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대단하신 신붓감들 (4)
‘괜찮냐니? 뭐가?’
[첫 번째 은월: 맞선할 거고 결혼할 거잖아. 그래도 정절?]
‘그거야 뭐 가리비수가 하고 모서아가 했듯 법왕이 하는 거니까….]
[첫 번째 은월: 그건 그렇다 치자.]
[첫 번째 은월: 근데 결혼한 다음에는 애 만들기도 할 거 아님?]
앗.
[첫 번째 은월: 그래도 정절?]
음.
어….
[최초의 성녀: 그건 저도 좀 궁금한 부분이네요….]
‘아리야, 뭘 슬쩍 끼어드는 거요?’
[개천의 시왕: 그보다 길잡이여. 그대 애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기는 하는 건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 남녀가 한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면….]
[첫 번째 은월: (매우 큰 웃음)]
‘아 씨 왜 웃는데. 뭐가 웃긴데 또.’
[첫 번째 은월: 니 인생. (아주 큰 웃음)]
[간신 조련사: 이건 저도 좀 웃기는군요. 가문이란 사람을 사육하는 목장일지어니~ 어쩌고 하는 말에 담백하게 공감했으면서 설마 구체적인 번식법은 모르는 겁니까?]
‘아니 안다구요! 알 거 다 안다고, 나!’
[최초의 성녀: 거, 걱정하지 마세요, 예언자님! 혹시 모르거나 어려운 부분 있고 그러시면 제가 잘 가르쳐 드릴게요!]
‘그대는 또 왜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 거요?!’
[개천의 시왕: 기억해 두어라. 길잡이여. 무릇 사내가 여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기술에 통달할 필요가 있다. 시우에게 그걸 익히게 하는데 고생했지. 나 또한 그대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도록 하마.]
‘네! 네! 다들 거기까지!’
돌겠네.
‘덕분에 쓸데없는 감상들은 확실하게 날아갔지만….’
역시 이 양반들을 내 마음의 ‘닻’으로 삼은 것은 올바른 선택… 이었다. 아마도.
“법왕님. 역시 긴장되십니까?”
똘똘이 제사장이 내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음.
“괜찮아요.”
“역시 정략결혼을 하시는 게 내심 마음에 걸리시는 건….”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아직까지는 어디까지나 맞선. 결혼은 할 거지만, 꼰대들 입 다물게 하기 위해서는 단어 선택에 주의해주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제사장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신전에서 나온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법왕 직속이라 할 만한 신관들, 왕국 식자층 1세대가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그들은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법왕님께서는 정말이지 생각이 깊으시다니까요.”
“역시 달의 여신을 가장 가까이서 대리하시는 분.”
“우리들도 좀 더 정진해야겠소이다.”
그렇게 말한 신관들이 주먹을 꾹 쥐는 모양새가 법왕이 그간 살아온 삶을 증명하는 듯했다.
‘좀 기특하네, 이 놈.’
내가 로그아웃한 동안에도 이렇게 열일을 해오다니. 원래는 노예 출신이었으면서.
[간신 조련사: 당신이 빙의해있는 동안 행한 일들에도 그만한 인과가 축적되니까요. 그들로서는 삶의 방향성이 새로 잡히게 되는 셈입니다.]
[첫 번째 은월: 앙. 그러고 보면 너 들어갔다 나오니까 가리비수도 좀 똑똑해졌었어.]
[최초의 성녀: 모서아도 그랬어요. 으응, 기억나네요….]
[개천의 시왕: 무엇보다 내가 잘 돌보고 가르쳤다.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말이지. 본디 노예이던 것을 감안해서 취한 조치였고, 자세한 진실은 여기 온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만, 덕분에 나쁘게 흐르진 않은 것 같군.]
좋군.
자모신의 시스템은 가끔 참 너무 편의주의적인 것 아닌가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어쨌든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아.”
그때 제사장이 대하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 보십시오. 법왕님의 신부 후보들이 오시는군요.”
나는, 그리고 신관들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대하 저편. 쪼그마한 점 같은 것이 두 개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점은 서서히 커져서 윤곽을 드러냈다. 배였다.
하나는 뾰족하게 높은 것이 스쳐지나갔다간 두동강 날 것처럼 날카로운 첨저선(尖底船)이었고, 또 하나는 마치 거북이 등판처럼 널쩍한 게 무게감이 있는 평저선(平底船)이었다.
첨저선의 깃발에는 모루와 불꽃, 알실라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평저선의 깃발에는 금화와 파도, 나투아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휘유. 둘 다 힘 좀 썼군요.”
신관 중 한 명이 휘파람을 불었다.
“알실라는 바다 건너 섬나라와 주로 교역하지요. 이동 속도를 위해 저런 모양의 배를 주로 만든다는 것 같고. 나투아는, 물론 강도 바다도 오다니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배들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저렇게 넓적한 배는 몇 척 없다고 들었습니다.”
제사장이 해설했다.
신관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저 중 하나에 외팔이가, 다른 하나에는 얼굴이 불탄 사람이 타고 있다는 거지요.”
“말조심.”
“예, 제사장님. 그래도 좀 그래서요. 저희들도 초상화를 보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몸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법왕님 아내 되실 분인데….”
제사장은 더 반박하지 않았다. 본인도 내심 그렇게 여기고 있는지 입술을 사려 물었을 뿐.
내가 한숨을 지었다.
“다들.”
제사장을 포함한 신관들 모두가 멈칫했다.
“손님들 앞에서 이상한 태도를 취하거나, 특히 뒷담화 하다 걸리거나 하면 대역으로 다스릴 거예요. 그게 누구든 간에.”
신관들 모두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냥 주의를 기울여달라는 거예요.”
자존심으로 일을 망쳐먹는 이 습성도 참… 건국 전 모서아 시절부터 시작해 야만인들 얕보다가 멸망해버릴 때까지 이어지는 왕국의 고질병 중 하나니까, 이 기회에 확실하게 잡아둬야 했다.
‘근데 새삼 느끼지만 이놈의 왕국은 병만 많지, 뭐 좋은 게 없는 거 아닌가…?’
[간신 조련사: (귓속말) 야만인들을 가장 많이 얕본 건 당신 아니었습니까?]
음.
[간신 조련사: (귓속말) 이 병균.]
천사님이 홀로 소수 의견을 내는 동안에도 배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배들이 가까워질수록 신관들의 수군거림은 줄어들었고, 이윽고 숨소리마저 줄어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알실라의 뾰족한 배 앞머리에는 실제로 강철로 된 거대한 칼날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나투아의 경우, 배가 널찍한 만큼 넓은 갑판 울타리 전체가 순금으로 둘려져 있었다.
기술력과 사치의 과시.
신관들의 말문이 막힐 만했다.
“세상에.”
제사장마저 일순 침착함을 잊어버렸다. 비틀어진 신관모를 다시 고쳐 쓰더니 그녀는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구태여 저런 배를 동원할 필요가… 있겠군요. 네. 있겠습니다.”
“예.”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을 테니까요.”
거절하면 전쟁이 기다린다는 것을.
“…태평하시군요, 법왕님.”
“이미 다 추론해낸 것들이잖아요? 제사장. 그러니 긴장할 것은 더 없어요. 그보다 저 배들도 지참금에 포함되는지 모르겠는걸요. 제사장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것까지 달라면 좀 그렇게 비칠까요?”
“음.”
제사장이 헛기침을 했다.
“글쎄요, 과할 것까지는… 다만, 본래 외간으로 시집을 온다는 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니. 저 안에 타고 있는 이들 중 법왕님의 신붓감들이 가장 높은 사람인지, 아니면 다시 돌아갈 이들이 더 높은 사람인지에 따라 갈리겠습니다.”
“아마 후자겠네요. 아까워라.”
“정말 철저하시군요.”
“정략결혼 아닌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지사 이득을 보고 결혼하는 거. 철저하게 잇속을 따져야지요.”
‘잇속을 따지는 건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간신 조련사: (귓속말) 그건 사실이어서 반박할 수 없네요.]
[간신 조련사: (귓속말) 이 돈벌레.]
‘아까부터 너무하십니다요, 천사님.’
그쯤에서 대화를 멈추어야 했다.
제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에 배들이 닿았습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알실라의 배는 왼편 나루에, 나투아의 배는 오른편 나루에 닿았다. 그 광경은 몰려서있던 나와 신관들뿐 아니라 도읍지에 있는 왕국 백성들 모두에게 훤히 보였다.
수로를 짓느라 노동하던 손길이 멎고 장탄식이 흘렀다. 아직 일할 나이가 안 되어 길거리를 뛰놀던 아이들이 ‘저것 좀 봐! 엄청나! 엄마! 저거 보세요!’하고 목소리를 높여댔다.
“…평원에서 붙으면 한 방 감도 안 될 것들이.”
신관 중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사장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가 곧바로 입을 다문 탓이기도 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왕국의 식자층 1세대들은, 비록 전사 계급은 아니었으나, ‘왕국’의 탄생과 함께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그러기에 왕국에 대한 소속감은 오히려 보통 전사들보다 더 강할 것이다.
‘우리는 달의 백성이며, 우리의 강역이다.’
‘달이 세상을 굽어보듯, 우리의 시야는 세상 전체에 미친다.’
그런 느낌으로 월족 핵심층과 비슷한 선민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물론, 저 바깥에서 온 손님들은 그런 감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이미 돛이 접힌 배에서 닻이 내려졌다. 나루와 배 사이에 널판지가 놓였다.
그리고 그 널판지를 따라 천천히 사람들이 걸어 내려왔다.
◈ ◈ ◈
먼저, 알실라의 배를 타고 온 이들은 알실라 특유의 쌈박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남녀 상관없이 짧게 친 머리카락과 몸에 딱 붙는 옷. 그 외에는 금속을 써서 만든 단검과 혁대 장식 정도가 전부였다.
그 한복판에 그녀가 서있었다.
‘알실라 화로지킴이의 맏딸.’
오른쪽 얼굴이 화상으로 짓물렀음에도, 면사포 같은 것조차 없이 그대로 드러낸 조그마한 소녀.
‘하누리.’
그런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뭍에 발을 디뎠다.
◈ ◈ ◈
한편, 나투아의 배를 타고 온 이들은 나투아 특유의 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목덜미까지 덮는 모자를 써서 살갗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자락이 긴 옷 곳곳에는 산호며 진주, 진귀한 바다생물이나 금, 보석 따위를 써서 만든 장신구가 곳곳에 붙어 반짝거렸다.
그 한복판에 그녀가 서있었다.
‘나투아 상주의 맏딸.’
왼쪽 팔이 없는 그녀는, 훤칠한 키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슬쩍 수그리고 있어서 마치 한 그루의 버드나무 같았다.
‘흑치사라.’
그런 이름을 가진 여성이 바닥이 아파하지 않을까 조심하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뭍에 발을 디뎠다.
◈ ◈ ◈
동시에 뭍에 발을 디딘 그녀들과 그 수행원들은 서로를 한 차례 흘끗 마주보았다. 잠시간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 우리가 있었다.
“왕국에 당도하신 것을 환영해요, 여러분.”
나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 환영사를 던졌다.
“알실라에서 오신 하누리 아가씨. 그리고 나투아에서 오신 흑치사라 아가씨. 왕국의 태부 각하와 이세 폐하를 대신하여 여러분을 맞이하고자 나온 법왕이라고 해요.”
꾸벅, 고개를 수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부디 이 화창하고도 복된 날에 달의 여신의 축복이 있기를.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도, ‘땅을 녹이는 불뱀’께서도 여러분들의 여정을 축복해 주셨으리라 믿어요.”
나는 먼저 왕국의 국교인 달의 여신을 언급했다. 이어 나투아의 신과 알실라의 신을 한 차례씩 언급해주었다.
그런 내 환영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알실라 쪽이었다.
“흐음.”
하누리, 양 허리에 손을 짚은 화로지킴이의 맏딸이 턱을 치켜세웠다. 반쯤 녹아내린 오른쪽 얼굴과 멀쩡한 왼쪽 얼굴이 동시에 드러났다. 별을 닮아 연노란빛을 흘리는 왼쪽 눈동자에는 흥미가 떠있었다.
“그 인사 괜찮은 거야? 듣자니 달의 여신 신도들은 모든 신들을 허깨비로 여겨야한다는 규율이 있다는 것 같던데.”
신관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환영사를 던졌는데 교리에 대한 논박이, 그것도 반말로 돌아온 거다.
제사장은, 식자층 중의 식자층답게 인상을 쓰진 않았지만 한껏 차가워진 어조로 말했다.
“법왕께서는 왕국의 신전을 대표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맞이해주시는데 대뜸 허물없는 말투로 논박하시다니, 알실라의 예법 교육에 의심을 품게 되는군요.”
“헤. 넌 뭔데 끼어드냐?”
“…저는 왕국의 제사장입니다.”
하누리의 멀쩡한 왼쪽 얼굴은 벼려낸 칼날처럼 선이 날카로웠다. 그 입가에도 그만큼 날카로운 미소가 그어졌다.
“그럼 잔챙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