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대단하신 신붓감들 (3)
천사의 말과 야리소연의 박장대소에 아리야는 심리적인 파닥거림을 보내왔다.
[최초의 성녀: 그, 그보다도! 법왕이, 음, 예언자님처럼 꾸준히 애정을 부어줄까요?]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오.’
내가 로그아웃했던 동안의 로그(이것도 천사님은 마호스 신학 용어인지 뭔지로 ‘그 동안의 삶’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다들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니 차후 이런 설명은 그만두도록 하자)를 살펴보면, 법왕은 사람의 외모에 편견을 갖고 대하던 인물은 아니었다는 모양이고.
결론은.
“제 결심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시선을 똑바로 하고. 이 나라의 태부를 바라보았다.
“시우 님. 시우 님께서는 방금 왕국의 격을 말씀하셨지요. 제 격에 대해서도. 거기에 이 처자들이 어울리겠냐고도요.”
“그랬지.”
“하지만 진정한 격이라는 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부족한 점을 외면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예요.”
“….”
“왕국은 많은 것이 필요해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태부 시우의 집무실에 쳐진 긴 휘장을 열어젖혔다.
나무를 짜 맞추어 만든 창문을 열자, 왕국의 도읍지가 펼쳐졌다.
“시우 님. 아니, 태부 각하.”
“….”
“보세요.”
왕국의 분주함도 함께 펼쳐졌다.
휘장을 젖히면 거기 묻은 먼지들까지 펼쳐지듯.
창문 저편으로 길거리가 내다보였다. 길거리를 따라서 쭉 건물들이 이어졌다. 건물들은 대부분 지붕이 낮았다. 낮은 지붕들 아래로, 왕국 백성들이 열심히 돌아다녔다. 하지만 길거리, 낮은 지붕들, 백성들의 모습은 대부분 오래지 않아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수로 공사였다.
“왕국 도읍지 전체에 수로를 깔아야 한다고 한 지 무려 15년이 흘렀지만, 아직 5할도 채 진척이 안 됐지요.”
그뿐만이 아니다.
“시왕께서 붕어하신지도 얼마 안 되었어요.”
나와 시우의 권력이란 것이 결국 시왕 비류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시신조차 우리는 높이 받들어 모셔야만 했다. 시왕묘와 관련된 기념사업은 큰 자금과 노동력을 잡아먹고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왕국이 짊어져야 할 재정적 부담이 되었다.
“많은 것이 필요해요. 돈도. 노동력도. 기술력도. 무엇이든 좋으니까 이문을 남길 구석이 필요해요.”
왕국은 전방위로 압박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 같았다면, 좀 더 이야기가 쉬웠겠지요.”
사람들은 왕국을, 정확히는 월족을 두려워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자들. 모든 것을 말발굽 아래 짓밟으며, 창칼로 달의 여신의 계시를 전하는 위대한 전사들….
“어딘가를 정복하고. 거기서 얻은 부와 노동력으로 필요한 것을 갈음하고. 어딘가를 정복하고. 거기서 얻은 부와 노동력으로 필요한 것을 갈음하고. 그 반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우리는 단독으로 정복할 수 없는 적들만을 주위에 두게 됐어요.”
나투아.
알실라.
대륙.
“우리는 셋 중 어느 쪽도 정복할 수가 없어요. 하얀 머리 산과 나른한 벌판 너머의 북쪽 야만인들이라면 아직 모르겠지만, 치는데 들어가는 수고는 너무 크고 얻어서 돌아오기엔 길이 너무 멀지요.”
거기다가 이미 나투아와 알실라, 이 둘과 국경을 맞대어 버린 지금은 긴 원정을 계획할 수도 없다. 왕국이 군사력을 다른 데에 투사하면 바로 이 둘 중 하나가, 또는 둘 모두가 쳐들어올 테니까.
“피를 마셔 갈증을 해소하던 시대는 끝난 거예요.”
대륙의 누군가가 차후 하게 될 말처럼,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하는 것과 말 아래서 정복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므로.
왕국은 체제 변환 도중에 있다.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 필요한 것을 전쟁 이외의 수단으로 얻어야만 한다.
변치 않을 사실이다.
“태부 각하.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근데 왕국이 지금까지 해온 거라고는 전쟁뿐이다.
“우리는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배를 제대로 만들어본 적도 없고요. 그 결과는 이번에 서해 진출 시도가 막힌 데에서 충분히 아셨겠지요.”
“으….”
“우리는 뭘 만들어본 적도 없어요. 아, 도기는 좀 굽고. 건축도 좀 했네요. 청동도 다룰 줄 알고. 하지만 그 밖에는? 전부 다 노획한 것들이니, 노획처가 떨어진 지금 동이 나면 그대로 말라붙어버리지요.”
시우는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 시선을 쫓아가듯 걸음을 따라 옮기며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진솔하게 인정하는 것이 격이에요. 우리라고 달라야 쓰겠나요?”
“하지만… 시왕께서는.”
“시왕께서 다른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분께서, 여신께서 굽어 살피실 것이니 모든 게 원하는 대로 굴러들어올 것이라며 손을 놓아버리셨을까요?”
시우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왕 폐하마저도 그리 하진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자존심을 높여서야 어디 쓰겠나요?”
“법왕.”
“태부 각하. 우리 둘이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해요.”
나는 시우의 양 어깨를 잡듯이 말했다.
“태부 각하 밑의 부장(部長)들이 지금 어쩌고 있나요?”
“그거야 뭐….”
“자신들은 달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자신들은 왕국의 권력자다…. 당장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 것을 누릴 생각을 하지, 왕국을 먹여 살릴 생각은 안 하잖아요.”
방금 내가 한 말은 시우가 자기 아랫놈들 관리를 똑바로 못하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법왕! 이 사람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일들이야. 그래서 오늘도….”
“아니요, 태부 각하. 충분히 알지 못하세요.”
나는 나무 창문을 닫았다. 휘장을 쳤다.
“좀 더 왕국의 앞날을 걱정하셔야 해요!”
창문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길거리 풍경이 사라졌다. 왕국의 분주함도 사라졌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어두운 집무실.
시우와 나.
왕국의 태부와 신전의 법왕.
“아빠마마, 법앙, 둘 왜 그래애…?”
그리고 국본(國本), 아직 4살에 불과한 이세뿐이었다.
“싸워…? 싸우지마…. 싸우면 아파아. 웅?”
어미인 비류아가 노산(老産)을 했기 때문일까, 이세는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다. 철혈 군주의 피를 이었음에도 눈물이 많았다.
시우가 그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닙니다, 폐하. 싸우다니요. 그런 게 아니니 마음 놓으소서.”
“진짜 아니지이…?”
“예… 그저, 우리는.”
말을 하던 시우는 입술을 다물었다.
내가 말한 왕국의 앞날.
그것은 곧 이세의 장래이기도 했으므로.
“본제로 돌아오지요.”
나는 시우를 향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왕국이 해야 할 일은 결국 하나밖에 없어요. 외교! 사람과 사람을 잇고, 우리한테 없는 걸 저들한테서 구해야 합니다. 저들이랑 제일 간단하게 이어지는 수단이 뭡니까? 결혼 아닙니까? 태부 각하. 정략결혼이 답이에요.”
너무 많은 전사들 중 상당수를 장인과 상인, 그리고 농민과 어민으로 바꿀 시간을 얻어야만 한다.
“….”
시우가 탁자에 초상화들을 내려놓았다.
비류아가 수많은 칭호를 받았듯, 그 부인(夫人)인 시우 역시 수많은 호칭을 받았다.
왕국에서 부르길, 가장 큰 아버지. 태부. 가장 큰 깃발을 짊어진 기수.
그러나 나에겐 와 소리 나는 빡대가리에 아들바보에 불과한 인물이 푹푹 한숨을 쉬었다.
“네겐 언제나 희생하는 역할만 맡기는 것 같아서….”
말이 잠시 멎었다. 다시 이어졌다.
“괜찮겠나, 정말?”
“예. 그리고 그것이 희생이라고도 생각지 않아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첫 번째 은월: 어쨌든 뭐야, 짬처리? 하여간 대부분의 부부 생활은 법왕 본체가 대신 해줄 테니까?]
‘야리소연. 넌 눈치가 너무 빨라.’
[개천의 시왕: 배우기도 빨리 배우고 말이지. 원래 천이 새하얄수록 쉽게 물드는 법이다만.]
[최초의 성녀: 야리소연이 과연 새하얀 천일까요…?]
[간신 조련사: 아리야. 그보다는 지금 아리야를 물들이고 있는 색이 어떤 색인지 염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색… 아니, 구토물 같은 색이지 않습니까.]
‘검은 색은 예로부터 고급스러운 색깔이었지요. 그리고 구토물 같은 색이라면, 그렇군요. 번쩍거리는 금색을 말함 아닙니까요. 둘 모두 참으로 제게 어울리는 색깔들이네요.’
나는 얼굴에 금판을 두른 채 말했다.
“태부 각하. 말씀드렸듯 저는 어떤 처자를 아내로 맞이하든 사랑할 자신이 있어요. 왕국 사랑, 나의 사랑. 전부 사랑으로 이어진 세상 아니겠어요? 태부 각하. 제 사랑을 굽어 살펴주세요.”
“그래도 자네를 어디 팔아치우는 것 같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우는 자꾸 초상화를 힐끔힐끔 내려 봤다.
마치 늦둥이 동생을 염려하는 것 같은 표정. 실제로 시우가 법왕인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란 그럴 것이다.
“예. 말씀드렸듯 그런 이야기들을 수군거리는 치들이 있겠죠. 명색이 왕국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인데, 토실토실 살 오른 돼지마냥 뱃놈이랑 땅지렁이 반편이들한테 팔려 나갔다구요. 왕국에 대한 충정에 가득찬 체 하면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거예요.”
나는 똑바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런 작자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단단히 잡아주셔야 해요.”
“후으….”
시우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네는 나를 시왕님과 이어주었는데, 나란 놈은 너를….”
시우는 잠시 말을 멎었다.
잠시 후에, 그가 중얼거렸다.
“젠장. 망할 놈. 하긴 내가 언제 네놈의 말빨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한 차례도 없었지요.”
“그래, 알았다. 알았다고.”
시우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시우가 말했다.
“오냐. 알았어. 왕국을 위해서, 국본을 위해서, 장래를 위해서 혼처를 잡아라. 누굴 택하든 네가 감당하겠다니 토 달지 않으마.”
“태부 각하.”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다!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어.”
“어떤 말씀을?”
“행복해져라.”
음.
이건 조금 생각지 못한 말이어서, 나는 진심으로 일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번에는 시우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맑고도 곧았다.
“고생만 다 하고. 어릴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여간…. 잘 먹고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으면 날 뛰어넘는 전사가 됐을 거고, 재주도 많으니 더 좋은, 더 나은 삶이 있었을 텐데….”
숫제 한탄에 가까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시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은월의 핏줄이 아니므로, 당연히 은월의 눈동자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일까, 그 눈동자는 달이 아닌 하늘을 닮아 푸르렀다.
그 푸른 눈동자는 생전의 내 눈동자를, 정확히는 내 아버지나 내 형의 눈동자를 연상케 했다.
‘음.’
이렇게, 눈앞에서 푸른 눈을 가진 남자한테 걱정하는 말을 들으니, 나의 심장은 조금 뜨거워졌다.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음.
[간신 조련사: 잊지 마십시오.]
‘예.’
나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큰 강점이다.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태부 각하.”
머리를 깊이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에 이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법앙. 행복해야 대!”
음.
나는 대답 없이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서 바깥으로 나섰다.
◈ ◈ ◈
‘야리소연.’
[첫 번째 은월: 왜?]
‘아무거나 개소리 좀 해주라.’
[첫 번째 은월: 감동받은 거 털고 확 기분 전환하려고?]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깐.’
[첫 번째 은월: 어허. 내가 누구냐. 바로 니 첫 여편네 아니냐? 척하면 척인 거야 당연한 거 아님?’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건 가리비수가 한 일이라고. 내 마음은 생전의 내 눈동자처럼 푸르른 정절을 지키고 있거든?’
[첫 번째 은월: 하여간 그 놈의 정절 타령.]
[첫 번째 은월: 근데 야. 정절 타령 하니 생각나는데 너 그건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