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자모신 2.0 패치 업데이트 (3)
방금 오간 이야기는 우리들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야리소연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쳇. 나야 뭐 배워먹은 게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겠네. 그러니까 가리비수 니가 최대한, 뭐라 그러나… 가리비수일 때 가리비수처럼 굴지 않는 게 필요하다 이거지?”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야도 한 마디 보탰다.
“그러게요…. 예언자님께서 항상 가치중립적이려면, 저희부터 예언자님과 좀 거리를 두는 것이 낫겠어요.”
비류아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역시 호칭과 어조, 태도부터 바꾸는 게 맞겠군. 어떤 식으로 할지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우리 셋 모두 그대에게 빚을 지고 있는 터이니.”
그리고 세 은월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음.
“글쎄요….”
나는 팔짱을 끼었다.
“우선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게 있는 것 같네요.”
“어떤 겁니까, 간신이여?”
“요컨대 임무에서 제가 활약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제’가 ‘저’라서. 다시 말해 ‘이방인’이라서 그렇다는 거잖습니까?”
“정확한 고찰입니다.”
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리비수가 아니기에, 가리비수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서아가 아니기에, 모서아가 결코 못할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노예 소년이 아니기에, 그가 내리지 못할 판단을 쏟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일탈’이 ‘변혁’을 낳아, 그것이 커다란 역사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요, 천사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임무 속에 들어간 제가 그렇게 ‘이방인’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거꾸로 말해 ‘돌아올 고향’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승의 왕국.
“적어도 왕국을 살려내서 이 모든 임무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는 말이죠.”
그때까지는 여기가 그 고향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거다.
마음의 닻.
내가 속한 곳은 여기이므로, 임무에서 누구에게 빙의를 하든, 그 빙의체가 이전에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취급을 받았든, 그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지.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사님은 물론 입주자 여러분들께서도 ‘고향의 주민’ 역할을 맡아주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요.”
그렇게 말한 나는 입주자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았다.
셋 모두 은월의 눈동자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각자가 판이하게 달랐다.
“야리소연. 난 너한테 반말을 할 거야. 가리비수 임무 때 그랬던 것처럼 편하게 대할 거니까 너도 그렇게 해라.”
야리소연의 눈동자는 여러 차례 언급했듯 고양이과 맹수를 닮았다. 샛노란 만월 한복판에 굵고 동그란 흑점(黑点)이 박혀 있었다. 무릇 둥근 공은 이리저리 거리낌 없이 튕겨 다닐 수 있는 만큼, 그녀의 성정과도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야리소연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응. 역시 어려운 이야기는 잘 못 알아듣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처럼 서로 막 대하자 이거지?”
“그거지. 그때도 말했지만 명가에서 태어난 이 몸이 너같은 야만족이랑 편히 대하다니. 이건 진짜 완전 엄청난 특혜라는 거 꼭 명심하고.”
“하나 확실히 해두자. 막 대하자는 건 그런 개소리 지껄일 때마다 이래도 된다는 뜻이라는 거!”
그리고 야리소연은 ‘이래도 된다는 뜻’이 뭔지 보여주었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날랜 손놀림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친 거다!
이런 미친!
“뭔 개짓거리 하는 거야 임마!”
“개소리 하길래 개짓거리 했다 왜. 꼽냐?”
“미친 야만족 같으니라고….”
내 고귀하신 지능에 타격을 입었을까 겁이 난다.
어찌 됐건.
나는 아리야를 돌아보았다.
“아리야. 그대에게도 계속해서 반 공대를 하겠소. 모서아 임무 때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대할 터이니 그대도 지금까지처럼 대해주시오.”
아리야의 눈동자는 ‘현망간의 달’이라고 할 수 있다. 만월과 반월 사이에 놓여 순한 인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풍파에 깎여나간 자국이라고 할까, 그녀가 이따금 드러내는 고통의 흉터처럼도 느껴졌다.
아리야가 입가를 가린 채 미소 지었다.
“네, 예언자님. 그렇게 할게요.”
“음. 이야기가 빨라 좋구료.”
“역시 오래 지내온 덕분 아닐까요?”
“합리적인 추론임을 인정하오.”
역시 아리야는 대하기가 편하다. 말마따나 오래 호흡을 맞춰온 덕을 보는 것이다.
“흠.”
비류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는 어찌 대할 셈인가?”
비류아의 눈동자는 완전히 반달이었다. 늘 눈을 반개하고 있어 그 안의 눈동자도 절반만 드러나니 그리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진심을 드러낼 곳 없이 살아와 차분함으로 몸을 감싸고 냉정함으로 얼굴을 가려야했던 그녀와 어울리는 무표정한 눈빛이었다.
“그게 조금 고민이긴 했는데.”
나는 정리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시왕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대하고 싶으십니까?”
“음.”
“제가 제사장이고 시왕님께서 공주님이실 무렵에는 아버지를 대신할 어른으로 여기셨지요? 제가 법왕이고 시왕님께서 족장님이실 무렵에는 쓸 만한 길잡이로 여기셨고요.”
“둘 중 무엇이 그대의 본모습인가?”
“어느 쪽이든 저입니다. 공주님이던 시절에도 족장님이던 시절에도 당신이 당신이었던 것처럼요.”
“그러한가.”
살짝 웃은 비류아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타협해서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로 여기도록 하지.”
“말투는 지금 쓰시는 그대로?”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의지하고 싶을 때는 존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지시할 때에는 지금처럼 말하지.”
“참 시왕님께만 적절한 타협점이네요.”
“불만이라도?”
“아뇨 뭐. 괜찮습니다.”
하긴, 그녀는 이 중에서 가장 정치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임무에서 날 여러 차례 물 먹였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교통 정리는 이 정도로 끝내고.”
그런 인물에게, 나는 물어봐야 할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시왕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 ◈
“먼저 여쭈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개천식 뒤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아이가 태어났다. 시우가 제법 애를 써야 했지만 어떻게든 되더군.”
비류아는 담담히 대답하면서 팔짱을 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그대의 예언 덕분인지 그 아이 역시 은월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적법한 후계자가 태어난 셈이니까요. 사내 아이였습니까, 여자 아이였습니까?”
“사내 아이였다.”
“그것도 다행이군요.”
야리소연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왜 다행이야? 남자애면 다치거나 죽을 일도 많잖아.”
“씨 뿌리고 다닐 수 있으니까 다행이란 거야. 처첩도 좀 편하게 둘 수 있고. 왕가를 유지하고 왕국을 경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남자인 게 낫지.”
야리소연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설명 수준을 좀 낮추어야겠군.
“야리소연. 가리비수랑 둘이서도 살 수 있지만, 애 생기면 힘들다고 네가 그랬었지?”
“응. 그랬었지.”
“그거랑 똑같아. 뱃속에 애를 담고 국가 경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너만 해도, 결국 너랑 가리비수랑 공동 촌장이 됐었지? 근데 네가 애 가졌을 때 누가 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었냐?”
“아항.”
야리소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애는 계속 가져야 하는데 일도 계속 해야 하고. 그러니까 그냥 남자인 편이 낫다 이 소리지? 남자는 임신 안 하니까 항상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또 여럿한테 동시에 씨 뿌려서 애기들 여럿 얻을 수 있기도 하니까는.”
이 야만족이랑 대화하다보면 정말이지 내가 다 얼굴이 벌게지지만, 이번만큼은 정확한 이해였다.
왕이 하는 일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결국 그런 것이다.
“여왕도 남첩을 여럿 둘 수 있지만, 임신과 출산은 결국 여왕 혼자서 해야 하지. 그 동안 국정이랑 권력에 공백이 생기게 돼.”
“실제로 그러했다. 나같은 경우는 노산(老産)이라 특히 힘들기도 했지.”
비류아의 말이었다. 경험담이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는 아리야도 폭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뱃속에 애 담고 일하는 거 진짜 엄청 힘들었어요…. 으으. 그래도 이주가 끝나고 나서 임신해서 망정이지, 만약 그 전에 임신하거나 했으면 진짜 끔찍했을 거예요.”
“그렇소. 그러니 군주가 남자라는 건 다행한 점이오. 물론 군주가 남자여서 생기는 문제도 또 있지만 말이오.”
“내 아비처럼 말이지.”
비류아가 한숨을 지으면서 공감했다. 나도 동의했다.
“처첩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권력 판도를 쑥밭으로 만들거나, 너무 많은 후손을 만들어 후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거나, 정작 선택한 후계자가 남의 애라거나….”
특히 세 번째 같은 경우가 대륙이나 섬에 많았다고 한다. 왕국의 귀족가들 중에도 잊힐 만하면 터지는 일이었고.
“그래도 월족의 지도층… 아니. 이제 왕국의 왕가라고 해야겠네요. 그건 좀 사정이 나은 편이긴 하겠어요.”
아리야가 조심스레 꺼낸 말에 비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월의 눈동자라는 명백한 특성이 있는 이상, 남의 씨앗이 권좌를 차지하는 일은 예방할 수 있으니 말이지.”
“근데 그 은월의 눈동자라는 거 잘 안 태어나잖아? 나도 가리비수랑 많은 애기 낳았지만 그 중에 서넛 정도밖에 없었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야리소연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치. 그건 왕국의 왕가가 갖는 고질적인 문제고 말야.”
고질적인 문제답게 왕국이 망하기 직전까지 계속 이어지는 문제였다.
“정말, 세력을 유지한다는 건 쉬운 게 하나 없네요….”
아리야가 어깨를 떨군 게 정말이지 틀린 것 하나 없다.
가문을 이어간다는 건 어마무시하게 어려운 일인 거다!
“근데 뭔가 좀… 그렇군요.”
모두가 고뇌 어린 침묵에 빠진 가운데, 천사님이 혼자 목소리를 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왕가에 태어난 남자는 씨내리에 지나지 않고 여자는 또 씨받이에 불과하다는 것 아닙니까. 뭔가 좀 낭만적인… 아니, 낭만은 접어두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거나 하는 관점은 없는 겁니까?”
드물게도 비류아가 난색을 표했다.
“아니, 그야 나도 시우를 총애했다. 인간으로서 존중했고 연인으로서 애정 했지. 그로 인해 갖게 된 아기 역시 안았을 때 무척이나 행복했다. 온몸에 새겨진 흉터에 따스하게 새살이 차오르는 감각이었지.”
“그런데 여기 오니 관점이 달라졌습니까….”
“그것도 있을 것이다. 좀 초탈한 눈으로 보게 된 셈이지.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 왕가의 존속과 유지를 주안으로 놓고 논한다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담담하군요.”
“자명한 일이니까. 결국 가문이란 인간을 사육하기 위한 목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왕의 말에는 그에 어울리는 무게가 있었다.
천사가 면사포가 흔들릴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왕가가 왕국의 중심축…. 나라를 살린다는 것은 그런 왕가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 이렇게 현실이 날비린내를 풍길 때마다 느끼고는 합니다.”
음.
뭘 느끼는지 알 것 같다.
“지난 임무 때 잠깐 이야기가 오갔던 그것 말입니까?”
천사는 면사포 너머로 한동안 날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라를 살린다는 게 이런 의미라면, 이 모든 것에 결국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대로 좋은가 하는 것 말입니다.”
조금 전 시왕의 말이 무게감이 있어 묵직했다면, 천사의 말은 허탈감에 젖어 공허했다.
누구도 손쉽게 입을 열지 못할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쉽게도 입을 연 것은 야리소연이었다.
“난 이대로가 좋은데?”
양반다리한 그대로 편히 허리를 젖혀 저승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야리소연은 말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