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마신의 추종자들 (1)
표정을 수습한 시우가 근엄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라.”
많이 만난 것도 아닌데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이었다.
‘얜 이게 말버릇인가보다.’
시우가 말을 이어갔다.
“봉은 마신의 추종자들이 활개 치던 옛 시절부터 쓰이던 무기다. 사실 무기랄 것도 없지. 나무 작대기 들고 설쳐대는 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짓이니까.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기술이 필요해진다. 이 나무 도끼를 들어보도록 해라.”
[ 도끼술(Lv.1)이 발동됩니다. ]
“…과연. 노역을 하는 동안 도끼질도 조금 할 기회가 있었던 모양이군. 제법이지만 진정으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이 목검을 들고 따라해 봐라.”
[ 검술(Lv.1)이 발동됩니다. ]
“그래. 재능이 있어. 확실히 재능은 있다. 근거리 무기에 대해서는 말이지. 하지만 그것 알고 있나? 방금까지 네가 다루어본 무기들과 활은 완전히 다른 이치가 적용된다. 이걸 들어봐라. 먼저 활고리로 줄 다는 것부터 시작해보지. 분명 어렵겠지만….”
[ 수공업(Lv.1)이 발동됩니다. ]
“손재주가 있군. 하긴 노예였지. 하지만 활줄을 거는 것과 당기는 것은 또 전혀 다른 문제다. 하물며 그렇게 줄을 당겨 목표물을 맞추는 것은 말하자면 동산을 오르는 것과 하얀 머리 산을 오르는 것처럼 다른….”
[ 궁술(Lv.1)이 발동됩니다. ]
“너 같은 놈이 왜 돌이나 나르고 있었냐?”
시우가 완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주눅 든 얼굴로 에헤헤 웃으면서 눈을 흘겼다.
“나쁜 핏줄을 이었던 탓에….”
시우는 그 말에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조금 전의 중얼거림 자체가 무의식중으로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뭐, 그 정도면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겠군. 그렇다고 착각해서 나대지는 말고. 어디까지나 사내놈 하나 몫은 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입버릇 같은 말을 한 차례 하더니, 시우는 조금 간격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음, 만약에 네가 여기서 더 무술을 배우고 싶다면….”
말하다가 말고 시우는 말꼬리를 흐렸다. 독심술을 쓰지 않아도 그 이유가 훤히 들여다보였던 내가 손사레를 쳤다.
“아니요, 이 정도로 충분해요. 무, 무엇보다 나쁜 핏줄을 이었던 제가 본격적으로 시우 님의 가르침을 받거나 하면… 그래서 강해지면, 시우 님이 곤란해질 테니까요.”
‘반역 수괴의 직계한테 호신술이라는 명목으로 싸움질 가르치려고 한 것부터가 사실 웃기는 짓이지.’
그 웃기는 짓을 구태여 하려 든 것은, 말했던 것처럼 종자를 챙겨주기 위한 것이 반, 무술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갈구기 위한 게 나머지 반이었을 거다.
갈구는 놈 마음은 갈궈 봤던 놈이 안다고, 나도 태학관 다닐 적에 후배들한테 경전 외우기 시켜봤던 몸이라 잘 안다.
‘근데 정작 내가 잘 하는 것 같으니 욕심이 생긴다 이거고.’
그 심리도 잘 알았다. 똘똘이를 보면 챙겨주고 싶어지는 것이 또 선배 마음 아닌가. 그래서 나도 태학관 다닐 적에 똘똘이들을 제법 챙겨줬더랬다.
‘그렇게 챙겨줬던 놈들도 죄다 나보다 먼저 튀어버렸지만!’
정말이지 후배 놈들 키워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하지만 시우는 아직 그 무상함을 알기에는 이른 나이였는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어차피 족장님께서 네 입지를 보장하신 상황이다. 네가… 이상한 생각을 품는다고 해도 어차피 나보다 더 족장님 가까이에 있지는 못할 터.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혹여 네가 전사가 되고 싶다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러운 종자니, 너 같은 게 족장님 곁에 있다는 건 유래가 없는 일이니 어쩌고 했으면서 이제는 숫제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귀엽네.’
나는 에헤헤, 선량하니 웃었다.
“괜찮아요, 시우 님.”
‘어차피 이 이상은 안 되기도 하고.’
병영 건물이 지원해주는 스킬은 딱 Lv.1까지였다. 날 반역 수괴의 더러운 씨앗이 아니라 무술 천재의 씨앗쯤으로 여기게 된 시우에겐 미안한 노릇이었지만, 가르쳐봤자 지금 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 사정을 시우가 알 턱이 없었다.
그렇지만 날 둘러싼 여러 정치적 제반 사정을 떠올렸는지 시우는 침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다.”
그렇게 말하는 시우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어느덧 혐오감과 경계심이 아닌 아쉬움과 착잡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정도 내게 마음을 열었다고 봐도 좋은 상황.
나는 조심스레 봉을 내려놓고 시우를 올려다보았다.
“저, 시우 님.”
“음.”
“그… 제가 돌만 나르다보니 아는 게 통 없어서요. 월족이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선조의 죄를 씻는데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싶어서….”
“예언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지 않나?”
“그 힘이란 걸 제가 완벽하게 다루지 못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좋아요.”
시우는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오래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선선히 자신이 아는 것들을 입에 담았다.
“내우외환에 처했다는 사실은 들었겠지.”
“네….”
“그 중 내우는 월족 내에 마신의 추종자들이 숨어있다는 것과 족장님의 신변에 관한 것, 그리고 외환은 ‘나투아’와 ‘알실라’와 거기서 온 사절단이다.”
‘나투아와 알실라라….’
내 기억이 옳다면 왕국 남방에 존재했다던 두 고대 국가였다.
주온 왕자에 대한 것이 그랬듯 이 두 나라에 대한 이야기 역시 역사보다는 전승에 가까워 많은 걸 알지는 못했다.
고작해야 나투아는 해상 무역에 능해서 바다 건너 존재하는 섬 사람들과 친교가 깊었고, 알실라는 야금술이 뛰어난 자들로 야만족들과 두루두루 친했다는 것 정도?
‘어느 쪽이건 앞으로 100년 내에 왕국에 합병당하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제가 정비되고 ‘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하는 만큼, 사실 왕국의 진정한 개국 시기는 그 삼국통일 이후로 봐도 좋으리라.
어쨌든.
“둘 중 마신의 추종자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족장님의 신변, 그리고 나투아와 알실라의 사절단이 가장 큰 문제다. 이대로는 둘 모두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게 된다.”
시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자연히 의아해졌다.
“족장님의 신변과 사절단이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 나투아에서는 둘째 왕자를, 알실라에서는 왕의 동생을 보내왔다.”
음? 둘째 왕자와 왕의 동생이라고?
‘일개 사절단에 포함되기에는 너무 신분이 높고, 그렇다고 전문 외교 업무를 맡기에도 좀 애매한 인선인데… 어, 잠깐만.’
둘째 왕자나 왕의 동생쯤에 딱 맞는 외교 업무가 있기야 했다.
‘그것도 족장의 신변과 관계있는 외교 업무가, 그야 있기야 하지만….’
나는 조심스레 시우의 눈치를 살피었다.
“혹시, 족장님께서 아직…?”
“그렇다.”
시우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님께서는 아직 일가를 이루지 않으셨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정리해보자. 아니, 정리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마를 짚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누르면서, 겉으로는 순진한 태도를 계속하여 가장하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나투아와 알실라에서… 족장님과 연을 맺기 위해….”
“그렇다. 정략결혼을 위해 장기 말들을 보내온 셈이지.”
이런 미친.
‘아직 혼약을 안 했다고? 아니, 아니지. 꼭 혼약을 안 했어도…. 아니, 아냐. 비류아 성격에, 혼약을 안 했다는 이야기는….’
“설마 족장님의 후계자 되시는 분도….”
“아직 안 계시다.”
정말 미치고 팔딱 뛰겠다.
나는 비류아의 나이를 떠올려보았다.
‘지난 미션 때 비류아 나이가 대충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지. 그럼 30년 지난 지금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 맞나?’
맞다고 해도 빠듯한 것은 확실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많아야 서넛 정도가 아닐까?
‘은월의 눈동자 발현률이 직계에서도 그렇게 높지 않다는 사실까지 감안하면….’
몇 번이나 언급했듯 생전에 모셨던 마지막 여왕 폐하도 산골을 뒤진 끝에야 겨우 찾았었다.
이렇게 격세유전으로 드문드문 발현되는 이들까지 싹싹 긁어모아야 할 정도로 은월의 눈동자 발현률은 높지 않았다.
‘이건 완전히 비상사태잖아!’
은월의 적통이 개국도 하기 전부터 끊어지게 생긴 것이다.
‘왜 임무 내용이 개천인가 했더니만…!’
바로 조금 전, 나는 이 미션에서 달성해야 할 두 번째 목표를 ‘가문 세우기’로 정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가문을 세워야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왕가(王家)가 없어!’
비류아. 그녀 역시 자신의 가문을 만들어야 했다.
“저어….”
생각을 마친 나는 조심스레 시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족장님께서는… 나투라의 왕자와 알실라의 왕제(王弟) 중 어느 쪽을…?”
“어느 쪽도 바라지 않으신다.”
시우는 대단히 분개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두 곳 모두 참으로 얕아빠진 수작 아닌가. 우리 월족을 결혼 한 방으로 집어삼키고자 하는 천박한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짓거리다.”
음.
‘비류아의 나이가 있으니까…. 아이를 낳기 어렵다는 거야 나투아 쪽도 알실라 쪽도 다 알겠지. 그럼에도 결혼하려 한다…. 결혼으로 일단 촉수 뻗어놓고 비류아가 아이 없이 죽기를 기다리는… 아니지. 아이가 생겨도 문제야.’
그 애기씨가 은월의 눈동자를 발현할지 안 할지도 문제고, 은월의 눈동자가 발현된 애기씨가 생긴다고 해도 아이가 자라 권좌를 물려줄 나이가 될 때까지 지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결혼하자마자 암살하려 들지도….’
그런 식으로 ‘가문을 삼키는’ 것은 왕국 귀족 가문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확실히 어느 쪽도 택해선 안 되겠어요….”
나투아든 알실라든, 왕자든 왕제든 만나볼 것도 없었다. 월족이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비류아는 월족 바깥 인물과 결혼해선 안 되었다.
“그것은 예언의 힘으로 하는 말인가?”
시우가 달라붙듯 물었다. 나는 지금 비류아의 나이가 너무 많으며,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시우가 걱정한 바로 그 문제가 벌어질 것이기에 하는 말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예… 두 곳 중 어디를 택하더라도 불길한 미래가 어른거려요!”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은 방금 같은 말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역시 그런가…!”
시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예언의 힘을 의심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 예언이니 점술이니 하는 게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거라지만… 너 참 알기 쉽다.’
알기 쉬운 김에 몇 마디 더 해주기로 했다.
“족장님께서 월족 내부 인물과 혼약을 맺게 되신다면…. 그래야만 밝은 미래가 있을 것 같아요.”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은 방금 같은 말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역시 그랬나…!”
‘진짜 알기 쉽네.’
“그 중에서도, 족장님께 가장 가까운 분…. 월족을 족장님처럼 아끼실 수 있는 분과 맺어져야만, 족장님께도 월족에도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방금 저 어렴풋이 그러한 풍경을 보았어요…!”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은 방금 같은 말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역시 그랬던가…!”
이 시점에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류아에게 충심이 깊은 젊은 친위대장, 고아 출신이어서 텃세부릴 가족 문제로부터도 깨끗할 무술의 달인이 내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음.’
“앗, 아앗…! 시우 님…!”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균형을 잃은 듯 작게 휘청거렸다. 곧바로 시우가 내 몸을 붙잡아 쓰러지지 않게 받혀주었다.
“무, 무슨 일이냐?”
“저, 보았어요…! 보고 말았어요!”
“무엇을 보았다는 거냐!”
“족장님과 연을 맺고, 그 곁을 지킬 운명의 남자를…!”
시우가 눈을 부릅떴다. 몸을 잡은 양팔에 팍 힘이 들어오는 바람에 무진장 아팠지만, 시우는 그런 날 흔들기까지 하면서 토혈하듯 외쳤다.
“그 남자가 누구냐?!”
“바로… 시우 님이세요…!”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은 방금 같은 말을 무척이나, 진심으로, 차마 누구에게도 물어보진 못했고 비류아 본인에게도 언감생심 말조차 꺼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누군가로부터는, 그 누구가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듣고 싶어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시우는 긴 숨을 내쉬었다. 미남자는 신음하듯 읊조렸다.
“역시 그랬었던 것인가….”
‘와.’
지금이라면 천사가 어떤 마음으로 나한테 ‘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와’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