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대단하신 신붓감들 (5)
“…뭐라구요?”
키가 머리 둘은 조그마한 소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경험이 제사장에겐 그야 익숙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하누리는 마치 땅벌처럼 계속하여 톡톡 쏘아붙였다.
“잔챙이라고. 끼어들지 마라. 난 얘한테 말하고 있거든?”
“얘, 얘라니 법왕님께….”
“아. 허물없는 말투가 뭐 어때서? 부부 될 사람끼리 공대를 하나? 까탈스럽게 굴긴.”
제사장이 입을 뻐끔거렸다. 똘똘한 그녀도 여기에는 바로 반박하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승도 반응은 비슷했다.
[최초의 성녀: 세상에. 아직 결혼하겠다고 결정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원래 결혼할 만큼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차려야하는 것 아닌가요?]
[개천의 시왕: …왕국을 대놓고 얕보고 있군. 새삼 내가 죽었다는 실감이 난다.]
[첫 번째 은월: 나 쟤 마음에 들어!]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하누리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어찌 나오는지 반응을 보겠다는 의미군.’
물론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은 정해져 있었다.
“신(神)에 대해서도, 혼(婚)에 대해서도, 논하자면 긴 시간이 걸린답니다. 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면서 하기에는 춥게 차려입으셨네요. 장소를 옮겨서 말씀 나누시는 것 어떤가요?”
“흐응. 차라도 마시자고?”
“예. 마침 좋은 다과가 들어왔거든요.”
“어떤 거? 여기 다과 같은 거 없다고 들었는데.”
시종일관 도발하는 그녀에게 나는 겸손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침 그 쪽에서 보내주신 엿들이 있어서요.”
쌈박한 연놈들은 쌈박하게 대해주면 그만이다.
한 대 맞은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인 하누리는, 그러나 곧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무너진 오른쪽 입가에서 실선으로 그려진 미소는 인중을 지나 왼쪽 입가로 넘어서며 선명한 직선으로 패였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생겨놓고. 강단 있네?”
“유연하다고 말씀해주세요.”
“항. 그 편이 맞기도 하겠네. 좋아. 다음 이야기는 차 마시면서 하자구.”
“예. 그 전에 먼저.”
나는 나투아에서 온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통 나불거리는 것은 나투아의 역할이고,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알실라의 역할인데, 그게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살짝 흥미로웠다. 어디까지나 살짝.
‘일단 성격이 있을 테고.’
척 보기에도 흑치사라는 얌전한 것을 넘어 내성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수행원들 또한 아가씨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먼저 입을 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최초의 성녀: 어째서인가요, 예언자님?]
‘그야 그렇게 얌전한 성격을 가진 이가 중심인물이라면, 그 대신 입 역할을 맡을 만큼 시끄러운 인간도 붙여주게 마련이거든.’
[최초의 성녀: 아하. 그런데도 그런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는 건.]
‘그렇소. 배타고 오기 전에 이미 양국이 짝짜꿍 한 번 맞춰 놨다 이 말이겠지.’
흔들어보려는 시도인데 파악한 이상 넘어가줄 필요는 없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흑치사라 아가씨께서도, 함께 찻잔을 들어주시면 영광이겠어요.”
“어머나….”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흑치사라가 입을 열었다. 오른손을 들어 그 긴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누른 채.
“실로 친절한 환영… 감사드려요….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차례차례 만나시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요…?”
은은한 물결처럼 말이 흐를 때마다, 흑치사라의 왼팔 소매 또한 해조류와 같이 흐늘거렸다. 축 늘어진 눈매와 입가에 맺힌 미소 역시 금세라도 흩어질 것처럼 테두리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예, 함께 뵙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으음… 이야기는 들었지만… 흥미로운 분이네요….”
우후후 웃은 그녀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키가 컸다.
비류아보다도 컸다.
[개천의 시왕: 왜 내가 기준인가?]
달리 말해 시우보다도 크다는 뜻이었다.
흑치사라, 상주의 맏딸이자 외팔이 여성은 내 앞에 섰다. 태양이 가려져 늘어진 몸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그---목소리.
흐늘거리는, 어물거리는, 물그림자를 닮은 목소리가 늘어진 그림자에 신관들이 숨을 죽였다. 제사장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런 속에서, 하누리가 다가왔다.
하누리는 녹아버린 오른쪽 눈을 찡그렸다. 아마도 호의를 표시하려는 것 같았다. 혹은 일종의 애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건 신관들은 시퍼렇게 얼어버렸다.
그렇게 절반은 녹은 쇳물 같은, 나머지 절반은 칼날 같은 미소가 내게 겨눠졌다.
“나도 잘 부탁해.”
음.
“예.”
그리고 물론 이 기세싸움에서,
나는 숨을 죽이지도, 머뭇거리지도, 얼어버리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 대신, 나는 다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리를 옮기지요. 제사장, 다과를 준비해주세요.”
◈ ◈ ◈
신전 심처에 자리 잡은 법왕의 집무실.
그 곳에는 하누리와 흑치사라, 그리고 나와 제사장 이렇게 넷만 있었다.
“그럼 저희는 다른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나머지 신관들은 모두 호다닥 사라졌다. 어찌나 빠르게 떠나가는지 배웅할 짬도 없었다.
이 불길한 아가씨들과 1초라도 함께 있기 싫었던 것이리라. 내 옆에 앉은 제사장도 냉철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있다는 티가 팍팍 느껴졌다.
그것을 두고, 흑치사라는 우후후 웃으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신관 여러분들이… 모두 재미있네요….”
“그러게. 귀여워. 지켜보는 맛이랑 재미가 있어.”
이건 하누리가 히죽 웃으면서 꺼낸 평가다.
제사장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혹여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실례요…? 아…. 신관 분들이 도망친 거 말인가요…?”
두 아가씨가 한 명은 우후후, 다른 하나는 아하핫 웃었다.
“걱정 마 잔챙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인 걸? 어쨌든 대놓고 앞에서 인상 찡그린 사람은 없었잖아?”
“하누리 말이 맞아요…. 그것만 해도 왕국은 뭐라고 하나… 품위를 지킨 것이랍니다…?”
음.
“두 분이 아는 사이시군요?”
내 말에 두 여성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키 차이가 심하여 한 명은 내려다보고 한 명은 올려다보는 식이었지만, 교차하는 시선에는 털끝만큼의 유감도 없었다.
다만 숨길 수 없는 우정과 애정이 있을 뿐.
“네… 옛날 친구예요…. 하누리랑은 참 자주 만나 놀았었지요….”
“오~래된 사이지. 가령, 그렇네. 그때는 쟤도 양 손으로 찻잔을 들 수 있었걸랑?”
“한편 저 아이도… 얼굴이 양쪽 다 완벽했구요….”
“하, 진짜. 나 목마도 태워주고 다 할 수 있었는데 말야. 우리 흑치사라.”
그런 말을 나눈 둘은 서로 오른손을 뻗어 깍지를 끼었다. 키 차이가 있는 만큼 손가락 길이도 차이가 났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필 두 분께서 오시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시겠네요.”
그 말에는 다시금 소리 다른 두 웃음이 있었다.
“으응, 글쎄요…? 어차피 혼례라는 건… 윗분들 사정에 따라 움직이는 거니까…?”
“맞아. 아무튼 널 덮치는 게 나한테 주어진 임무다 이 말이지.”
좋다.
‘지금 이 상황. 어떻게들 생각해요?’
[첫 번째 은월: 일단 난 하누리가 마음에 들어! 하누리랑 결혼해!]
‘다음.’
[개천의 시왕: 알실라와 나투아가 수면 아래에서 연합하고 있다는 추론에 또 하나의 증거물로 기능할 수 있겠군.]
‘예. 아리야는?’
[최초의 성녀: 뭔가 좀 이상하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야는 곧 어떤 부분이 이상하다는 것인지 전해왔다.
[최초의 성녀: 서로 아는 사이를 맞선 상대로 맞춰 보낼 만큼 확고하게 합을 맞추고 있다면, 왜 이렇게 맞선을 청하는 절차가 필요한 걸까요? 그냥 대놓고 쳐들어와도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개천의 시왕: 거절할 경우 전쟁 명분이 되고, 승낙할 경우 왕국 정치에 소요를 일으키고. 어느 쪽으로 구르든 양국으로서는 이득이 되는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았었나?]
[최초의 성녀: 음… 제 경험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물론 규모가 다르지만, 소모라 살던 무렵 이야기를 좀 할게요. 그 곳에서 월족이 그 밖의 소수 부족들을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 했었지요?]
개천 임무를 수행하면서 들었던 것 같다.
[최초의 성녀: 우리가 소수 부족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중재할 때에는 그 ‘명분’이 중요하곤 했어요. 어느 부족이 옳으냐, 에 따라 그 부족을 편들어주는 타 부족들 숫자가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음, 소모라 사람들이 월족을 괴롭힐 적에는 그냥 막 괴롭힐 수 있었죠. ‘명분’같은 게 굳이 없다 해도 말이에요.]
[첫 번째 은월: 앙. 요컨대 ‘명분’이라는 건, 좀 더 많은 편을 끌어들일 수 있을 때에나 유효하다는 소리?]
[최초의 성녀: 예. 근데 지금은 알실라와 나투아 뿐이잖아요? 대륙과 섬…도 있다지만, 그 곳들은 너무 멀고. 결국 알실라와 나투아 이 둘뿐인데. 이 둘이 이미 확고하게 연합하고 있다면, ‘명분’이 없어도 상관없으니…. 그냥 빨리 이 왕국을 먹고 치워버리는 게 훨씬 효율적일텐데요?]
[첫 번째 은월: 그럼 뭐 빨리 먹고 치울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얘기네.]
[개천의 시왕: …바꿔 말하면, 알실라와 나투아가 힘을 합쳐도 왕국을 먹을 수 없다는 결론을 저들이 내렸다는 것이겠지.]
[최초의 성녀: 그게 뭘까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오래는 아니었다.
‘일단은 정보 부족이 있겠지요.’
[개천의 시왕: 하지만 왕국 도읍지에는 나투아 대사관이 있다. 저들이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면, 그건 이미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내린 결론일 터. 즉, 정보 수집 결과 어떤 것이 원활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해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비류아가 거기까지 정리한 순간.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 숙여!]
야리소연이 소리쳤다.
[ 물리위기감지가 자동 발동됩니다. (2/3) ]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츠팟…! 허공을 가르면서, 은빛 선이 내 머리 위를 스쳐갔다.
“헤에.”
바로 직전까지 살갑게 웃고 있던 맞선 상대.
하누리가, 다과가 올려져 있던 탁자를 짚고, 칼날을 뻗은 자세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피하네?”
“무슨,”
제사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나는 소리쳤다.
“제사장, 흑치사라를!”
“네? 법왕님을 공격한 건 하누리,”
“-는 나한테 맡기고! 흑치사라를 억눌러요! 저거 못 삼키게 해! 명령입니다!”
제사장은 당혹하면서도 흑치사라를 보았고, 다음 순간 벼락같이 튕겨나갔다. 흑치사라의 오른손을 붙잡아 꺾고서, 그녀가 삼키려던 환단을 떨어뜨리게 만든 것이다.
“어라….”
다소 곤혹스럽게 됐다는 듯 우후후 웃는 흑치사라와 그녀를 억누르는 제사장을, 나는 더 신경 쓸 수 없었다.
품에서 손도끼를 뽑아들고서, 캉…! 하누리의 두 번째 공격을 막는데 바빴으니까.
“어허,”
하누리의 단검이 슬쩍 떨어졌다.
다음 순간,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겨드랑이를 향해 쏘아지는 것을, 캉…! 역시, 도끼날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튕겨냈다.
‘가리비수 석상 부활 안 했으면 절대 못 막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를 만치 무시무시한 일격.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암살.”
“응.”
선뜻 하누리는 긍정했다.
“너. 시우인가 하는 양반. 둘 중 하나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더라.”
이상하다아, 이렇게 도끼를 잘 다룬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하고 고개를 기울이는 하누리를 향해서 나는 중얼거렸다.
“맞선은 보통 둘이서 보니까.”
“죽이기 딱 좋은 기회지.”
이 무슨 얍삽한, 이란 생각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맞선 자리에서 누군가를 죽게 한다, 그러면서 비난은 피하고, 오히려 죽음을 문제 삼아 왕국 간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더 얍삽한 방법이 생각났기에.
나는 흑치사라가 떨어뜨린 환단에 눈이 갔다.
“자살.”
“법왕님 일행에게 독살, 당하는 거지만요….”
제사장에게 억눌린 그대로 우후후, 테두리 없이 웃으면서 흑치사라는 말했다.
나는 숨김없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단하신 신붓감들이네요.”
한 명은 나를 죽이러 왔고,
한 명은 내게 죽으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