입술을 할퀴었지만, 나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너.”
하누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