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대단하신 신붓감들 (1)
두 개의 나라.
두 명의 여인.
바꾸어 말할 것도 뒤집어 말할 것도,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다.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께 정략결혼을 청하는 거네요.]
[개천의 시왕: 그럼으로써 ‘편’을 확실하게 정하라는 거겠지.]
그러기 전까지는 양측 모두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
나투아의 압박이 강해진 것도, 알실라의 거부가 견고해진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그냥 ‘신호’를 달라는 거겠지만요.’
나는, 그러니까 법왕은 현재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왕국 2인자의 자리를 태부인 시우와 공유하고 있다. 그런 내가 양국 중진의 여식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물론 상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왕가끼리의 결혼만큼은 아니죠. 본격적으로 편을 정하게 되는 건 이세가 장성해서 신붓감을 맞이하게 될 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아직까진 누굴 선택하든 결정적인 선택까진 아닐 거라는 뜻이다.
어렴풋한 방향성은 정해지겠지만, 10년에서 20년쯤 지나 이세가 정식으로 결혼할 때쯤에는 또 어떻게든 판국을 뒤집을 수 있는 그런 애매한 방향성이랄까?
따라서 조금은 마음 편하게 선택할 수도….
[간신 조련사: 참고로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간신이여. 그 방향성을 거슬러 뒤집어버려야 하는 건 바로 당신이 될 겁니다.]
음.
‘역시 그럴까요?’
[간신 조련사: 지금까지 임무를 수행하면서 뭘 배운 겁니까, 간신이여? 당신은 항상 당신이 싼 똥을 치우는데 임무 기간의 절반쯤을 쓰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래도 아리야와 모서아 임무 때에는….’
[간신 조련사: 그때도 기실 월족에 대한 학대가 유독 심했던 것은 가리비수 신앙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아니, 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난리지….
[첫 번째 은월: 간신이 나라를 살림. (완전 큰 웃음)]
‘넌 또 왜 웃어….’
[첫 번째 은월: 본격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이야기. (완전 큰 웃음)]
‘아니 왜 웃냐고….’
[첫 번째 은월: 아 진짜 미치겠네. (완전 큰 웃음) 과거의 너랑 미래의 네가 손 맞잡고 기싸움하는 거 왜 이리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지는데 진짜. (완전 큰 웃음)]
‘야, 됐으니까 조용히 좀 해라. 야만인 아니랄까봐 정신 사납게시리….’
젠장.
나는 다시 초상화들을 바라보았다.
이 둘 중 한 명이 미래의 내가 치워야할 똥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아니, 그걸 지금의 내가 고민해야 할까? 미래의 똥 같은 건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 치워주지 않을까?
살아간다 함은 곧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믿는다는 건 곧 미래의 나 자신 또한 흔들림 없이 믿는다는 것 아닐까?
[최초의 성녀: 저어… 예언자님.]
‘음? 왜 부르시오, 아리야?’
[최초의 성녀: 그게 음… 일단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다음 임무에 빙의하셨을 때, 그… 지금 몸에, 그러니까 법왕의 몸에 빙의하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것 말이에요.]
아.
[최초의 성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빙의의 법칙이란 게 가장 가까운 혈족에 빙의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고르시는 분이 그… 지금 예언자님 들어간 몸의, 그러니까 법왕의 아내가 될 텐데….]
윽.
[최초의 성녀: 그렇다는 건 바꾸어 말하자면 그렇게 아내로 선택하신 분이….]
[첫 번째 은월: 다음 임무에서는 막 엄마 되고. (완전 큰 웃음)]
[첫 번째 은월: 진짜 미쳐 버리겠다! (완전 큰 웃음) 니 인생 완전!]
나도 미쳐 버리겠다….
아내 될 사람을 고르는 것인데, 동시에 그게 내 엄마, 또는 할머니를 고르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게 말이 되냐 진짜?
‘이거야말로 윤리적으로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천사님?’
[간신 조련사: 저승에 있을 적에 비류아가 명쾌하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문이란 결국 인간을 사육하기 위한 사육장에 불과하다고요. 담담해지십시오.]
‘그 말에 천사님은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된다는 입장이셨던 것 같은데…?!’
[간신 조련사: 당신의 빙의체가 만들 가문이 곧 당신의 차기 빙의체를 사육하기 위한 사육장이 된다는 것만은 어쩐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군요.]
이 천사는 역시 악마가 아닐까? 그렇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나는 두 초상화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 시대의 인물화란 건 사람에 대한 정보를 조금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는 법인데, 공교롭게도 두 초상화 모두 그렇지 않았다. 그것도 각자 범상치 않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똘똘이 제사장이 그 사실을 풀어 해설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나투아 상주의 맏딸은 왼쪽 팔이 없다고 합니다. 어릴 적 바다에서 헤엄을 치던 도중 상어인지 뭔지 하는 바다괴물에게 뜯어 먹혔다는 모양입니다.”
아내 후보 겸 어머니 후보 겸 할머니 후보 중 한 쪽은 외팔이였다.
“또한, 알실라 화로지킴이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대장간 일을 하던 도중에 잘못해서 쇳물을 뒤집어썼다는군요.”
다른 한 쪽은 얼굴 전체 반쪽에 화상을 입고 있었다.
음.
‘이거 냉정하게 말해서 짬처리 맞죠?’
[최초의 성녀: 짬처리가 뭔가요?]
‘잔반을 속된 말로 짬이라고 하는데. 그걸 갖다버리는 걸 말하는 거요.’
[개천의 시왕: 그렇군. 정상적인 혼인에 하자가 있는 이들을 이번 기회에 방출해 버리려는 모양이다. 덤으로 하필 그런 이들을 왕국의 제 2권력자에게 안겨줌으로써 왕국의 위신에 타격을 주려는 생각이겠지.]
제사장이야 물론 나와 시왕의 생각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는 듯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양측 모두 우리를 도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딱, 탁자를 손끝으로 한 번 두드렸다.
“누구를 어떻게 도발하고자 하는 걸까요?”
“예? 그야 물론 법왕님을….”
“제가, ‘이런 추물들을 나한테 보내다니 양국 모두 용서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할 거라고 말인가요?”
만약 그 정도 분석이라면, 1세대 식자층의 한계가 설정되는 건데.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 묻어났는지, 내 낯빛을 살피던 제사장은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러도록 두고 나는 저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의 성녀: 왕국의 위신에 타격을 준다, 인가요….]
[개천의 시왕: 그렇다. 너희 권력 서열 제2위는 기껏해야 이 정도에 어울린다, 는 뜻으로 말이지.]
[첫 번째 은월: 왜? 얼굴에 화상이 있어도 젖이랑 엉덩이에 문제가 없다면 애 낳고 키울 수는 있다는 거 아냐? 팔 하나 없다는 애 고르면 그야 애 키우기 불편할 수야 있을 텐데 너 시녀들 부릴 수 있는 위치고. 그러니 아무 문제도 없는 거 아님?]
그야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야리소연의 말이 옳았다.
혼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 ‘가문을 유지한다’는 대명제에 있어서 하자가 되는 이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비류아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를, 생각을 마친 제사장이 마침내 입에 담았다.
“왕국 내부의 강성파들을 흔들려는 거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강성파들은 이 혼인에 격하게 반발할 겁니다. 두 나라가 우리 왕국을 물 먹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혼인을 받아들이면요?”
“강성파들과 법왕님 사이에 골이 생기겠지요. 강성파들은 법왕님을 두고 입을 모아 사내새끼도 아니라고 욕할 겁니다.”
그럴 것이다.
“그 강성파라는 건 구체적으로 칭하자면 뭐지요?”
“꼰대들이죠.”
“더 구체적으로.”
“시우 님을 따르는 군권 세력입니다.”
제사장이 대답했다.
“잘 했어요.”
내 칭찬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인상을 찡그린 채 초상화를 번갈아보았다.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혼인 중 하나라도 받아들이게 되면, 꼰대들에게 ‘법왕 넌 왜 그 따위 추물을 안사람으로 받아들이느냐, 바깥 놈들에게 얕잡혀 보이고 다니느냐.’는 명분을 주게 되는 겁니까.”
“그 상황에서 시우 님이 저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법왕님께서 이끄시는 신관 세력과 시우 님이 이끄시는 군권 세력이 갈등을 일으키겠지요. 규모도 가진 힘도 비교가 안 되니 결국 군권 세력이 우위를 점할 것이고요.”
“반대로 시우 님이 저를 지지한다면요?”
“그 경우. 군권 세력이 쪼개지게 되겠습니다. …어느 쪽도 좋은 일은 아니군요.”
잊지 말자.
왕국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군주 비류아가 전권을 행사하던 전쟁 집단이었다. 당연히 군사 세력이 가장 많은 권력의 빵 덩어리를 지니고 있다.
[최초의 성녀: 그리고 가장 많은 권력의 빵 덩어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물리적으로도 가장 덩어리가 크다는 뜻이고, 덩어리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세력이 얽혀 있어서 그렇다… 였던가요?]
‘그렇소. 지난 임무에서 잠깐 설명했듯 모든 큰 덩어리는 결국 좀 더 작은 덩어리들의 결합체니까 말이오.’
시우가 일단 그 군사 세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앞서 말했듯 비류아를 대체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시우가 부지런히 왕국의 부(部)를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여지를 준다면 군사 세력은 분열할 것이다.
결론.
[개천의 시왕: 이건 도발이 맞다. 법왕 자신이 아니라 그 너머, 왕국의 국내 정치를 소요에 빠뜨리기 위한 도발이다.]
역시 들리지 않을 터이지만, 그런 비류아의 결론에 반박하듯 현실의 제사장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결혼 상대를 택하지 않기도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와 같다는 거지요, 제사장?”
“예. 우리는 나투아의 조선기술, 치수기술이 필요합니다. 나투아가 막고 있는 서해 뱃길이 필요합니다. 알실라의 채굴기술, 제련기술이 필요합니다. 알실라가 갖고 있는 태산 광산이 필요합니다.”
아기가 많은 젖과 세심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갓 건국된 왕국에는 그만큼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들 중 하나라도 얻기 위해 타진을 거듭해 온 결과, 양국에서 제시한 출구 전략이 바로 이 맞선이며, 또한 정략결혼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을 거부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양국이 제시한 출구 전략을 거부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양국 모두에게 좋은 빌미를 주게 됩니다. 비단 문호를 열지 않는 것뿐 아니라….”
말하다가 말고 똘똘이 제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대신 말했다.
“뭔가 좀 이상한 지점이 있죠?”
그렇지 않아도 바로 그 이상한 지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제사장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나는 굳이 그 이상한 지점을 풀어 설명해주었다.
구체적으로는 톡, 알실라 화로지킴이 맏딸의 초상화를 건드렸다.
“알실라는 이런 복잡한 전략을 쓰기에는 지나치게 쌈박한 것들이에요.”
“…예. 이 모든 암계는 나투아에 어울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이 짠 것처럼 이렇게 보내왔다는 건.”
“일단 하나. 짜지 않으면 말도 안 되기도 하죠. 한 쪽에 하자가 있고, 한 쪽에 하자가 없다? 당연히 하자가 없는 쪽을 고르면 되니까요. 뒷말도 나오지 않고, 왕국 정치계도 요동치지 않죠. 그리고 둘.”
“실제로 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턱을 매만졌다.
“나투아와 알실라는 수면 아래에서 이미 손을 잡고 있다는 거예요.”
“그 경우 결혼을 거부하게 되면, 그건 문호 개방을 거부하겠다는 의미를 넘어서….”
“예. 나투아와 알실라, 양국은 그것이야말로 왕국이 자신들을 모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겠지요.”
다시 말해.
“양국 모두에게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