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48화 (48/261)

48. 기반 다지기 (1)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내 말은 곧 치도(治道)를 알려주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까.

하루 전만 해도 돌이나 나르던 반역자의 후예가 입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당돌한 말이었다.

어지간히 신뢰도를 축적시킨 시우조차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담대하고 또 재미있는 말이구나.”

하지만 비류아는 살짝 웃었다.

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어요.”

비류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웃음기를 유지한 그대로 말했다.

“두 번째 방법을 먼저 들어보겠다.”

“그들을 추방하는 것이어요.”

“어렵구나.”

비류아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이어 해설했다.

“쫓아내게 되면 남겨진 월족은 순수해질지 모르나 쫓겨난 마신 추종자들 또한 더는 거리낄 것이 없어질 것이다. 월족 안에 있기에 그들은 사방으로 감시당하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며 몸집을 불리지 못한다. 추방은 안의 근심거리를 바깥의 우환거리로 만듦에 불과하다. 세 번째 방법을 듣겠다.”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어요.”

나는 바로 답했고, 비류아는 역시 바로 말했다.

“그 또한 어려운 일이다.”

해설이 이어졌다.

“네 말대로 나는 그들을 참함으로써 권위를 얻었다. 나의 권위가 그들의 시체에 기반하니, 그 시체들을 존중하여 매장하는 만큼 나는 낮아질 것이고, 가엾이 여겨 화장하는 만큼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시체로 만들길 멈춘다면, 피에 젖은 그들의 손에 발목을 잡히고 말 테지요.”

내가 말했다.

비류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나로 인해 동포를 잃었다.”

수십 명의 가리비수 추종자들이 바로 어젯밤 참수 당했다.

“그들은 이미 나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수천 명의 가리비수 추종자들은 그 동안 박해 받았다.

“내가 그들을 포용한다고 하여 그들이 내 품에 안기겠는가. 내가 양 팔을 벌리고 그리하여 그들이 달려온다고 해도, 그들이 내 품에 뛰어드는 까닭은 안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도끼로 내 목을 찍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이해했다.

비류아가 받아들인다고 하여 지금까지의 세월이 없어지진 않을 노릇이었다.

“사정이 그런 만큼 모두 죽이는 것도 어렵다. 모두 쫓아내는 것도 어렵다. 모두 포용하는 것도 어렵다. 그대가 낸 방법 세 가지 모두가 어려운데, 이대로라면 그대는 족장의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아니면 각각의 어려움들마저 해소할 방도가 있기에 입에 담은 말인가?”

“실례지만, 님이시여.”

나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님께서는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어요.”

역시나 당돌한 말에 시우가 움찔했다.

그리고 이번 역시 비류아는 말의 형식이 아닌 말의 내용에 반응했다.

“그 착각이 무엇이냐?”

“가리비수 추종자들이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라는 착각.”

나는 설명했다.

“월족과 마찬가지여요. 달의 여신을 모시는 월족이라 부르면 마치 월족 전체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지지만, 그 아래 여러 씨족들이 있으며 여러 이해관계가 있음을 님께서는 아실 거예요.”

비류아는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족장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는 말일 것이다.

“당장 가리비수 추종자들 또한 그 자그마한 덩어리 중의 하나지.”

역시 머리가 좋다.

“그러해요.”

“가리비수 추종자들 역시 여러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

“예.”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바로 어제 마신 추종자들을 처형할 적에도, 누군가는 님을 마지막까지 증오하고 저주하였지요. 누군가는 자신을 전사로 대우해달라 요구했지요. 누군가는 가까워지는 칼날에 겁에 질려 몸부림쳤어요. 그들은 고작해야 ‘습격’이라는 행위에 몸을 같이했을 뿐,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거지요.”

‘같은 인간이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지만.’

“그리고 저는 그들을 추려낼 적에, 그들을 다시 세 부류로 추려낼 수 있사와요.”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우의 허리춤에서 전투 화장에 쓰는 먹가루를 받아 침으로 녹였다.

‘계명 미션 때도 그랬지만 문자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리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월족의 문자들은 훨씬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진 상태였다.

아직 본격적인 왕국 문자에 비하면 낭비가 많았지만 그 낭비를 줄여 적는 정도야 간단했다.

그리하여 바닥에는 세 개의 문장이 새겨졌다.

“참해야 할 자들, 추방해야 할 자들, 포용해야 할 자들.”

나는 고개를 들어 비류아를 보았다.

“그렇게 나눠드릴 터이니, 그대로 행해주시어요.”

비류아는 한동안 바닥에 그려진 문자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이것만이 아니어요.”

나는 비류아를 바라본 그대로 그 아래 계명과 같이 여러 문장을 나열했다.

+

살인자는 참한다.

상해자는 때린다.

도둑질한 자는 그 열 배의 액수를 갚도록 한다.

.

.

.

+

“달의 여신께서 최초의 성녀 아리야와 첫 번째 예언자 모서아께 내린 계명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라는 커다란 지침이었어요. 그것은 그 시절에는 유효했지요. 그 시절의 월족은 정말이지 하나의 덩어리였으니까요.”

‘정확히는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지. 그래서 큰 지침만 줘도 나머지는 주먹구구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월족은 그렇지 않아요.”

‘규모가 너무 커졌어. 여러 씨족이 묶여 있잖아.’

“님께서 혼자서 짊어지기에 월족은 너무 무거워요.”

‘30년 전이었다면 씨족들 우두머리랑 신관들을 통해서 어떻게 짐을 좀 나눌 수 있었겠지. 근데 그 고인 물을 싹 퍼내버리고 비류아 너 혼자 철권 통치하자니 삐걱거릴 수밖에.’

비류아의 심복이라 할 만한 자들은 시우를 비롯하여 모조리 전사. 비대화된 신관들의 권위를 들어낸 것은 의도한 것이지만 그 빈 부분을 전사들이 채우니 식자 계층이 만성적으로 부족해진 것이다.

통치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문제법도 해결법도 사실은 간단해요.”

태학관에 다녀봤으며 왕국 관료 체계를 체험해본 나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커다란 집단이란 결국 여러 집단이 뭉쳐서 생겨나는 것. 복잡함 역시 여러 집단이라는 데에서 비롯되니, 하나하나 쪼개어 대처하면 되어요.”

‘문제는 그러자면 생각할 머리가 여럿 필요하다는 것.’

비류아가 막힌 것은 바로 이 부분.

따라서 이 부분만 해결해주면 된다.

“홀로 생각하기 어려우시면, 생각을 대신해줄 자를 찾으면 되고요. 그러나 그 중에 믿을 만한 자를 찾기가 어렵다면--”

나는 눈을 깔아 내가 적은 문장들을 가리켰다.

“아예 생각을 위임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면 되지요.”

법전을 만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류아는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담담하기만 하던 은월의 눈동자는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대는,”

비류아는 한동안 숨을 고르고서 말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왜 이제야 왔는가…. 그대는, 나는 왜 그대를 그런 곳에.”

음.

“저는 님께서 세울 나라로부터, 님께서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신 지금이기에 왔사와요.”

그 말의 의미를, 비류아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

<역사변이점>

[ 개천(開天) ]

일시: 건국 0년

제한시간: 30일

(잔여시간: 28일 16시간 14분)

+

이해시킬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많이 있었다.

◈          ◈          ◈

법전의 초안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말 그대로 작은 지침들만 있어도 괜찮았다.

“세월이 자연히 이것을 살찌울 거예요. 그러다가 너무 커진다 싶으면 이것의 배를 가르고 다시금 새 법전이 뛰쳐나올 테고요.”

“알겠다.”

그 후 나와 비류아는 가리비수 추종자들을 추려낼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말씀드렸듯 부족민들을 하나하나 면담할 수 있다면 가장 확실하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일 거예요.”

30년 전, ‘월족’에겐 1천의 기병이 있었다.

전사 집단이라는 월족의 정체성, 군주와 그 후계자들의 친정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해도 기병 1천을 길러내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인구는 최소 5만에서 10만이다.

‘잠도 안자고 한 명 만나는데 1분 쓴다고 해도 5만 분에서 10만 분… 34일에서 68일. 임무 시간을 가뿐히 넘어서.’

이게 다 달의 여신이 생각도 없이 내려준 선민사상에 도취하여 땅따먹기에 용왕매진한 결과물이었다.

[예언자님…?]

‘심지어 지난 30년, 비류아는 그 땅따먹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소, 아리야. 실로 비통한 노릇이지. 그 사실을 감안하면 월족의 인구수는 현재 못해도 30만 이상. 하나하나 면담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이라오. 허참, 달의 여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위험한 사상을 내리셨을꼬.’

[어… 음, 그러게요, 무슨 생각이셨을까요….]

신의 역사하심을 인간이 헤아릴 수야 없는 노릇. 침통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자니 비류아가 물어왔다.

“그러면 어떻게 할 셈인가?”

“우선은 가지를 살피겠어요.”

나는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 님. 함께 도읍지를 돌도록 해요. 법전의 초안을 씨족 대표들과 신전 대표에게도 돌릴 겸, 월족의 중심부를 살피면서 찾아보도록 하겠어요.”

이 모든 논의를 지켜보던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나와 시우가 나서려던 때였다.

“그대여.”

비류아가 나를 불렀다.

“예, 님이시여.”

나는 바로 고개를 수그렸다. 비류아는 다시금 차분해진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마신 추종자들을 포용하기 어렵다 했을 때, 우리들이 입에 담았던 말을 기억할 테지.”

“예. 그 간의 세월이 있으니, 님께서 포용한다 하여도 그들이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지요.”

“그러하다. 실로 포용이란 독한 술과 같아 붓기도 받아 마시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한숨을 지은 비류아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은월의 눈동자 특유의 고요한 달빛이 나를 담았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그대가 그 독주를 기꺼이 받아 마셨다는 사실이 기이하구나.”

으음.

“그대는 긴 시간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대가 알 도리가 없는 일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그 고난을 강요한 이들의 우두머리인 바, 그대는 날 욕하고 원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어쩐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말이었다. 조금 생각해본 나는 그 기시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깨달았다.

- 아까 봤지! 네 어머니도 이 자식들한테 죽었잖아!

야리소연.

우연치 않게도 지금 문제가 되어있는 가리비수로서 활동할 무렵, 당대 은월의 피로 함께했던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비류아는 짓고 있었다.

그 당시와 나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죽은 것은 가리비수의 어머니였지 나의 어머니와 달랐다. 지금 역시 긴 시간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은 이 소년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내가 돌 나르고 채찍 맞고 그랬던 것은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 욕하고 원망할 정도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예언자님. 그러면 얼마나 당해야 ‘욕하고 원망할 정도’가 되나요?]]

‘아리야.’

[하루? 일주일? 한 달? 1년?]

나는 아리야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녀야말로 태어나기 전부터 박해받아온 이였으니까.

[아, 죄송해요 예언자님. 예언자님께 살풀이를 하려던 것은 아니에요….]

‘알고 있소.’

아리야는 지금 순수하게 의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생각해보면 의문스러운 것은 똑같았다.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해보니 시간의 문제는 아니구료. 단 한 차례의 모욕에도 천추의 한을 품는 자들이 있었으니 말이오.’

내 혀를 뽑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야만인들을 떠올리니 절로 침통해졌다.

그 기분을 목소리에 실으니 절로 침통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님을 만나기 전의 저는 진정한 제가 아니었으니까요.”

비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정한 그대가 아니었다?”

“예. 그러니, 그 제가 어떤 대우를 받았건 저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일 터예요. 그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니까요.”

그렇게 스스로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기에 나는 다치지 않을 수 있고, 다치지 않으므로 또한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마신 추종자들이 성을 내는 것은 그 반대. 마신의 조각상이 파괴당하고 가리비수가 조롱당할 때마다, 한낱 조각상이 아닌 자신이 상처받았다 여기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비류아는 깊이 침음했다.

“그리하여 복수해야 한다고 말이냐.”

“예.”

그리고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아리야, 고맙소. 덕분에 좋은 걸 깨달았소.’

[앗, 아니요 예언자님. 도움이 되었다면야….]

‘아니오, 정말 큰 도움이었소.’

아리야에게 사의를 표한 나는 시우를 돌아보았다.

“시우 님, 가리비수 조각상 중에 온전한 것이 하나 있나요?”

“있다만, 그런 흉물스러운 것을 왜?”

“신전에 안치시킬 거예요.”

시우가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그런 흉물스러운 것을 대체 왜, 라고 말하려는 그의 입술을 나는 검지로 짚어 막았다.

이어 비류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님이시여.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듣고 타당하다 싶으시면 허가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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