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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62화 (62/261)

62. 자모신 2.0 패치 업데이트 (4)

“원수도 갚았구. 또 원수 놈들한테 끌려가 노예 살이 한 게 아니라 제대로 나처럼 살았구. 거기다가 지금 이렇게 니들이랑 노가리도 깔 수 있게 됐잖아? 그거면 되지 않아?”

천사는 말을 잃었다. 깊은 웅덩이가 물로 쉬이 메워지듯 고뇌는 단순함 앞에 스러지기 쉬운 것이다.

아리야도 조심스레 한 마디 보탰다.

“저도… 지금이 마음에 들어요. 어쨌든, 예언자님께서 현현해주신 덕택에, 그러니까 천사님과 예언자님이 지켜봐주신 덕분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고,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음. 나같은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만.”

비류아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렇게 월족이 강대해진 덕분에, 어머니가 속한 부족이 그 말발굽에 짓밟혔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나였으니 말이다.”

“아, 그… 죄, 죄송하네요 뭔가….”

월족 강화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허둥거렸다.

“전적인…? 계명 날조를 생각하면 당신의 책임이 7할 이상 아닙니까?”

천사님은 사람 속마음 좀 멋대로 읽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천사님의 딴지야 어쨌건, 비류아는 아리야에게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수백 년 후의 미래를 예상하고 행동하라는 게 무리한 노릇이다. 그리고 어차피 어머니가 속한 부족은 시대 정황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했으니, 어차피 대륙의 군세에든 야만족의 군세에든 짓밟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월족이 되었을 뿐이라고 잘라 말한 비류아는 천사를 향해 돌렸다.

“하여 나 역시, 그대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비참한 꼴을 당했겠지. 주온이 권좌에 올랐을 테니까. 그 뿐인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의욕을 잃고 있을 때에도 그대들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죄책감과 좌절감 속에서 표표히 죽어갔을 것이다.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

“그것은,”

천사는 잠시 숨을 멎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만큼은, 자모신께서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생각이로군요.”

그것은 언젠가 천사 본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비류아는 아마 이번에 처음 들었겠지만, 드물게도 살짝 웃으며 답했다.

“나야 그대가 모시는 자모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이적을 가능케 하는 존재인 만큼 범상친 않겠지.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범상치 않은 존재를 모시는 자이니 그 뜻에 충실히 따르고자 할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왕국을 건국한 시왕의 입가에는 여전히 연상케 하는 은은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대와 그대가 보낸 사도 덕분에, 비참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충만감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아아.”

“그대는 그대가 모시는 신의 뜻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행하고 있다. 내 삶이 그것을 증명하니, 가슴을 펴고 자신을 가져라.”

천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다시 내쉬었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한참이 지난 뒤에 그 고개를 들었다.

“음.”

천사는 자신의 가슴에 한 손을 올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많이도 했었습니다만.”

하필 그 말을 하는 시점에 왜 나를 흘겨보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천사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의 허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잊을 수 있게 됐습니다, 비류아. …그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시인가. 그대도 참 생각이 많군.”

“그렇습니다….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도 될 것은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천사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로다.”

비류아는 웃었다. 어차피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란 그것뿐인지도 모르겠다만, 하고 덧붙이고서.

그렇게 천사와 일별한 비류아가 나를 돌아보았다.

“하여? 궁금한 것은 그게 전부인가?”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류아 님께는요. 거꾸로 이제는 천사님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나는 천사를 바라보면서 임무 창을 띄웠다.

+

<역사변이점>

[ 호랑이 부족의 습격 ]

- 완료! (★★★)

[ 눈물 젖은 피난길 ]

- 완료! (★★+☆)

[ 평원의 나라, 산의 나라 ]

- 완료! (★★★)

[ 개천開天 ]

- 완료! (★★★)

+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임무 창과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

<역사변이점>

- 건국 15년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삼국 협상 / 난이도 B ]

[ 맞선 / 난이도 B ]

+

지금까지와 달리 시기가 먼저 표시되었고, 그 다음에 임무명과 난이도가 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임무명과 시기 역시 어렴풋이 뜨던 이전과 달리 오직 다음 임무만 떠있는 상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직 다음 임무만’ 떠있는 것은 아니었다.

+

<역사변이점>

[ 충신 ]

- 멸망 이후. 난이도: SSS

+

맨 마지막 칸.

그 곳에는, 처음 내가 저승에 왔을 때 보았던 임무가 떡하니 놓여 있었으니까.

“천사님. 궁금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나는 천사를 바라보았다.

“먼저, 이전에 말씀하시기로 주요 임무는 천사님께서 고르신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인지 야리소연 임무 때에도, 아리야 임무 때에도 임무가 실패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그래서 왕국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세하게 알려 주셨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첫 번째 비류아 임무 초반부에도 유지되었다. 당시 월족의 군주, 즉 비류아의 아비가 죽게 되리란 사실을 천사는 꿰뚫어본 것처럼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번 임무부터는 그런 식의 명확함을 잃어버리셨지요. 논리와 추론에 의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장 개천 임무 시작 당시 내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 또한, 천사는 결정된 사실을 말한다기보다는 생각하여 추리한 결과물을 입에 담지 않았던가.

“심지어 지금 임무도 그렇습니다. 결정된 흐름이 아니라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눈앞의 임무’만 보이는 상황이 되었지요.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의문이군요. 두 번째 의문은 뭡니까?”

“두 번째 의문은 사실 좀 된 건데요. 결국 비류아가 시조가 됐다는 겁니다.”

내가 선택한 결과이긴 하지만, 주온이 아닌 비류아가 시조가 되었다.

개천식까지 그녀가 행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저승에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제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구르고 있는 것. 둘 모두 ‘시조와 자모신 사이의 계약 때문’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왕국의 시조였던 주온이 불운한 사고로 그만 명을 달리하고만 상황에서 계약이 유지되고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해져서요.”

“일단 간신이여. 한 가지 확실히 해둡시다. 주온 왕자는 당신이 죽인 겁니다. 도끼로 머리를 상큼하게 깨부숴서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 끝이 없을 것 같네요. 자잘한 건 넘어 갑시다 좀. 아무튼 계약자가 계약을 맺기도 전에 죽었는데 계약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게 제 두 번째 의문입니다.”

자잘한 것… 이라 되뇌며 어쩐지 식은 죽 같은 온도의 눈빛으로 나를 보던 천사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타당한 의문입니다만….”

마치 온몸으로 내쉬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면사포는 물론 온몸에 덮고 있던 천까지 함께 물결치듯 움직였다.

“간신이여. 먼저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종교와 계명 문제부터 시작하여 그대가 역사에 일으킨 변혁이 너무도 큰 나머지, 정해진 커다란 선로를 완전하게 일탈해버리고 말았다고.”

내가 해 온 행위들의 누적된 결과.

“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야리소연 시대 소규모 부락은 쉬이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지만, 아리야 시대의 규모가 커진 부족은 그보다 감을 잡기 어려웠으며, 비류아 시대에 이르면 그 규모가 너무도 커져서 어디로 튈지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노라고.”

월족이 부족을 넘어 국가(國家)가 된 까닭.

“혹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그래서 지금 저승이 한 단계 넓어졌듯 자모신의 신력이 들어찬 결과, 보다 많은 미래의 갈래가 열린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신의 이적과 그에 대한 무지.

“모두가 그럴 듯하여 취하기 쉬운 대답들이지요.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간신이여?”

“글쎄요. 세 번째 대답을 빼면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못 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세 번째 대답도 사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완전한 답은 못 되는 것 같고요.”

나의 대답에 천사의 면사포가 다시금 흔들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했지만, 쓴웃음을 지은 것이리라고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두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 역시 될 수 있는 답변을 원하시겠군요.”

“가능하다면요.”

“아,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기도 하겠지요.”

다만, 이라고 천사는 서설을 달았다.

“당신은 그 대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천사의 시선은, 중간의 모든 임무들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마지막 임무, [충신]에 못 박혀 있었다.

“어떤 뜻입니까, 천사님?”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면서 물었다.

하지만 천사는 잠시간 정적을 사이에 둔 채 그저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간신이여. 방금 그 의문에 대해서도, 그리고 앞서 제기한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도, 결국은 제가 앞서 했던 말로 갈음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앞서 하신 말씀이라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곧 대답할 수 없다, 아니,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과연 천사는 더 이상 내 질문에 대한 언급 없이 다음 임무 창을 가리켰다.

“임무를 수행하십시오, 간신이여.”

그리하면, 이라고 천사는 이어서 말했다.

“다음 임무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것을 수행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면, 이라고 천사는 이어서 말한 뒤.

“그렇게 하면 자연히 해답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천사의 손가락은, 저주처럼 붉게 각인된 마지막 임무 [충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음.

뭐, 좋다.

“대충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지요, 해오던 일을 하겠습니다.”

“예. 믿음직스러운 조언자도 둘이나 새롭게 들어왔으니까요.”

“비류아 여왕이라면 모를까, 저 야만인 야리소연을 믿음직스러운 조언자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가는 이야기에 도토리 갉아먹는 다람쥐 같은 얼굴로 얌전히 있던 야리소연이 그 말에 눈을 부라렸다.

“아앙?! 나한테 뭐 불만이라도 있냐?!”

야만인 아니랄까봐 곧바로 폭력에 의존하려는 모습이었지만,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야. 솔직히 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어… 사냥하는 건 자신 있거든?! 활 쏘는 것도! 그리고 애 낳고 키우기도 잘 하고….”

“돌겠네….”

아니, 돌다 못해 해탈해버리겠다.

아리야가 헛기침을 했다.

“음, 예언자님. 일단 입주자가 들어왔다는 건, 그 입주자를 배치시켜서 건물의 효과를 높일 수 있게 됐다는 뜻이잖아요.”

“그대가 신전을 맡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

“네…. 그러니까 음, 야리소연도 건물에 잘 배치하면 그만한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요? 어떤 건물에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아니, 아리야.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르겠다고 말하면 나도 곤란하오만…. 알겠소. 어딘가에는 쓸 곳이 있겠지.”

“지금 오가는 이야기 어째 되게 기분 나쁘다.”

야리소연이 투덜거렸지만 무시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천사님. 이번 임무 보상은 언제 나옵니까?”

그렇게 말을 꺼내자마자 였다.

마치 바로 이 순간, 이야기가 모두 정리되는 시점을 기다렸던 것처럼, 망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승을 보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보상이 될 건물을 짓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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