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72화 (72/261)

72. 법왕 (2)

나와 시우, 어느 한쪽이 늙어죽거나 병사하길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래 걸린다.

“거기다가 저는 왕국 도읍지에 틀어박혀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죽일 만한 기회가 나오지 않지요. 한편 시우 님께서는 부를 순회하기 위해서라도 저보다는 활동 범위가 넓으시지만, 매수할 수 없는 친위대가 붙어 있는데다가 본인의 무력이 상당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함정에 빠지더라도 헤쳐 나올 분이세요.”

어느 쪽도 정석으로 죽이기는 어렵다.

“그러하니 샛길을 동원할 수밖에 없을 터.”

양국은 둘 중의 누군가를 암살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암살할 상대를 시우 님이 아닌 저로 정한 거예요. 그 수단과 방법은, 제사장이라면 대충 짐작이 가지요?”

“예….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어, 왜 바울 부장이…? 법왕님께서는 그가 내통자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저를 암살한다는 건, 양국이 저희 왕국을 상대함에 있어 단기 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가겠다는 걸 선택했음을 뜻해요.”

“장기전….”

“예. 저는 정치와 행정을 맡고 있으니까요. 제가 죽으면 그 쪽에 소요가 발생하겠지요? 왕국은 그렇게 혼란에 빠질 테지만, 군권이 곧장 흔들리지는 않을 거예요.”

따라서 암살 시도와 때를 같이하여 나투아와 알실라가 전군을 몰아쳐 들어오진 않은 것이고, 대하 저편에도 대선단이 나타나진 않았던 것이다.

“제가 시체가 된다고 해도 시우 님께서 군권을 쥐고 계실 테니까요. 곧바로 군사 행동에 나서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법왕을 잃은 왕국이 조금씩 허물어져 갈 것은 명백하다. 장맛비 끝 철의 토성처럼, 5년쯤 지나면 흐물흐물하니 짓밟기 좋은 상태가 되어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전에는 장기전의 전략이 따로 있기 마련이에요. 그렇네요. 왕국 내부에 내통자를 만들어둔다거나 말이에요.”

나는 바울 부가 최근 위험했던 탓에 시우가 그곳을 다지고 돌아왔다는 제사장의 보고를 상기했다.

“내통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굴릴 수 있겠죠. 내부에 소란을 일으킨다거나.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거나. 또는….”

“아예 지금처럼 들이닥치게 만들어서, 외교적 모략을 돕는데 쓸 수도 있겠군요.”

제사장이 중얼거린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흑치사라는 독살당하고. 저는 손님에게 독을 먹였다는 누명을 쓰고 참살당하고. 하누리는 절 죽인 뒤 자결하고. 그 셋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울 부장과 그가 끌고 온 병사들이 그대로 해냈겠지요.”

“그 다음에는 하누리와 흑치사라가 준비했던 썰을 목격자로서 증언하면서, 법왕님을 잃어 혼란에 빠진 왕국에서 바울 부 홀로 독립 지분을 쌓아나간다는 것입니까….”

제사장이 이를 으득 갈았다.

“예, 그럴 셈이었겠지요.”

나는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한 마디 덧붙였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말이에요.”

우후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는 테두리가 없었다. 그래서 마치 맨땅에 물을 엎지른 것처럼 두서없이 흩어졌다.

흑치사라였다. 그녀를 짓누르고 있던 제사장은 끈적한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쭈뼛 굳어졌다.

흑치사라, 나투아 상주의 맏딸은 웃음이 묻은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네요….”

하누리, 알실라 화로지킴이의 맏딸 역시 털퍼덕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햐아, 그러게 말야. 나투아 뱃놈들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어머어머…. 저희 탓을 하시는 건가요, 하누리…?”

“쳇, 그럼 누굴 탓해? 니들 정보로 시작한 일인데, 시작부터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잖아. 쟤가 대가리만 좋은 게 아니라 저렇게 세다는 것부터….”

하누리는 짧게 깎은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흑치사라는 쿡쿡, 제압당한 그대로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으흠… 확실히 그건 예상 밖의 일이지요…. 하지만 그걸 포함해서… 결국 정보는 맞지 않나요…? 용 살해자가 죽었다고 한들, 달의 백성들은 강하다…. 법왕, 태부, 둘 중 하나가 없이는 삼킬 수 없나니…. 그런 이야기가 떠도는 가운데, 법왕은 실제로 그만한 괴물이었다….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 확인이야 잘 했지. 근데 그걸 누구한테 어떻게 전할 건데?”

“음…? 그야, 이대로 있으면 알아서 전해지지 않을까요…?”

하누리는 일순 흑치사라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 듯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오래는 아니었다. 그녀는 곧 흑치사라의 말을 이해했다.

“아, 과연. 확실히 이건 뭐 따로 전갈을 띄우거나 할 필요도 없겠다.”

하누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흑치사라가 걸친 옷자락은 길고도 검었고, 머리카락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눈동자만은 붉어서, 그녀의 긴 옆얼굴은 시체의 머리맡에 내려앉은 까마귀를 연상케 했다.

“예.”

교수형 당한 죄수처럼 불길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흑치사라는 단아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저희 둘은 죽을 테고… 바울 씨는 투옥… 그것만으로도, 법왕 암살 계획의 결과를… 완전하게 실패했다는 걸 모두 다 금세 알게 될 테니까요….”

“당신들….”

제사장이 치를 떨었다.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식자층이라고 해도 아직은 1세대.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뒤틀린 모략술도, 그 실패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어긋난 정신력도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첫 번째 은월: 응… 솔직히 좀 많이 미친년들 같다.]

[최초의 성녀: ….]

[개천의 시왕: ….]

[첫 번째 은월: 응? 니들 왜 그래?]

[최초의 성녀: …아니요. 예언자 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았을 때의 제가 떠올라서요.]

[개천의 시왕: 나는 어머니를 조금 떠올렸다.]

[첫 번째 은월: 후웅.]

[첫 번째 은월: 근데 뭐 어때? 누구나 머리에 꽃 꽂을 수야 있지 뭐.]

[첫 번째 은월: 단지 쟤넨 뭐랄까. 항상 꽃 꽂고 다닌다는 거잖아?]

[첫 번째 은월: 그건 좀 신기하다.]

‘신기할 것 없어.’

나는 속으로 답했다.

‘국가의 부품이 된다는 건 그런 뜻이니까.’

당장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괴물 취급하는 제사장 역시, 수십 년쯤 더 짬밥이 쌓이면 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식자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는 자가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사욕을 추구하는 수밖에는 없다.

초탈해버린 자는 괴물 또는 인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국가란 것이 그렇다.

[간신 조련사: …그거,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관료가 인간으로 남으려면 간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요?]

‘정확히 그런 의미인데, 농담으로 던진 말은 또 아닙니다.’

[간신 조련사: 농담이 아니면 뭡니까?]

‘개천 임무 들어갔을 무렵의 시왕님을 떠올려보세요.’

[첫 번째 은월: 아! 확실히. 너 그 때 좀 저런 느낌이었어.]

[개천의 시왕: …그런가.]

[개천의 시왕: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나 자신을 떠올려야 했던가.]

[최초의 성녀: 비류아….]

[개천의 시왕: 음. 괜찮다. 위로는 필요하지 않아.]

그렇다. 비류아에게 위로는 필요하지 않았다.

저들에게 위로가 필요치 않은 것만큼이나.

“두 아가씨 여러분.”

나는 자리에 앉았다.

언제든 쥐고 휘두를 수 있게 도끼자루는 확실하게 잡고서, 그럼에도 전투 자세는 푼 채로, 흑치사라와 하누리를 향해 말했다.

“그, 방금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방법도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흑치사라가 호오, 하는 표정을 띄웠다면, 하누리는 화상 때문에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는 처음 그녀들을 맞이했을 때처럼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

“아까 드렸던 그 말씀. 살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줄 수 있다는 거,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니었거든요.”

◈          ◈          ◈

나는 제사장에게 흑치사라를 풀어주라 명했다. 제사장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에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나는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법왕님….”

“정 걱정된다면, 제사장. 당신이 둘 사이에 앉으세요. 양 손으로 각자 한 손씩 잡고서요. 그러면 혹시 모를 불상사가 발생했을 때 대응할 수 있겠죠?”

“…대응할 수는 있겠지만, 높은 확률로 제가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감수해 주실래요?”

제사장은 고민했다. 고뇌했다. 그러나 결국 결연하던 표정을 풀고 한숨을 내쉬며 내 결정에 따라주었다.

자,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마주 앉게 됐다. 내가 탁자 반대쪽에 혼자 앉았고, 건너편에는 암살하려던 쬐끄마한 여자가 왼쪽에, 자살하려던 꺽다리 여자가 오른쪽에, 그 사이에는 우리 1세대 식자층 똘똘이가 앉았다.

그렇게 마주보던 한 남자와 세 여자.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꺽다리 여자, 흑치사라였다.

“설마하니… 인질이 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팔이 없어 늘어진 왼쪽 소매를 해파리 촉수처럼 흐늘거리면서 나투아 상주의 맏딸은 웃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거 정말 멋없어요, 법왕님…?”

하누리도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짐작한 것처럼 우리들은 죽음을 각오한 걸 넘어서 받아들이고 온 거라고.”

“응… 그러니 인질의 가치는… 없다고 할까요….”

“네가 우릴 투옥한 다음 무슨 말을 하건, 아, 정확히는 왕국이 어떤 식으로 외교 담화를 발표하건, 나투아와 알실라가 보일 반응은 똑같아.”

“무도하기 그지없는 말 타는 자들… 맞선 보러 갔을 뿐인 처자들을 억류하다…. 그리고 그 억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암살 시도니, 자살 미수니 하는 궤변들을 늘어놓다….”

“한 가지 더하면, 연약한 처자들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억류한 저 천인공노할 연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나투아와 알실라여, 좀 더 단결하자! 저 말 타는 놈들을 타도할 때까지 혈맹을 맺자꾸나! 정도겠지 뭐.”

하누리는 철제 단검으로 호박엿 하나를 콕 찝어 먹었다.

[첫 번째 은월: 나 역시 쟤 마음에 든다, 야.]

딱히 반박하진 않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시종일관 당당한 사람은, 그 당당함이 허세만 아니라면 존중받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누리는 존중하기 쉬운 종류의 인물이었다.

“올바르신 판단들이에요. 맞선을 본다는 빌미로 배를 타고 나섰을 적에 이미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나라로부터 죽은 사람들이 되었지요.”

“그렇다니깐. 그래서?”

“그런데 만약에 그 빌미가 사실이 된다면 어떨까요?”

하누리가 멈칫했다.

흑치사라는 예의 테두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테두리가 없기에 금세 흩어지고 잔재만 남는 그 미소를.

“정말 결혼을 해버리자는 것인가요…?”

“안 될 것 있나요?”

“으흠….”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흑치사라는 제사장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손을 빼냈다. 그녀가 손끝으로 그 이를 톡, 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동안, 하누리는 뒤늦게야 내 말을 이해하고서 펄쩍 뛰었다.

“야, 너 미쳤냐?”

“법왕님! 제 정신이십니까?!”

공교롭게도 제사장 역시 똑같은 말을 했다. 하누리와 제사장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보고, 앞다투어 말을 쏟아냈다.

“난 널 죽이려고 들었거든?”

“법왕님을 암살하려던 여자입니다!”

“암살하려던, 이란 말도 솔직히 틀린 게. 나 그거 아직 포기 안했거든?”

“아까부터 이 여자, 칼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습니다! 호박엿을 먹을 때도 칼로 찍어서… 보셨지 않습니까!”

[간신 조련사: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날카롭게 킬각을 재고 앉았군요. 참으로 부지런한 처자입니다.]

[최초의 성녀: 천사님, 킬각이 무슨 뜻인가요?]

[간신 조련사: 혼잣말입니다. 대충 알아들으십시오.]

[최초의 성녀: 좋은 뜻이 아니란 건 알겠네요. 예언자님, 주의하세요!]

그렇게 하누리 본인, 제사장이 반대 의사를 표하고, 아리야가 경고를 보내왔다.

나는 흑치사라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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