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마신의 추종자들 (3)
“불이다!”
그 한 마디를 신호로, 소란은 곧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불이야! 불이 붙었어!”
“누가 한 짓이야!”
“족장님! 족장님께서는 무사하신가!”
두서없는 외침들.
하지만 그 일부만 들어도 내용을 짐작하기엔 어렵지 않았다.
나, 시우, 비류아는 순식간에 시선을 교환했다.
그 눈빛의 교환이 끝났을 때, 족장의 방에는 스무 살 차이나는 두 사람을 중매 서던 소년도, ‘와’ 소리 나오던 애송이도, 곤혹에 빠져있던 중년 여인도 없었다.
다만 예언자의 후예와 친위대장, 철의 여군주가 있었다.
“가지.”
비류아가 말했다.
앞장섰다.
나와 시우가 그 뒤를 따랐다.
족장의 방으로부터 달려 나온 우리 셋을 맞이한 것은 혼란의 도가니탕이었다.
“여기, 여기야! 여기에서 불이…!”
“창고에도 불이 났어! 전사들을 다 모아!”
“궁전이 더 급해! 빨리 족장님을….”
연기와 비명.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길 탓에 검붉은 밤, 윤곽만 희끗희끗한 그림자들이 우왕좌왕했다.
비류아가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딱 그쳤다.
“멀쩡한 자는 내 앞에 모여라! 전사는 오른쪽, 전사가 아닌 자들은 왼쪽에 서라!”
은월의 눈동자는 밤 속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시우! 너는 전사들을 추슬러라! 정찰조에 주로 쓰이는 이들을 묶어 화재가 어디어디서 벌어졌는지 알아내게 하라!”
“예, 족장님!”
“전사가 아닌 자들은 5인 1조씩 묶겠다! 조마다 전사가 하나씩 붙어 조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홀수 조는 흙을 퍼오고 짝수 조는 물을 길어오도록 하겠다!”
“예, 족장님!”
“실시!”
거듭, 월족은 전사 집단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통제 하에 들어왔다. 전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민간인들 역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시우가 그들을 지휘하는 동안, 비류아는 날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그대.”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했다.
“예, 님이시여.”
“여러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모든 곳을 조금씩 진화하기보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것이다. 어느 곳부터 막아야 하겠는지 조언할 수 있겠는가?”
음.
‘천사님. 천사님 시야가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제 시야 말씀입니까?]
‘예. 제가 땅바닥 보고 있을 때도 비류아를 찾으셨잖아요. 제 시야보다 넓다는 이야기겠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예, 최대로 하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당신을 중심에 두고 반경 4리 가량입니다.]
반경 4리라. 생각보다 넓다. 500년 뒤를 기준으로 생각해도 반경 4리를 넘는 도시는 대도시에 속한다. 지금 이 월족의 도읍지 정도야 깔끔하게 천사의 시야 안에 들어올 것이다.
‘어디어디 불났습니까?’
[네 군데군요. 창고, 논밭, 궁전 두 군데. 궁전 남쪽이 가장 급해 보입니다.]
좋아, 일단 이마부터 짚고.
“네 방향으로부터 붉은 기운들이 스멀거리는 게 느껴져요. 그 위치는 각각….”
나는 불이 난 방향들을 일러주고, 이마를 짚은 그대로 휘청했다. 마치 힘을 끌어 쓴 나머지 탈진한 것처럼 말이다.
비류아가 손을 뻗어 그런 내 어깨를 받혀주었다. 나는 그 손길에 몸을 기대면서, 하아, 숨을 흘리며 올려다보았다.
“우선 궁전부터… 궁전 남쪽을 최우선으로… 그 다음 창고와 궁전 북쪽을….”
“논밭에 났다는 불은?”
“걱정하지 마셔요.”
식물은 잘 탄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잘 타는 것은 어디까지나 ‘죽은 식물’에 한정된다.
‘살아있는 식물’은 그 수분이 모조리 증발할 때까지 타오르지 않는다. 물이 담긴 푸대 자루에 불이 붙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알아서 꺼질 거여요.”
때는 여름. 대하로부터 물길을 댄 논밭. 습도는 이미 자욱할 터. 거기에 불까지 났으니, 좀 타다가 증발한 수증기로 얼마 못 가 사그라질 것이다.
“알겠다.”
비류아는 대답했다. 그리고 시행했다. 진화(鎭火)는 그렇게 궁전 남쪽부터 시작되었다.
시우가 그 작업을 총 지휘했다.
“시우 님, 사람들 움직임을 좀 더 이렇게….”
“알겠다.”
하는 김에 조언을 한 마디 더하여 기름기를 쪽 빼 깔끔한 진화 동선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때였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남동쪽 건물 지붕 위에 복면을 두른 누군가가 올라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복면.
누군가.
저격.
“님이시여, 피하세요!”
내가 비류아를 끌어당긴 것, 비류아의 눈빛이 변한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비류아는 바로 몸을 틀었고, 팡…! 허공을 갈라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비류아 곁에 있던 친위대원들이 대경하여 외쳤다.
“화살이다!”
“족장 님을 지켜야….”
“족장 님, 안전하신 곳으로…!”
그 목소리를 뚫고서 내가 외쳤다.
“저기!”
나는 아리야가 지목했던 곳을 가리켰다.
“저 쪽 지붕 위! 흉험한 자가 올라가 있사와요!”
비류아가 물었다.
“숫자!”
“한 명이어요!”
“리신, 너만 간다! 추포하도록!”
비류아가 명했다.
지목당한 친위대원, 리신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반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비류아가 친위대원을 한 명만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물었다.
“더 없는가?!”
‘더 없나요?’
곧 대답들이 돌아왔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남북쪽 건물 뒤편에 둘이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저기! 건물 뒤! 두 명이어요!”
“치람, 판지아! 한 쪽은 왼쪽으로, 한 쪽은 오른쪽으로 돌아 둘러싸 잡아라!”
[남쪽에서 남자, 세 명, 달려오다 말고 품속에 도끼 챙겼습니다. 구경꾼을 가장한 채 걸어오고 있군요.]
“저 셋. 불길한 기분이 느껴져요!”
“가온, 바타후! 피자두! 셋이 가서 검문하라!”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물긷기 4조를 습격하려는 이들을 발견….]]
[서쪽. 여자 한 명이 또 불을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들리는 대로 전달했다. 비류아는 그 전달에 따라 인원을 파견했다. 도읍지 곳곳에서 창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류아가 친위대원들을 하나 당 하나씩만 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사 집단 월족 중에서도 최정예 전사들인 친위대원들은 자신들과 같은 수의 적들을 능히 제압했다. 이쪽의 피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남쪽. 여섯 명. 대놓고 도끼 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남쪽, 여섯명!”
“음! 내 눈에도 보인다. 저게 마지막인가?”
‘마지막인가요?’
[마지막입니다.]
“예, 마지막이어요!”
“좋다. 남아있는 친위대는 나와 함께 간다!”
비류아는 남은 친위대원들을 데리고 달려 나갔다. 나도 손에 봉을 든 채 따라갔다.
“하앗!”
비류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도끼를 들고 달려오던 선두의 습격자는 움찔하더니 풀쩍 옆으로 뛰려고 했다.
하지만 비류아는 그 동작을 예상했다는 듯 팔을 틀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독사처럼 허공에서 틀어진 검이 습격자의 가슴을 뚫었다.
“커헉!”
습격자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그 모습에 겁을 집어먹는 대신 포효했다.
“가리비수우우우우!!”
“도끼의 마신이여, 저희를 가호하소서!”
그렇게 소리친 습격자들은 그야말로 광전사들처럼 비류아와 친위대, 그리고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뭐야 이거….’
모가지가 잘려나간 저승 왕국의 가리비수 석상. 마신의 추종자니 어쩌니 하는 불온한 단어들.
‘너네 왜 내 이름으로 이딴 짓거리 하고 그래….’
대충 예상은 했다지만, 실제로 보니 골이 좀 띵해졌다.
◈ ◈ ◈
열광적으로 전투에 임한 마신 추종자들에겐 미안하게도, 현실은 냉혹했다.
용 살해자 비류아와 친위대원들은 일방적으로 마신 추종자들을 학살해버렸다.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 역시 일방적으로 끝났다. 화재도 곧 진압될 터였다.
[검색을 마쳤습니다.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띵해진 골을 짚은 채 천사의 설명을 들었다.
[당신이 모서아의 역할을 맡았던 시절로 가볼까요. 월족은 도끼의 마신 가리비수 및 그와 맺어진 천사 야리소연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예… 그 뭐냐. 소모라였던가? 하여간 그 도시 관리 창에도 그렇게 떴었죠.’
[당신은 임무를 진행하면서 그 가리비수 신앙을 톡톡히 이용해먹었죠.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하여간 뭐든지 가리비수의 뜻이라면서 말입니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월족을 위해서 제가! 아주 그냥 바다 같은 마음으로다가….’
[예,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겠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당신이 해당 임무 종료 직전에 저지른 짓입니다. ‘체면 떨어지게 신의 이름이 가리비수가 뭐냐, 이참에 달의 여신으로 개종시키겠다.’ 정확히 그렇게 말했었지요?]
‘음, 아마도 그런 말을 하기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니겠습니다만은….’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아니… 어차피 월족이 왕국을 세우게 되는 거고… 왕국은 달의 여신을 신봉하고… 그러니까 그냥 좀 앞당긴다 뭐 그런 심정으로…. 거기다가 타이밍이 적절했잖아요? 뭐 문화나 종교를 바꿀 때는 타이밍이란 게 있는데, 그 홍수가 끝나는 타이밍이 아주 그냥….’
[타이밍이 적절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반응도 열광적이었지요. 하지만 열광에서는 언젠가 깨어나게 마련입니다.]
천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끙 소리를 내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천사의 말이 옳았다. 당장 그 직후 시점인 엑스트라 미션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달의 여신이 아니라 가리비수 님을 계속 모셔야한다.’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제가 율법을 내렸던 거기는 한데….’
[예. 그로 인해 월족의 절대다수는 달의 여신을 신봉하게 되었지요.]
천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절대다수’가 ‘모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대홍수와 계명 하사라는 희대의 사건들을 계기로 하여 월족의 절대다수는 가리비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달의 여신으로 갈아탔다.
하지만 일부는 도끼의 마신 가리비수에 대한 신앙을 간직했다. 가리비수를 위한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치길 그치지 않았다. 전장에 나갔을 때 가리비수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리비수 신앙은 용맹함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그런데 달의 여신을 믿는 월족들조차, 이것도 당신의 선동으로 인한 겁니다만은, 자신들이 하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을 기본으로 깔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 자연히 투쟁심도 따라오게 됐고요.]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긴 했지만 역시 좀 심했던 모양이다.
‘하긴 전투 시 분열 금지라는 조항까지 계명에 박아놨으니 완전 잘 나가는 전쟁광 부족이 될 만하지. 약탈을 주 사업으로 삼은 전사 부족이 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고….’
이건 가리비수 신앙과 달의 여신 신앙 사이의 근본적인 궁합은 나쁘지 않다는 건데, 문제는 역시….
‘다른 신에 대한 숭배 금지 조항입니까….’
[예. 당신이 계명에 박아 넣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만든 달의 여신의 계명은 분명하게 다른 신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가리비수의 신도들은 박해받고 배척당해야 했다.
원칙대로라면 그래야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사정에 의해 가리비수 신앙은 알음알음 전해 내려왔고 월족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딱히 막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당신이 일으킨 그 역모 사건. ‘검은 도끼의 밤’이 터졌습니다.]
해당 사건의 주동자는 월족의 제사장이었다. 신전의 권위가 대폭으로 깎여나가게 된 상황, 신관들은 가지치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마신 가리비수 신앙은 완전한 박해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비수 신앙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해졌고 강해져갔다.
깊은 굴에 둥지를 튼 독사가 맹독을 품듯, 음지로 숨어들수록 가리비수의 신자들은 독기를 품었다. 사실 이들에게 박해란 이골이 난 일이기도 했다.
고모라, ‘태양의 아들 마르두크’에 대한 신자들로 가득하던 그 도시에서, 심지어 이방인의 몸으로도 수백 년을 지켜온 신앙이 아니던가.
[그러나 당시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 때의 가리비수 신앙은 마르두크의 신자들로부터 자신들의 동지성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면….]
‘예. 외간 놈들한테 박해받는 건 저 새끼들이 저렇지 하고 넘길 수 있지만, 동족들 사이에서 박해받는 건 더 서러운 법이죠.’
그건 내가 진짜 잘 알지.
같이 뇌물 받은 자식이 자기는 쌀을 좀 받았을 뿐이지 너처럼 금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 삿대질을 할 때는 정말 어찌나 서럽던지….
[간신이여. 개소리에 정신 팔지 말고 집중 좀 해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현실 좀 도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박해의 대상이 된 가리비수 신앙은 고집이 강한 노인들, 전사는 되더라도 군인은 될 수 없었던 독불장군들, 부모를 잃어 노인들의 품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그런 식으로 띄엄띄엄, 하지만 착실하게 전해져왔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난리를 더 거치면서 점차 은밀해졌지요.]
‘내부의 종양이 되었다 이거네요….’
[그렇습니다, 간신이여.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방화를 하고 족장을 습격해올 정도로 말입니다.]
아, 젠장.
어쩌면 좋다냐 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