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개천식 (3)
그리하여 나투아의 상주와 나 사이에 오간 대화들은 다음과 같았다.
“죄송합니다, 월족의 법왕님. 달의 여신께 선택받았다는 고강한 월족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 그래서 월족 니네가 미개하다는 거 인정?
“아무렴요. 뻗어있는 물길을 제 길처럼 다니시는 나투아의 상주님께서도 모르시는 게 있을 수 있지요. 옛말에 이르길 무지란 죄가 아니라 하였으니, 제가 어찌 그것을 탓할 수 있겠나요?”
- 아니. 나투아 니네가 무식하다는 걸 인정.
“어허허… 이거 참. 탓하지 않으신다니, 이 장사치도 마음을 놓았습니다.”
- 이 개자식 좀 보게?
“경사 중에 찾아주신 벗님이신 걸요. 뭍에 살던 이가 배를 타면 멀미를 하듯이, 배에 살던 이가 뭍에 오르면 몸이 편치 않다 들었어요. 마음이라도 놓으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예(禮)라 하겠지요.”
- 좀이 아니라 마음껏 보려므나, 이 깜생아.
나도 상주도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와 상주 뒤에 서있는 이들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상주 뒤편에 자리 잡은 나투아 사절단은 꿈틀거리는 얼굴 근육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말빨로 밀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내 뒤편에 자리 잡은 쪼무래기 신관들과 친위대원들은… 음, 그나마 신관들은 어찌어찌 따라오는 것 같은데 친위대원들은 머릿속으로 양을 세고 있는 것이 뻔히 느껴졌다.
‘하여간 그 제사장 놈 때문에 진짜….’
[그 제사장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간신이여.]
나는 천사의 말에 반박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말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때마침 상주가 고개를 수그렸던 탓이다.
“음, 법왕님. 하오면 어찌하면 좋을는지. 오늘 이렇게 성대한 예식을 여시었고, 또한 예를 말씀하시는 걸 보면, 예물을 거부하는 것 역시 예(禮)에 어긋나는 행위임에 인식을 같이하실 터인데….”
- 다시 가져가라고 할 건 아니잖아? 니들이 아무리 마적 떼 새끼들이라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냐?
“어라, 물론이어요. 그런 일을 해서야 우정에 금이 가게 마련이죠. 그러기에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드리고 싶사와요.”
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월족에는 상주님께서 가져오신 해웅님의 성의를 관리할 여력이 없다지만, 상주님께서 데려오신 이들 중에는 그만한 여력을 갖춘 분이 계시지 않을는지요? 그분을 빈객으로 받아들일 여력이 우리 월족에게는 존재한답니다.”
소매 자락처럼 투실투실하게도 늘어진 상주의 볼이 마침내 일그러졌다.
천사가 감탄했다.
[볼모를 잡겠다는 겁니까?]
‘에이. 천사님도.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볼모가 뭡니까, 볼모가. 그냥 대사관 하나 만들어서 대사 한 명 두자는 소리지. 나투아와 월족 사이의 친애를 위해서요.’
물론 이 시대에 대사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 실상은 천사의 말마따나 볼모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두 분의 백년해로를, 그리고 월족과 나투아의 영원한 우애를 위해 가져와주셨다는 예물들이라고 하셨지요?”
- 관리 제대로 안 되기만 해봐.
“잘 돌봐주실 분을 빈객으로 보내주실 것이라 믿어요.”
- 산호 말라붙는 순간 니들이 보낸 빈객 명줄도 말라붙는다.
정적이 예식장을 얼게 했다.
◈ ◈ ◈
나투아의 상주는 소매를 겹친 채 말이 없었다. 조그마한 눈동자가 더 이상의 웃음기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 시점에서, 내가 볼 때, 상주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산호와 진주를 관리할 만한 기술자들은 나투아에도 드문 터라 어렵겠다고 말하는 것.’
당연하지만 말도 안 되지.
우릴 엿 먹이려 작정했다는 걸 실토하는 꼴이거든.
‘그러니 또 하나는, 이유는 밝히지 않고 아무튼 좀 어렵겠다고 물러나는 것.’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이런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궁금해 합니다.]]
‘말이란 허물을 갓 벗은 뱀 같은 거라 빠져나가려면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 있소. 단적으로 선물이란 받은 자의 책임이니 알아서 간수하는 게 도리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 만약 내가 없이 평소의 월족들만 있는 자리였다면 백방 그런 말을 꺼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그랬다간 ‘도리를 다할 수 없는 이 쪽으로서는 돌려보낼 수밖에 없겠네요’라는 식으로 곧장 외통수를 쳐버릴 거거든.
[그랬다간 정말로 그냥 돌아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에 뭐, 떠먹여주려고 해도 수저 째 뱉어내고 앉아계시네.’하면서 침 뱉고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죠.’
나는 한 쪽을 흘끗했다.
‘이 자리에 나투아랑 월족만 있었다면 말이에요.”
알실라.
온몸을 천으로 감싼 장인들은 지금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예식장 한 켠에 서 있었다.
과묵함은 흔히 진중함으로 해석된다. 산맥의 허리를 파내어 그 뼈와 살을 취하고 그것을 녹여 무기와 도구로 만드는 이들이 진중하지 않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런 이들이, 삼국의 한 축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런 식으로 나올 수는 없어요. 체면이 장난 아니게 깎일 거거든.’
이게 삼파전의 꽃이지.
먼저 밀리는 쪽이 독박을 쓰거든.
[그래도 일이 그렇게 되면 월족의 체면 역시 깎이지 않겠습니까?]
천사는 여전히 걱정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투아의 손해가 훨씬 더 커요.’
[어째서입니까?]
‘월족은 전사고, 쟤넨 장사치니까요.’
그리고 내게는 그 장사치들의 평판에 제대로 흠집을 내줄 자신이 있었다.
내게 그 정도 말빨이 있다는 걸 상주도 이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란 실상 하나밖에 없었다.
“으음.”
빠르게 안색을 다잡은 상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씀하신 바가 이치에 어긋남이 없군요. 알겠습니다. 예물을 관리할 만한 이를 곧바로 수배하여 월족 안에 머무르도록 조처하겠습니다.”
[오호. 바로 받아들이는군요?]
‘예. 뭐, 이게 사실 나투아 측에 있어서도 아주 나쁜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거든요.’
월족 안에 산호와 진주를 관리할 수 있을 만한 기술자를 빈객으로 보낸다.
이것은 ‘볼모를 잡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당하게 간자(間者)를 심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서.
“다만 법왕님께서 염려해 주셨던 것처럼, 배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던 이가 뭍에 있다 보면 여러모로 심로(心勞)을 앓게 마련입니다. 관리자를 정기적으로 교대하여도 괜찮을지, 또 위로하기 위해 관리자의 벗들을 보내도 괜찮을지 여쭙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분명한 명분하에 인적 교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공식적인 상로(商路)가 열리는 것이다.
‘이 자식 제법이네.’
어느 부분이 제법인가하면, 날 제대로 판단했다는 부분이 제법이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의아해합니다.]]
‘시우와 친위대원들의 표정을 보시오. 곧장 알게 될 거요.’
그들은 표정이 썩어 있었다.
입단속을 해놨기에 만족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대뜸 ‘우리 월족이 손님을 소홀히 모실 거란 뜻이냐.’하고 일갈하지 않았을까.
‘사실 지금까지 월족의 인상은 그런 거였겠지.’
지난 30년 동안은 특히 더 심했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다.
[누구 덕분에 말이지요.]
천사님의 그런 소수 의견이야 어쨌건, 시우는 나투아를 상대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붕어 가시 씹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었는데, 사실 나투아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도저히 정상적인 거래가 불가능한 깡패 집단.’
그게 나투아가 가진 월족의 이미지였을 테고.
‘이제야 좀 대화가 통하는 녀석이 나타났다.’
이게 상주가 나에 대해 내린 판단일 것이다.
그리고 상황 판단력이 쓸 만한 개자식을 나는 좋아하는 편이었다.
“알겠사와요.”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신전 옆에 빈 저택이 하나 있어요. 그 곳에 빈객이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지요. 규모가 조금 큰 건물인 터라 빈객을 위무하기 위한 사람들이 온다 해도 충분히 수용 가능할 거여요.”
참고로 그 빈 저택의 정체는 30년 전 제사장이 쓰던 사가(私家)인데, 지금은 당연히 월족의 재산으로 적몰된 상태다.
따라서 그 저택을 대사관 비슷한 것으로 차출하기 위해서는 비류아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이건 비류아 쪽으로 눈짓 한 번 보내니 바로 승인이 떨어졌다.
‘절대권력이 좋긴 좋아.’
그런 만큼 바로 다음 세대가 걱정이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좋으니까 됐다.
나투아의 상주가 다시금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월족의 배려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상주는 몇 마디를 더 떠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느니, 두 부족의 우애가 다시없이 깊어질 것이라느니 하는 식의 동어반복이어서 나도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다만 마지막에 가서, 상주는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깔았다.
“그, 월족의 법왕님.”
“예, 상주님?”
“오늘은 이토록 경사스러운 자리이고, 또 이렇게 양 부족 간에도 경사가 있게 되었으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아, 네. 편히 말씀하시어요.”
상주는 크흠, 목을 가다듬더니 그 말에 따랐다.
“비단 법왕님뿐 아니라 큰 기수님과 족장님께도 드려야 마땅한 말씀입니다만은, 이 예물들을 준비한 것은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달의 여신의 가호를 받는 귀부족께 드릴 예물을 당일에 닥쳐 고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나이까.”
흐음.
“그렇듯 산호와 진주가 선택된 것도 한참 전의 일이나이다. 양해해주소서.”
뭔 소린지 알겠군.
[같이 알지요, 간신이여.]
[[최초의 성녀 아리야도 궁금해합니다.]]
‘음. 비류아는 알아들은 표정인데…. 정리하자면 이런 소리예요.’
- 결혼상대로 우리 왕자님을 낀 사절단 보냈을 무렵에 이미 골라놨던 선물임.
- 일부러 댁들 엿 먹이기 위해 급하게 고른 거라고 오해하면 싫어요.
[과연. ‘우리 왕자님을 남편으로 골랐으면 관리 인력도 당연히 보내줬을 것’이라는 뜻이군요.]
‘네. 거꾸로 말하면 ‘우리 왕자님 안 골랐다면 바로 엿 먹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그런 말을 지금 꺼내는 상주의 진의를 궁금해 합니다.]]
‘딱 두 가지일 거요.’
첫째. 월족과 정략결혼하지 못한 게 아쉽다.
둘째. 이만큼 속내를 깠으니까, 앞으로는 좀 잘 지내보자.
‘다시 말해서.’
[일종의 항복 선언이군요.]
그렇다.
“앞으로 잘 해보도록 해요, 상주님.”
내가 방긋 웃으면서 손을 내민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예, 법왕님.”
나투아의 상주는 일부러 소매를 거두어 드러낸 맨손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빙긋 마주 웃었다.
나투아와의 외교 담판에서 판정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
<역사변이점>
[ 개천(開天) ]
일시: 건국 0년
제한시간: 30일
(잔여시간: 2시간 0분)
+
그렇게 나투아를 정리하자마자, 내내 침묵하던 이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 또한 그대들의 경사를 감축하오.”
알실라의 대표자였다. 입가가 천으로 가려져 한 차례 걸러 나온 목소리가 신전 안을 부옇게 메웠다.
“월족이여. 그대들과는 큰 싸움만 열두 번을 치렀지. 그 중에서 여섯 번을 이기고 여섯 번을 패했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시우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 나투아 그 뱃놈들이 강 너머에 있다면 알실라 그 땅지렁이 새끼들은 산 건너에 있거든. 산맥이 너무 험해서 말들이 넘어가기 어려워. 우리는 기병이 주력이니 거기서 말이 한 차례 묶이는 거지. 반면에 그 놈들도 내려오질 못해. 그랬다간 뒈진다는 걸 아니까.
그러기에 둘 간에 벌어진 전쟁은 주로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말에서 내려온 월족 전사들이 산맥을 타고 올라 중턱에 놓인 산성을 포위한다. 야음을 틈타 산성을 빠져나온 알실라의 병사들이 은밀하게 월족 전사들을 사냥한다.
이렇게 야금야금 피해가 누적되다보면 빡친 월족 전사들이 산에다 대고 불을 질러버린다.
알실라의 장인들은 이 시대에서 가장 뜨거운 불을 다루는 자들이다. 치수(治水)라는 개념이 있다면 치화(治火)라는 개념도 있는 법. 그 개념에 따라 지어진 터라 산성이 화공에 함락당하지는 않지만, 알실라를 빡돌게 만들기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에 알실라는 문외불출품인 무구들을 나투아를 경유하여 월족의 적들에게 넘겨 후방을 찌르고, 회군하는 월족을 뒤쫓아 베는 것으로 그 빡침을 해소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알실라 군 또한 산성에서 내려왔다는 의미였고, 뒤로 갈수록 월족은 회군하는 척하다가 우월한 기병 전력을 몰아쳐 그런 알실라 군을 잡아먹는 식으로 재미를 보곤 했다.
한 마디로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알실라의 대표자가 월족의 법왕인 내게 말했다.
“월족이 앞으로 어떤 길을 나아가려 하는지 들어보고 싶소.”
외교 담판 2차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