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족장, 비류아 (2)
“네 아비가 악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비류아의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내 딸이다.”
비류아에게, 어머니란 불과 같았다.
“말을 타는 이 미개한 놈들은 자기들만큼이나 야만스러운 이야기를 믿는다.”
낮게 흘러 널리 퍼지는 불길이 발바닥부터 타고 올라와 몸을 감았다.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믿음이지. 우리도 계곡의 노파로부터 선택받았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그 놈들은 신이 직접 세상에 대리자를 보낸다고 생각한다. 그 대리자가 자신들을 이끈다고 말이다.”
비류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거리는 어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대리자는 은색의 눈동자를 가져야 한다더구나.”
그리고 자신은 은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이 부족을 삼켜라.”
불길이 들녘을 삼키듯, 어미의 목소리가 비류아를 삼켰다.
“남녀를 짝지어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도읍을 가득 채우려무나.”
그래서 견디지 못할 기근을 마주하게 해라.
“전사를 키워라. 업적에 대한 노래가 끊이지 않도록 하거라.”
그래서 이기지 못할 전쟁에 휘말리게 해라.
“내 딸아. 네가 이 무리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이 야만족들을 남김없이 지옥으로 보낼 수 있도록.
“네, 어머님.”
어머니를 만족시키고 싶었던 딸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대답하기 쉬웠다. 행하기는 어려웠다.
외가의 입지가 약했다.
은월의 눈동자를 갖진 않았다지만, 이미 장성한 족장의 아들들, 배 다른 오라버니들이 셋이나 있었다.
심지어 바로 다음 해, 첫 번째 부인의 배를 통해 아들이 태어났다.
왕자 주온.
또 다른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그것도 첫 번째 부인의 배에서 태어난 적자(嫡子).
“네 아비를 홀려라.”
어미가 주문했다.
“제사장을 홀려라. 전사장들을 홀려라. 씨족장들을 홀려라.”
양 어깨를 파고드는 깡마른 손톱에 비류아는 피를 흘렸다.
“네가 먼저 태어났다. 네게 권리가 있어. 그 권리를 잊지 마라. 잃지 마라. 챙겨라. 얻어라. 지지 기반을 세워라.”
“네, 어머님.”
어머니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던 딸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대답은 전만큼 쉽지 않았고, 이번에는 행할 시간도 없었다.
어느 날, 은월의 피가 어찌 행동해야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고 돌아왔을 때, 비류아는 자신의 어머니와 그 시녀들이 꿇어 앉혀진 모습을 보게 되었다.
창칼을 든 전사들이 그녀들을 에워쌌고, 그녀의 아버지가 턱수염을 떨면서 진노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월족의 족장이 말했다.
“감히 이런 천벌 받을 짓을 했겠다?”
족장의 손에는 물고기 뼈와 비늘를 엮어 만든 인형이 쥐여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그 물건이 무엇에 쓰이는지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염매(?魅).
누군가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이 왕자의 방 천장에 놓여 있었다.”
월족의 족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이미 널 모시던 연놈들이 다 자백했느니라. 그 미색이 쓸 만하여 손수 후궁으로 거두어주었거늘, 그런 내 은혜를 잊고 감히 왕자를 해하려 들어?! 하! 네 그리 투기가 심했느냐!”
험악한 호령에 비류아의 어미는 겁을 먹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웃어 젖혔다.
“아이고, 그렇게까지 하시는구랴.”
깔깔 웃어대는 어머니를 비류아는 보았다.
“뭐라고?!”
벌컥 성을 내는 아버지를 비류아는 보았다.
“알뜰한 사람 같으니. 그래. 마음대로 하세요. 우리 서방님. 원하는 대로 하셔야지.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나.”
“이 년이! 네가 누명이라도 썼다는 거냐!”
“그걸 내가 알겠수? 서방님이 아시겠지.”
후궁이 깔깔거리는 소리를 월족의 족장은 견디지 않았다. 그가 외쳤다.
“모조리 끌고 가라!”
전사들이 그 말에 복종했다.
어머니는 끌려가기 전에 아주 잠깐 비류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 표정, 그 눈빛의 의미를 비류아는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 밖에도 많았다.
가령 어머니가 정말 주온 왕자에게 저주를 걸고자 한 것인지 비류아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어머니가 넌지시 암시한 대로, 주온 왕자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은월의 눈을 가진 자신의 외척을 미리 가지치기한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더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됐다는 현실만이 남았다.
◈ ◈ ◈
비류아의 검은 차분했다. 어찌나 담담한지, 일정한 박자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닮았다.
‘ 30년 전에도 그렇게 강했는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쇠하기는커녕 제대로 개화한 듯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검로를, 시우는 걷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새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틀어막는 것과 같았다. 그 한계가 명확했다.
‘젠장.’
나는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해야 돼.’
하지만 어떻게 하지?
‘중간에 끼어든다? 말도 안 되는 짓이고. 아예 횃불을 양손에 쥐고 흔들면서 시우를 응원한다? 미친 소리지. 으, 아니.’
덩어리를 쪼개는 건 언제나 유효하다.
지금 문제되는 사항들을 나눠보자.
‘비류아와 시우의 실력 차이.’
이건 시우가 갑자기 ‘우오옷! 영문 모를 고대의 힘이 뜬금없이 솟구친다!’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고, 온몸에 거무칙칙한 기운이 솟구치는 기적이 없는 이상 메울 수 없는 거고.
‘마음가짐 차이.”
시우는 나름 굳게 다짐하고 있다. 각오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아의 얼굴에는 다짐도 각오도 없다. 아예 필요가 없다.
건조한 확신뿐.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하게, 자신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천사님께 말하고 있었다.
“비류아의 과거를 보여주세요.”
시우의 검과 비류아의 검이 부딪혔다. 깡 소리와 함께, 복도에 걸린 횃불에서 불티가 흩날렸다.
불티 사이사이 흩날리는 여인의 삶을 나는 읽었다.
◈ ◈ ◈
“네 어미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비류아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 딸이다.”
비류아에게, 아버지란 물과 같았다.
“먼 옛날, 달의 여신께서 분노하여 세상을 물로 휩쓸었지.”
조용히 차오르는 물이 발바닥부터 타고 올라와 몸을 적셨다.
“하지만 우리만은 그 물난리로부터 무사했단다. 어째서인지 아니? 우리가 달의 여신께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달의 여신께서는 계명을 내려주셨고 지배자의 인장을 찍어주셨지.”
비류아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아비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비가 그치던 날, 달에서 뻗어온 손끝이 최초의 성녀 아리야의 두 눈을 짚은 순간, 성녀님의 눈동자는 지금 나와 너, 주온이의 것처럼 은색으로 바뀌었단다.”
바닥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자신의 것과 같은 은색을 머금고 있었다.
“이 부족을 지켜라.”
물길이 벌판을 뒤덮듯, 아비의 목소리가 비류아를 덮었다.
“남녀를 짝지어라.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도읍을 가득 채우려무나.”
그래서 어떤 수난이 벌어져도 이겨내게 해라.
“전사를 키워라. 업적에 대한 노래가 끊이지 않도록 하거라.”
그래서 어떤 적이 나타나도 깨부술 수 있도록 해라.
“내 딸아. 내 아들아. 너희 중 한 명이 이 무리의 수장이 될 것이다. 자각을 갖고 수양에 힘쓰도록 해라.”
월족을 영광의 길로 이끌 수 있도록.
“네, 아버님.”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된 딸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기 쉬웠다. 행하기는 어려웠다.
지원해 줄 외가가 없었다.
은월의 눈동자를 갖진 않았다지만, 이미 장성한 족장의 아들들, 배 다른 오라버니들이 셋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정통성과 은월의 피를 모두 갖춘 왕자 주온이 있었다.
‘네 아비를 홀려라.’
어미가 했던 말을 비류아는 떠올렸다.
‘제사장을 홀려라. 전사장들을 홀려라. 씨족장들을 홀려라.’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말들을 비류아는 떠올렸다.
‘네가 먼저 태어났다. 네게 권리가 있어. 그 권리를 잊지 마라. 잃지 마라. 챙겨라. 얻어라. 지지 기반을 세워라.’
어깨를 한 차례 쓸어 만지고 나서, 비류아는 행동에 나섰다.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것? 제사장에게 가서 고개를 굽신거리고, 전사장들에게 달콤한 아첨을 하고, 씨족장들에게 장래를 약속하는 것?
아니었다.
비류아는 단련을 시작했다.
조막만한 손으로 검을 쥐었다. 휘두르길 그치지 않았다.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가 펴길 반복했다.
‘사람은 사라져.’
어머니가 끌려가던 모습을 비류아는 잊지 않았다.
‘기술은 사라지지 않아.’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밤, 암살자가 찾아왔을 때 비류아는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비류아를 해치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하여, 암살자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암살자 역시 때로는 식은 죽에 목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벌어진 소동에 족장을 비롯한 월족 수뇌부가 들이닥쳤을 때, 비류아는 손에 단검을 쥔 채였다. 그 칼날은 암살자의 목줄기에 깊게 박혀 있었다.
“이 자가 저를 죽이려 들기에, 제가 먼저 죽였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비류아는 피에 젖어 있었다. 달에서 흘러내린 은빛이 넓고 얇게 그녀를 적셨다.
수많은 전장을 오갔고 그보다 더 많은 수라장을 넘어섰던 족장도 이 모습에는 침묵했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조금 뒤였다.
“장하구나.”
끊어졌던 말은 잠시가 지나서야 이어졌다.
“내가… 네 호위를 엄중히 문책하겠다. 그리고 저놈의 배후가 어디인지, 감히 누가 은월의 가호를 받는 존재를 해하려 든 것인지 캐내도록 하마.”
“아버님.”
비류아는 고개를 수그렸다.
“제 호위를 제가 뽑을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으음.”
족장은 턱수염을 비틀면서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냐? 네 호위를 믿지 못하게 되었느냐?”
비류아는 침묵했다.
침묵은 대부분의 경우 긍정으로 해석되며, 족장 역시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른 호위가 쭉정이일 수도 있다. 지금보다 방벽이 얇아질 수 있어. 그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이냐, 내 딸아?”
“알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다면 왜?”
“적어도 제가 죽을 적에, 제 안목이 뛰어나지 못해 죽게 될 테니까요.”
족장은 침묵했다. 오래는 아니었다.
“저 놈을 끌고 가라. 그리고 전사들을 불러와라.”
그 말에 전사들이 복종했다.
끌려 나가는 암살자의 시체를 비류아는 일별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명을 받고 왔는지 비류아는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30분 뒤, 늘어선 전사들 중에서 자신의 호위를 고를 때 비류아의 머릿속에 더 이상 암살자에 대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대를 내 호위로 삼겠다.”
중요한 것은 이제 자기 사람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시사철 떠도는 불길한 예언, 비류아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이들 속에서 자신의 칼이 되어줄 이를 직접 고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만약 잘못된 칼을 골랐다면?
족장에게 말했듯 자신을 탓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죽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그 밖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질투에 미쳐 부정한 짓을 저지른 첩실의 핏줄.
출신을 감안한 죽음 따윈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눈치도 없이 지금에 와서야 태어난 은월.
정치적 사정에 따른 죽음 따윈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이 아이가 월족에 재앙을 가져오리라.
예언에 의한 죽음 따윈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월족은 이 아이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비류아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님.”
태어나는 데에도 죽는 데에도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놓인 동안에는 힘이 필요했다.
몇 가지 훈련을 더 하고 수차례 난리를 더 거치면서 비류아는 힘을 길렀다.
“다음 전장에서는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아비에게 비류아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