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기반 다지기 (2)
나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최대한 직설적으로 해설했다.
덕분에 비류아로부터 허가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우, 조각상을 내주도록.”
머리 자체는 좋은 시우 역시 내 설명에 납득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리비수 조각상 대부분은 파손된 상태였다.
비류아의 초인적인 활약을 동경하며 자라난 이들은 그런 잡신을 섬기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잔인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겐 박해자의 소양이 있었다.
하지만 궂은비를 버텨낸 나무가 굵은 뿌리를 갖는 법. 아직 남아있는 가리비수 조각상도 있었다.
어젯밤 습격해온 이들의 집을 덮친 친위대원들이 증거물로 가져온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와 시우는 그것을 갖고 신전에 들렀다.
“아이고, 친위대장 님. 나오셨습니까요!”
당대의 제사장이 고개를 수그렸다. 자글거리는 주름살마다 비굴함이 들어찬 사내였다.
“귀하신 분께서 여기에는 어쩐 일로….”
굽실거리던 그가 입을 다문 것은 나와 내가 손에 든 가리비수 조각상을 보아서였다.
당혹한 제사장에게 시우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관들을 모아라.”
제사장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신전의 최고 권력자조차 족장의 친위대장에게 대거리를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 친위대장도 정작 신관들이 모여들자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래는 아니었다. 시우는 신전에 오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어제 불행한 사태가 있었음은 들어 알 것이다.”
제사장과 신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 놈들과 저희는 관계가 없습니다!”
“저희는 하늘에 계신 달의 여신님과 지상에 그 대리자로 오신 비류아 족장님만을 받들어 모실 뿐입니다!”
황급히 꿇어 엎드리며 탄원하는 모습을 보니 왜 얘네가 이렇게 비굴한지 감이 왔다.
‘무슨 일만 생기면 신전부터 족치고 봤나보네.’
권한은 하나도 없는데 책임은 무한.
그런 위치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태학관 1년생 조별과제 조장 같은 역할….’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시우가 더 갑질을 하기 전에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이 흉측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제사장과 신관들이 움찔하여 나를 보았다.
그 다음에는 눈빛이 두 갈래로 나눠졌는데, 제사장을 비롯한 늙은 신관들은 복잡한 얼굴, 그리고 젊은 신관들은 대체 저 꼬맹이는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의문에 답해주듯 한 걸음 나서며 제사장을 불렀다.
“제사장님?”
제사장은 재빨리 대답을 못했다. 내게 어떤 호칭을 써야하는지, 존대해야하는지 하대해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반응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익히 예상한 일이었기에 나는 기다리지 않고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지금부터 이 신전을 총괄하게 된 인물이에요.”
“초, 총괄하게 되셨다면…?”
“예. 달의 여신을 대리하시는 족장님께서 저를 간택하시어, 제게 그럴 수 있는 권한과 지위를 주셨거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제사장은 입을 뻐끔거렸다.
평생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 특유의 주눅이 깊게 서린 그 얼굴에 대고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긴 시간 고생을 해오셨어요.”
궁전이 더 커졌다고 신전이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달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은 여전히 좌우로 넓었고 위아래로 높았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어요. 여러분들이 무슨 고생을 했느냐고. 과연 여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밭을 매는 것보다 고될 것이며, 과연 계명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창칼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냐고. 여러분이 하시는 일 중 무엇이 그리 어렵겠느냐며 타박하겠지요.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옳아요.”
그 속을 걸으면서 나는 노래하듯 말을 이어갔다.
“창과 칼로 누군가를 난도질할 수는 있어요. 부족을 집어삼킬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게 난도질하고 집어삼킨 이들을 월족으로 만드는 것. 정화하고 교화하고 소화하는 것은 전사가 아닌 여러분들의 몫이었어요.”
신관들이 기겁하여 시우의 눈치를 살폈다. 전사들을 모독하고 신관들을 높이는 말은 긴 시간 금구였을 테니까.
그리하여 신관들은 더더욱 기겁하게 되었다. 친위대장인 시우가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기 때문이리라.
“달의 여신의 이름하에, 그리고 그 대리자인 비류아 족장님의 이름 앞에 약조하지요.”
걷던 나는 달의 여신을 표현한 벽화 앞에 섰다.
맨발에 와 닿는 돌바닥의 촉감은 서늘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하게 될 거예요. 제대로 하게 될 테지요. 그리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 제 지도 하에 말이지요.”
벽화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두 손을 가슴에 얹었다.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동안 아늑하게 바뀐 햇살이 나를 휘감았다. 달군 돌의 냄새가 머릿속에 퍼졌다.
“저는 첫 번째 예언자, 모서아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자.
나는 법전 초안을 들어 보이면서 답했다.
“또한 족장님으로부터 받은 법을 널리 전파할 자.”
더하여 신전을 총괄하는 자이니, 마땅한 호칭은 하나뿐이었다.
“여러분께서는 저를 편히 ‘법왕(法王)’이라 부르시면 될 것이에요.”
정적이 흘렀다.
◈ ◈ ◈
장광설로 내가 말한 것은 결국 다음의 두 가지였다.
‘더 이상 우려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책임지게 되었다.’
제사장은 그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자리를 빼앗겼다는 낭패감과 더 이상 신전의 우두머리로서 짐을 짊어질 필요 없다는 해방감 속에서 갈등하던 그가 후자를 택한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예, 법왕이시여.”
차라리 후련하기까지 하다는 얼굴로 신전의 전 총괄자는 고개를 수그렸다.
‘좋아. 신분 인증은 이걸로 끝났고.’
물론 신관들 중에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낯빛을 띄우는 이도 많았지만, 시우 앞에서 그런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가리비수의 조각상을 이 앞에 두겠어요.”
사방에서 숨 막힌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번 역시 시우의 눈치를 살피는 시선들이 이어졌지만 시우는 가리비수 조각상을 여신의 벽화 앞에 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상에….”
“마, 마신의 조각상을 이 신전에….”
헛숨을 삼키던 신관들의 표정은 곧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여신의 벽화는 벽 전체를 채울 만큼 장대했다.
제법 큰 가리비수 조각상도 그런 배경 앞에서는 하나의 소품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나는 그 소품 앞에 또 다른 소품을 놓았다. 광주리였다.
“가리비수에게 공물을 바치는 행위, 축복을 바라는 행위를 허하겠어요.”
다시금 도처에서 침음성이 터졌다.
과연 이번에는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는지, 신관 중 한 명이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법왕이시여. 계명에는, 나 아닌 다른 신을 모시지 말라 되어 있사온대….”
“가리비수는 신이 아니에요.”
나는 잘라 말했다. 나 자신이 가리비수였던 만큼 확언할 수 있다.
“물론 무지한 자들은 가리비수를 마신(魔神)이라 불러요. 하지만 현명한 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바, 가리비수는 야리소연이라는 천사와 결혼한 악마였어요. 결코 신(神)이 아니지요.”
그 확언 위에 아리야 시대의 가리비수 전승을 끌어와 버무렸다.
“천사란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자를 의미해요.”
그 다음은 자의적인 해석.
“그리고 달의 여신의 의지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자를 우리는 하나밖에 알지 못하지요.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지상의 지배자 말이에요.”
야리소연이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것 역시 내가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점점 내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렸다.
“따라서 가리비수는 그런 은월의 핏줄과 결혼하여 그녀의 곁을 지킨, 시우 친위대장님과 같은 존재.”
“헉….”
“그, 그런….”
지금까지 금기 중의 금기로 여겨졌으며, 바로 어제 난동을 일으킨 자들이 모시는 존재를 시우와 동급으로 여기는 말에, 그러나 역시 시우는 잠자코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관들의 눈동자만 서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속에서 내가 말했다.
“가리비수는 신이 아닌 영웅(英雄)이며, 우리 월족의 조상(俎上)이예요.”
이 또한 담대한 발언이었는지 침 넘어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자식이 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결례가 될 수 없듯, 후손이 조상을 공양하는 것 또한 무례가 될 수 없지요. 할미가 전장에 나서는 손주의 이마에 입 맞추는 것이 죄가 될 수 없듯, 선조가 후예를 축복하는 것이 벌 받을 수는 없으니,”
나는 가리비수 조각상 앞에 고개를 수그렸다.
“월족의 조상에게 숭배하고 싶은 자, 고대의 영웅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자가 있거든, 편히 이 앞에서 절을 올리도록 허하겠어요.”
가리비수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깎아내린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서는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영웅과 조상.
계명을 피하면서 제사를 허용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 그런데….”
신관 중 누군가가 입을 열려다 말고 다물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꾸로 말해서, 가리비수를 조상이 아닌 신으로 모시려는 자들은 창과 채찍 앞에 징벌 받을 것이에요. 지금까지처럼요.”
비류아에게 말했듯 마신 숭배자들은 결코 단일한 덩어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선 그들을 분열시킨다.
이 가리비수 조각상 또한 그것을 위한 미끼가 되어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가리비수를 찾아온 자가 있거든 이 조각상 앞을 내어주세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던 신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정녕… 그러니까, 족장님의 의지입니까?”
“정확히는 법왕인 저의 해석이며, 족장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에요.”
나는 힘주어 답했다.
신관들의 표정에 희비가 엇갈렸다.
대체로 기뻐하는 기색이 강했는데, 아리야는 그것이 의문이었나 보다.
[예언자님. 저들이 왜 저리 기뻐하는 것인가요?]
음.
‘왜냐하면 내가 한 말은 곧 이런 의미이기 때문이오.’
첫째, 바로 내가 가리비수 숭배를 허용시킨 장본인이다.
둘째, 따라서 그 책임도 공훈도 나에게 있다.
‘시우와 제사장의 태도로 보아 이들의 30년을 예상하긴 어렵지 않소. 이들은 그 동안 무슨 일에건 책임지는 데에만 내몰렸을 것이오.’
[희생양처럼 말인가요?]
‘그렇소. 그렇게 세상의 어지러움을 대속하는 것 또한 신전의 고유한 영역 중 하나이니 자기 일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들 역시 사람이오. 무엇 하나 얻어낼 수 없이 계속 희생양 노릇만 해왔으니 우리에 갇힌 짐승 같은 기분이었겠지.’
[그런 속에서 마침내 ‘무언가를 얻어 내줄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군요….]
‘그렇소. 심지어 저 전설적인 비류아 족장을 상대로 말이오.’
물론 이마저 비류아의 덫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는 듯 어두운 얼굴을 한 신관들이 몇몇 보였다.
신경 쓰진 않았다.
그런 녀석들은 어차피 뭘 말해도 따라오지 않는 법.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요.”
나는 법왕으로서 지시를 내렸다.
“첫째. 여기 적힌 내용들을 돌이나 나무에 새겨 사람들 다니는 곳에 전시하고,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설명해주세요.”
나는 법전 초안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가리비수 숭배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이 비류아의 서명과 함께 명시되어 있었다.
“둘째. 여러분은 지금부터 조각상을 만들어야 해요.”
“조각상 말씀이십니까?”
법전을 받아든 제사장이 당혹하여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리비수 조각상을 가리켰다.
“이것과 비슷한 크기로.”
손가락을 하나 폈다.
“우선 야리소연의 조각상을 만들 것이에요.”
첫번째 은월.
“다음으로는 아리야와 모서아의 조각상을 만들 것이에요.”
최초의 성녀와 첫번째 예언자.
“그리고 물론, 비류아 족장님의 조각상 역시도요.”
용 살해자 겸 개천하여 왕국을 세운 시왕(예비).
“장차 이 신전은 명예의 전당 역할도 하게 될 것이에요. 영웅과 조상을 모시는 자들은 언제든 와서 공양을 드릴 수 있게끔 말이에요.”
여기에는 세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하나는 물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비류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둘째는 가리비수 추종자들을 ‘특별하지 않은 존재’로 전락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셋째.
‘달의 여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신이란 멀면 멀수록 경외 받는 법.
목소리가 닿지 않아 규탄할 수조차 없는 곳에 있을 때 신은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다.
‘왕국 200년대쯤부터 시작된 성인(聖人) 시성식을 베낀 것이긴 하지만….’
그러기에 효과 역시 검증된 것들이었다.
본격적인 학자 계층을 배양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신전에 좀 더 권위를 실어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태학관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처럼 신전 권력이 폭주하지 않게끔 장치를 해둔만큼, 이 정도로 충분하리라.
‘휴, 겨우 끝났네.’
그렇게 일련의 지시를 마치자 기운이 쪽 빠졌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럼 그대로 이행해주세요. 혹시 무언가 일이 있거든 저를 불러주시고요.”
전 제사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예, 법왕님.”
처음 법왕이라 불렀을 때보다 훨씬 극진해진 태도였다.
흡족해진 내가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 님, 가지요!”
“음.”
이제는 씨족들을 돌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