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개천식 (1)
책을 넘기다 보면 흔히 이런 문장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웅장한 금자탑이 지어졌다.’
귀족으로 태어나 곱게 자란 나는 금자탑이 지어졌다는 문장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직접 돌을 날라보기 전까진 그랬다는 거겠지요.]
‘예, 천사님. 직접 돌을 날라보니 같은 문장을 봐도 ‘웅장한 금자탑’보다는 ‘마침내’랑 ‘지어졌다’ 쪽에 눈길이 가게 되더군요.’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궁금할 텐데, 별 건 없다.
저 금자탑 어쩌고 하는 문장을 다음과 같이 치환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하여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번에도 ‘성대한 결혼식’보다 ‘그리하여’와 ‘열렸다’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내 신세라는 정도겠다.
“아니요. 그건 거기에 두지 마시어요!”
“잠깐, 그 조각상은 저쪽이어요! 아, 그리고 칼. 예, 나무 칼 하나를 조각해서 들려주세요!”
“이 양탄자, 길이가 맞지 않사와요! 손재주 있는 분들 모아주세요!”
“요리! 요리들은 어떻게 됐나요?! 잠깐, 이 요리는 예식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탕.
그 속에서 나는 진하게도 육수를 착즙당하는 중이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결혼식 준비가 왜 이리 부산스러운 것인지, 그로 인해 왜 이렇게 예언자님께서 고생을 사서 하시는지 의아해합니다.]]
‘원래 결혼식이란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이지 않소. 그 왜 관혼상제라고 해서….’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계곡물 한 사발 떠놓고 절 주고 받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아, 과연.
시대가 다르지 참….
‘아리야. 그건 진짜 옛날 옛적 이야기고….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라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혼인식을 계기로 ‘그런 시기’가 아니게 되어야만 했다.
‘심지어 이 혼인은 한 가지 역할을 더 겸하고 있지 않소이까.’
즉위식.
건국과 칭왕(稱王) 의식을 함께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자면 최대한 화려하고 웅장해야한다오.’
그리고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 월족에 나밖에 없었다.
‘학자가 없어….’
시대의 한계가 이번에는 내 발목을 잡은 것이다. 덕분에 내가 빙의한 소년의 몸은 앓아눕기 직전이었다.
시우가 나한테 어깨들, 그러니까 친위대원 몇몇을 붙여주긴 했고, 신전에서 그나마 대가리 굴릴 줄 아는 애들을 뽑아 부리고 있었지만, 도저히 이 비실비실한 소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이 아니었다.
[그 또한 당신의 업보입니다, 간신이여. 신전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더라면--]
‘예예. 학자의 부재를 신전이 어떻게든 메꿨을 거라 이거죠. 근데 신전 꼬라지가 지금 짓밟힌 게 껍질이라 이거고요.’
그리고 신전이 그 꼴이 된 건 내가 30년 전에 그 난리를 쳐놨기 때문이라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어쩐지 흥겨운 어조로 천사는 말했다.
[잘 아는군요. 이제 개처럼 구르십시오.]
‘넹.’
그렇게 나는 짓밟힌 게 껍질 속에서 굴러다녔다.
“예복은 좀 더 이런 느낌으로 만들어주시어요. 예. 비류아 님께 걸맞도록, 검은 연꽃을 닮은 느낌으로….”
혼례를 준비하랴,
“음, 아니요. 시초의 은월, 천사 야리소연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좀 더 날카로운 인상으로….”
영웅 조각상 만들랴,
“달빛 없는 밤에 활을 들고 다니지 말라. 그 관습이 왜 생겼는진 대충 알겠어요. 여러분 씨족은 월족 이 들어오기 전까지 활잡이들이었죠. 달빛이 안 비친다는 건 구름이 끼었다는 거고, 구름이 끼었다는 건 습도가 높다는… 습도가 뭔지도 모르죠? 음, 그러니까 활이 물먹는 걸 방지하기 위한 생활의 지혜가 관습으로 굳어진 거잖아요.
근데 지금 상황이 그 때랑 같아요? 활 몇 개 관리 못했다고 씨족이 굶어죽고 이런 시대는 지났잖아요. 손모가지 자르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러니까 그 부분은 활 하나를 만들어야한다는 식으로….”
법전을 정비하랴,
“법왕. 괜찮냐? 너무 바쁜 것 같은데. 차라리 여기서는 내가….”
“괜찮으니까 시우 님은 가르쳐드린 것이나 하시어요. 완전히 외울 수 있으실 때까지, 아니, 몸에 막 익을 때까지 말이어요.”
“아, 알겠다.”
예절을 가르치랴,
진짜 개처럼 굴러다녔다.
‘아이고, 진짜 내가 무슨 영광을 누리자고….’
[그러게요. 삶의 영광이라거나?]
‘제게 삶이란 건 뭐랄까, 좀 더 꿀 같은 거였는뎁쇼.’
[그거 압니까? 꿀만 처 빨다 보면 이빨이 썩습니다. 그리고 썩은니가 그득하면 늘그막에 고생하지요. 지금 당신이 개고생을 하는 것도 같은 이치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간 이 천사님 말빨 하나는….
음?
잠깐만.
‘천사님, 천사님.’
[…갑자기 뭡니까? 묘하게 사근사근한 어조로,]
‘아니 그… 뭐라고 하나. 이 법전 있잖슴까.’
[예. 있지요. 그것은 왜….]
‘내가 쓰다 보니 어려워지는 거 같아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그러니까 윤문(潤文)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우리 천사님 말 잘하시잖아요.’
[아니… 간신이여. 몇 번이나 말했듯, 저는 이 세상에 깊게 관여할 수 없는 몸,]
‘에이. 말 좀 고치는 게 무슨 관여입니까. 거기다가, 이미 과거시랑 정찰 다 해주시지 않았어요? 거기에 비하면 제가 이미 쓴 말들 쌈박하게 고쳐주시는 정도쯤은 별 일 아닐 것 같은데?’
[그, 그렇다고 해도 저는 현생에 속한 자가 아니고… 또한, 간신이여. 저는 붓을 쥘 손도 없으니,]
‘괜찮아요, 괜찮아. 불러만 주십쇼. 제가 외워서 쓸 테니까는.’
나는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렸다.
‘함께 구릅시다.’
[이런 물귀신 같으니라고.]
저승에 계신 운명공동체가 한탄했다. 나는 활짝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 역시 자신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맡겨달라고 말해옵니다.]]
‘오. 그 의욕, 대단히 좋소. 아리야여.’
하지만 솔직히 물 떠놓고 기도하면 혼례 끝 아니냐고 물었던 고대인에게 예(禮)와 관련된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천사님께서 날 도우시느라 주변에 신경 쓸 틈새가 없을 것이오. 하니 그대가 대신 주변을 잘 살펴 주시구랴.’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강하게 긍정합니다.]]
따라서 아리야에게는 그렇게 정찰을 맡겼다.
천사와 아리야, 내가 어떻게든 역할을 분담하고, 거기에 내가 부리는 친위대원들과 신전 똘똘이들의 숙련도가 조금씩 오르자 마침내 일감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갔다.
+
<역사변이점>
[ 개천(開天) ]
일시: 건국 0년
제한시간: 30일
(잔여시간: 4시간 0분)
+
그리하여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 ◈ ◈
혼인은 신전에서 맺어질 예정이었다.
나는 마지막 변수들을 점검했다.
‘목표는 크게 두 가지.’
부족의 역사를 끝내고 왕국의 역사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 야만과 문명을 가름하는 ‘경계선’을 긋는 것.
‘그것이 첫 번째 목표고, 또 하나는….’
혼례 및 즉위 준비가 착착 준비되고 있는 신전 속. 그 한 귀퉁이에 서있는 두 개의 무리를 나는 흘끗 쳐다보았다.
그 중 한 무리는 소매가 낙낙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소매가 낙낙하다는 이야기는 옷감을 아낌없이 쓸 수 있다는 것과 같아서, 그들은 허리에 두른 복대마저 비단이었다.
머리에는 산호를 접붙여 만들어낸 관을 썼으며, 목에는 진주를 엮어 만든 목걸이를 걸었고, 복대 한복판에는 별 모양을 띈 기이한 생물의 박제를 박아놓았다.
‘나투아.’
배를 타고 섬과 대륙을 오가면서 무역을 하는 상인들. 근방의 강과 바다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는 재화들을 독점하는 자들.
복대에 박아 넣은 것은 ‘불가사리’라 불리는 바다 생물 중 유독 예쁘게 생긴 것을 추리고 추려서 말리고 찌길 반복해 만들어진 박제이리라.
월족이 들판의 지배자라면, 이들은 물길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저쪽이 그들이군요.]
다른 한 무리는 몸에 딱 재어 맞춘 옷을 입고 있었다. 살갗이 일절 드러나지 않았다. 머리는 박박 밀었고 입가에는 천으로 만들어진 가리개를 덮었다.
그렇게 실용성을 중시한 옷차림 속에, 바로 그런 옷차림이어서 더욱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칼집을 씌우지 않은 칼과 천으로 덮지 않은 비수였다.
‘알실라.’
반도 남동부에 위치한 산맥 일대를 지배하는 장인들. 산성을 건축하고 땅굴을 파 그 사이를 이어서 땅속을 연결하는 자들.
나투아의 재화들이 화려하여 눈길을 끌었다면 그들의 칼과 비수는 요사하기까지 한 빛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질 좋은 광석을 상상할 수 없는 고온으로 녹이고 다듬어 만들어진 걸작일 것이다
월족이 들판의 지배자라면, 이들은 산야의 주인이었다.
‘삼국.’
향후 100년간, 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게 될 세력들의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에게 분명한 의지를 전한다.’
그것이 내가 세운 두 번째 목표였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무슨 의지를 전하려는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시작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오.’
그런 내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잠시 후, 내가 굴러다닌 끝에 소의 위석처럼 반짝거리게 됐을 즈음, 나름 똘똘하여 부관으로 삼았던 신관 한 명이 내게 와서 고했다.
“법왕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식(式)이 시작됐다.
◈ ◈ ◈
“나는 월족의 군주다.”
식장 한복판에 선 비류아가 꺼낸 첫 마디는 그러했다.
“달의 여신의 뜻을 따라, 월족의 강역(疆域)을 넓히는 것을 업으로 삼아 노력해왔다. 다행히 달께서 그런 내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여, 마침내 월족은 하얀 머리 산과 나른한 벌판을 넘어 여기에 섰다.”
반도의 젖줄.
대하(大河).
삼국이 마주보는 접경지.
“그렇듯 나는 나의 일을 해내었다.”
월족의 도읍지, 그 중심에 놓인 신전에 서서, 비류아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나 너머의 일을 해내고자 한다.”
평상시 비류아가 쓰는 검은 알실라에서 벼려진 강철 검이었다. 알실라의 무구는 문외불출이어서, 나투아의 상인들도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무역보다 전쟁에 능한 월족에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노획물을 쓸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질 낮은 철검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비류아는 지금 아예 청동으로 만들어진 비파 모양의 검을 들고 있었다.
“선조의 유지를 받들고, 달의 여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르기 위하여,”
가장 전통적이고 그래서 가장 정통성을 갖는 비파검의 끝이 향하는 자리에 시우가 있었다.
“이제 나는, 달의 여신의 뜻을 더 넓은 곳에 떨치고자 한다.”
비류아가 뻗은 검 끝이 시우의 어깨를 짚었다.
“시우.”
“예.”
곧바로 시우는 대답했다. 시선을 낮춘 그녀와 고개를 든 그의 눈길이 마주쳤다.
비류아가 말했다.
“너는 나를 부군(婦君)으로 맞이하여, 충성과 의리를 다하겠는가?”
시우는 비류아가 뻗은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고개를 수그려, 수려한 이마를 검끝에 부비었다.
벌어진 살갗 사이로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피는 기울여진 검끝을 향해 흘렀다.
이마를 뗀 시우는, 검끝에 입술을 맞추어 자신의 핏방울을 받아들였다.
“거기에 사랑을 더하겠나이다.”
비류아는 눈을 감았다.
“좋다.”
한 차례 더 말했다.
“좋구나.”
비류아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든 그녀를 향해 노을이 쏟아졌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이 자리, 이 장소를 최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성과가 지금 빛을 발했다.
달의 여신의 벽화를 등지고 서서 노을을 받는 비류아는 현신한 달의 여신 그 자체였다. 장인들을 갈아내어 만들어낸, 가리비수를 비롯한 월족 영웅들의 조각상들이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가질 수 있는 감상이란 하나뿐이었다.
‘개 쩌네요.’
[간신이여. 당신에겐 분위기를 파악한다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겁니까?]
‘천사님. 그건 좀 이상한 의문이네요. 지금 이 분위기를 만들어낸 게 바로 저거든요? 저 외의 누가 더 적합한 감상평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자신 또한 예언자님처럼 개 쩌는 감상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아리야. 아무튼 동의하고 보는 거 관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아무튼 동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그럼 개 쩐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해설해보시죠.]
아리야의 말이 없어졌다. 천사의 탄식 소리가 내 머리를 울렸다.
예상했던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러던 때였다.
“월족의 군주시여.”
나투아의 사절단 중 한 명이 한 걸음 나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긴 소매가 늘어져 그림자를 덮었다.
“실로 복된 날, 월족의 벗이 올릴 말씀이 있나이다.”
상인의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 또한, 꼭 그 소매를 닮은 양 낙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