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족장, 비류아 (1)
당장의 생존과 번식 이상의 것을 원하게 되는 병. 거기에 감염된 짐승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일 게다.
그 역병은 유난히도 전염력이 강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달랐으므로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쉽고도 빨랐다. 지옥에서 사람들은 병세가 중할수록 모질게 살아야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힘으로 빼앗았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상대가 바라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곧 상대가 바라는 것이 되게끔 노력했다.
“결투에는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검을 치켜세운 상대와 마주해, 팔짱 낀 그대로 월족의 군주는 말했다.
“무엇을 걸 것이냐?”
시우는 심호흡을 했다.
“바라건대 무엇을 바라는지 여쭤주소서.”
“오호.”
비류아는 다시금 입매를 올렸다.
“하긴, 그것이 타당하겠다. 나의 친위대장. 내 어린 대전사(代戰士)여. 이 늙은 족장에게 무엇을 바라나?”
“저는 어리지 않으며, 족장님께서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귀에 달구나. 말할 적에도 달았겠다. 하지만 단 것은 피를 끈적이게 만들지. 심장이 무거워지지 않았느냐?”
“달지 않은 말로 여겨주십시오.”
“한담이 길구나.”
비류아는 한 손을 올렸다. 침묵과 정지를 뜻하는 신호.
“나는 승리의 대가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시우는 침묵하지도 정지하지도 않았다.
“저는 이미, 제가 바라는 두 가지를 모두 말했습니다.”
곧바로 답했다.
‘음.’
이 녀석, 조금 다시 봤다.
[어릴수록 빠르게 자라는 법이지요. 이제 좀 젖살이 빠졌네요.]
‘그런 것 치고는 귀여워하는 어조구료.’
[귀여우니까요.]
최초의 성녀는 웃으며 말했다.
비류아는 자신의 먼 선조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귀엽다는 기색이 역력하던 비류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흉터와 주름마저 딱딱하게 굳어진 그 얼굴은 그녀가 토벌했다던 하얀 머리 산의 용을 연상케 했다.
“그런가.”
비류아가 중얼거렸다.
“그러한가.”
다시 한 번 중얼거리고서,
“그렇다면 이제 내가 승리의 대가를 말하마.”
시우의 검끝이 살짝 떨렸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보기 위해 대단한 눈썰미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나마저 공기에 낀 성에로 숨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비류아가 말했다.
“너는 네가 바라는 것을 받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는 다만 늙은 족장의 어린 대전사로 남게 되리라.”
시우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혼인하신다는 말씀을 거두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시우는 멈칫했다.
비류아가 웃었다. 전쟁 군주에게 걸맞은 미소가 그 입가에 맺혔다.
“그리고 거두지 않기에 이는 그대가 꺼낸 말에 걸맞은 대가가 될 테지.”
사랑도 인정도 영영 받지 못한 채, 단지 정세와 후계를 위한 배우자가 될 것이라는 선고는 친위대장을 얼어붙게 했다. 선 굵은 미남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완전 쫄았네.’
싸우기도 전에 완전히 기세를 먹혔다.
‘나야 그냥 지켜만 보아도 상관없긴 한데….’
이기든 지든 비류아가 반려를 맞이한다는 것 아닌가.
월족의 내부인으로부터. 그것도 비류아가 직접 나서서.
그려왔던 것과 동일한 그림, 아니, 시우가 비류아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여 관철하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나로서는 얼떨떨할 정도로 잘 나온 그림이었다.
‘다만….’
무언가가 걸렸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지?’
나는 지금 뭐가 걸리는 거지?
[우선은 양심을 추측해볼 수 있겠군요.]
‘천사님.’
천사가 돌아왔다. 그 말은 곧,
‘끝났습니까?’
[예. 당신이 건넨 검색어를 통해 비류아의 인생 역정을 추려냈습니다. 지금 보여드릴까요?]
‘아니요. 조금 나중에.’
이전 임무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과거시를 통한 장면을 엿보는 동안 현실의 내가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 상황이 정리된 다음에 봐야만 했다.
[양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당신에게 그런 게 있다고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모양이군요. 하긴 저도 그냥 던져본 말이었습니다.]
‘천사님, 제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요?’
[…바로 본론입니까. 한 마디 정도는 투닥거려도 좋았습니다만.]
천사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그리고 진중함도.
[아마 이렇게 비류아의 뜻대로 혼인을 맺는다면, 이번 임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번 임무의 목적.
‘나라가 세워지지 않는다?’
[예.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촉.
[촉이라는 것은 과거에 겪었던 경험들을 총망라한 무의식적 사고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느낌을 찾아보면 어떻습니까?]
나는 곧바로 찾아냈다.
‘마지막 임무 달성 직전.’
공교롭게도 그 때 역시 결투가 벌어진 시점이었다.
비류아가 치고 들어와 동생에게 결투를 건 순간. 정확히는 아리야가 이대로 가도 임무를 달성할 수 있겠냐고 물었던 순간 느꼈던 감정과 닮아 있었다.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대로 비류아가 이기면 어떻게 되지?’
혼인이 있을 것이다.
비류아는 시우를 반려자를 맞이할 것이다. 나이가 나이지만 잘 하면 아이까지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이 없다.
월족을 나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위성을 만들어낼 여지조차 사라진다.
모든 것이 비류아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상황.
그런 속에 마신 추종자도 더 이상 위협이 아니게 되었다. 오늘 한 조치만으로도 이미 분열이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위협이 없다는 것은 곧 대비하기 위해 발전할 이유가 없다는 뜻도 된다.
‘거꾸로 마신 추종자들이 연합하게 만들어? 그렇게 내부의 위협을 키워내면….’
기각. 가리비수 조각상을 아예 잃게 되는데다가, 오늘 해낸 일이 총체적으로 뻘짓이 되어버린다.
‘혼인 거절을 빌미로 나투아와 알실라를 연합시켜? 그래서 그 둘이 공격해오게 만들면….’
기각. 이 시대의 전쟁은 오래 걸린다.
임무 기한 내에 끝을 보기란 요원할 것이다.
‘젠장.’
30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잠깐만 마음 놓으면 바로 가져가버리네.’
정말이지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시우 님, 비류아 님.”
생각을 마친 순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시선을 맞받으며 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두 분께서 먼저 알아두셔야 할 일이 있어요.”
뭐라고 말하지? 음.
개천으로 이어질 만한 단어. 시우를 북돋을 만한 단어.
“이전 말씀드렸듯, 두 분께서는 달께서 점지해준 인연이오나,”
‘그리고 좀 야비하지만 비류아를 주저하게 만들 만한….’
“마음 없이 몸만 함께하신다면, 두 분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기 어려울 거예요.”
[어….]
응?
왜?
[그… 간신이여.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말이 왜 비류아에게 주저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어, 그야… 야리소연도 그랬고. 아리야도 아이 여럿 키웠다고 했고…. 그 때 천사님도 그랬었잖아요? ‘어미가 되어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라. 부모는 아이를 걱정하고 그리 걱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야만인도 문명인도 따로 없으니’ 어쩌고….’
[예…. 그랬었습니다만, 비류아는, 야리소연이나 아리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대답을 들을 시간은 없었다.
비류아가 물었다.
“그것은 예언인가?”
음.
‘어쩌지?’
천사의 반응을 보자니 무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아뇨 그냥 제 느낌이’ 어쩌고 하기에는 예언의 힘을 지나치게 사용해왔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나 대신 시스템이 먼저 질렀다.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이런 미친.’
[ 청중 중 하나는 그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
‘아니 그… 시우야 미안해. 그치만 이 정도는 해둬야 네가 분발할 것 같….’
생각이 멈춘 것은 다음 순간 뜻밖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청중 중 하나는 그 말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이미 알고 있었다니?’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류아가 웃고 있었다.
담담하지도, 사납지도 않은, 서글픈 웃음이 그 입가에 맺혀 있었다.
“내가 이기겠구나.”
짧은 자조.
[‘예언’이 성공합니다. ]
모두가 멈칫한 순간, 비류아가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 ◈ ◈
- 이 아가씨가 월족에 재앙을 가져오리라.
그러한 예언이 있었음을, 도기 굽고 생선 잡아 끼니를 잇다가 말발굽에 짓밟혀 끌려온 여인의 딸은 스스로 바닥을 딛고 설 수 있게 될 무렵부터 알게 되었다.
- 열 가지 재앙이 차례로 찾아와 월족을 휩쓸게 되리라.
선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득 채운 물동이와 같은 무게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양팔로 안고 안간힘을 써서 끙끙대보았지만, 비류아는 조금도 그 물동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두 발이, 가느다란 다리가 그 물동이와 같은 자신의 체중을 받히고 선 것이다.
발바닥에 와 닿는 감촉의 농도가 그녀의 무게를 갈음하는 이 기적은 비류아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는 걸까.
- 월족은 이 아가씨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이다.
한 아이의 다리가 그렇게 견고하거늘, 부족의 다리는 어떠하기에 이 아이로 인해 무너진다는 걸까.
전자의 답은 어려웠지만, 후자의 답은 어렵지 않았다.
“내 딸아.”
비류아의 어머니는 비류아를 안고 속삭였다.
“네 어미는 내 나이 때 냇가에서 물장구를 쳤다. 옆집 살던 돌바우, 길 건너 살던 수하리도 함께였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물장구를 치지 않게 되었을 무렵, 나는 그 냇가가 피로 물드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의 피와 내장이 그 냇가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속삭임은 곧잘 으르렁거림으로 변하곤 했다.
결코 포효할 수 없는 자가 내짖는 으르렁거림은 낮게, 낮게 깔려 바닥을 딛고 선 비류아의 발가락을 쓸었다.
“이 어미는 깨복장이 동무들을 살해한 자들의 손에 끌려왔다. 그리고 고기토막처럼 분배 당했지. 널 갖게 된 거다.”
어미가 으르렁거림에는 바닥마저도 꿈틀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단단한 돌바닥도, 사박사박한 흙바닥도, 늪처럼 바뀌는 듯했다.
그럴 때면 비류아는 균형을 잃었다.
넘어지지 않은 것은 먹이감을 움켜쥔 맹금의 발톱처럼 자신을 안은 어미의 양 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낳자마자 너를 죽일 생각이었거늘.”
비류아는 어미의 품이 따뜻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네 눈이, 내 딸아.”
항상 늘어 붙을 만큼 뜨겁다고 느꼈다.
“네 눈이 너를 살려냈구나.”
- 이 아가씨가.
- 월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라.
“지금까지 어미가 한 말.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려무나.”
- 월족은 이 아가씨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이다.
◈ ◈ ◈
비류아가 가한 첫 일격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참격이었다.
“읏,”
캉…! 시우가 그것을 막아냈다.
그나마 검을 들고 있던 덕에 겨우 막아낸 것이었다.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는 시우에게, 비류아는 어깨를 한 차례 젖혔다.
캉, 캉, 캉, 츠팟…!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칼날. 막는데 급급하던 시우는 기어코 왼쪽 뺨을 스치듯 내주고 말았다.
“윽…!”
비류아도 검집을 씌운 칼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한 속도와 절묘한 각도가 그 검집을 있으나마나한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터져나간 피와 살점, 시우의 왼쪽 뺨에 분홍빛 이랑이 패였다.
“축하한다, 시우. 훈장이 늘었구나.”
“족장님,”
“이제 좀 전사가 된 기분인가?”
“족장님!”
“칼을 거둬주십시오!
“결투는 그대가 먼저 신청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법왕의 예언하길, 아이가….”
“알고 있다.”
캉! 30년 전의 그 때처럼 칼이 오가는 와중에도 비류아는 숨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상관없다.”
캉! 언성도 높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아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소리친 시우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거리가 벌어졌다. 그 거리를 비류아의 웃음이 채웠다.
“거꾸로, 어째서 모른다고 생각하나?”
시우가 멈칫했다. 비류아는 기수식을 잡으면서 말했다.
“시우. 나는 월족의 족장이다. 30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비류아 님.”
“아무렴 내가 후계의 중요성을 몰랐겠는가. 다만 청백한 몸으로 정절을 지켰겠는가.”
“비류아 님!”
“내가,” 비류아는 노래하듯 말했다. “침실에 사내를 불러들인 적이 없었겠는가.”
“비류아 님!!”
시우가 고함을 질렀다.
그가 달려들어 휘두르는 검을, 슥, 비류아는 손끝만 움직여 막았다. 흘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오호, 난폭하구나. 내가 청백하지 않다는 사실이 널 분노케 했느냐?”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칼날이 거칠꼬?”
비류아의 칼날이 용오름쳤다. 연쇄적으로 터지는 격타음, 어깨와 가슴을 두드려 맞은 시우가 신음을 흘리면서 물러섰다.
물러서면서도 이를 악문 채 비류아를 향했다.
그런 그를 향해 비류아는 말했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덧붙였다.
“앞으로도 생기지 않겠지.”
시우가 헐떡였다.
“그건 모를 일입니다….”
“월족은 내 대에서 끝이 날 것이다.”
“모를 일입니다…!”
“결국 예언이 옳았던 것이다.”
이 아이가 월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라.
월족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면 왜!”
시우가 외쳤다.
“대체 왜 저와 혼인하자 말씀하신 겁니까!”
장절한 외침이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 인정하지 못한다 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비관하시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계신다면 대체 왜….”
“나는 월족의 군주니까.”
전쟁 군주의 입가에 다시금 자조하는 웃음이 떠올랐다.
“무의미한 발버둥도 마지막까지 쳐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