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나라를 살리는 네 번째 방법(3)
은월의 눈동자가 달의 이름을 따서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햇볕을 받아 비로소 빛을 내는 달은 하늘에 뜬 거대한 거울이다. 은으로 빚어낸 거울은 거기에 비친 사람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추어준다.
야리소연의 사납지만 정 깊은 눈동자도, 아리야의 부드럽지만 강인하던 눈동자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비류아의 차분하면서도 냉철한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내가 선명하게 비쳐보였다.
그동안 근육질에 떡대에 백발 노장에, 하여간 그런 빙의체만 갈아타다가 이번 몸을 보니 꼭 생전에 내가 어릴 적 같았다.
한 마디로, 씻기고 입힌 지금 내가 깃들어있는 이 노예 소년은 제법 예뻤다.
“앉도록.”
나는 두 말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고개 숙인 나를 한참 쬐어대던 비류아는 뼈와 비늘을 엮어 만든 옥좌에 앉았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음.
“크나큰 죄인의 후예… 라고, 철들 무렵부터 들어왔었사와요.”
꿇어 앉아 고개를 조아린 나는 더 이상 비류아의 몸을 볼 수 없었다. 다만 비류아의 그림자가 작게 움츠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픔과 회한이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그리 들었느냐.”
“예….”
“그러한가.”
비류아는 말이 없어졌다.
그 분명한 죄책감을, 나는 모르는 체하면서 더욱 자극했다.
“아마도, 그런 죄인의 후예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님에 대한 꿈을 꾸어온 것은. 님과, 시우 대장님과, 다른 월족 여러분에 대한 꿈을 꾸어온 것도…. 그것이 징벌이라고, 선대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네가 영영 속할 수 없게 된 세계라고, 그리 믿어사왔어요.”
흑, 소리를 내면서 나는 콧물을 삼켰다.
“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믿었사온데….”
비류아의 침묵이 깊어졌다. 그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는 곧바로 이마를 그 그림자에 갖다 찧었다.
“아아! 제 좁아터진 소견머리를 용서해주세요, 님이시여! 저는 그렇게 괴로워하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 거지요…? 제 님께…, 당신께 도움이 되기 위해 그런 힘을 갖고서 태어났던 거지요…?”
장절하기 그지없는 간원. 비류아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말해보도록. 단지 그렇게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대강 느낄 수 있어요.”
‘과거시 쓸 수 있음.’
“앞으로 다가올 일도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사와요.”
‘예언도 할 수 있음.’
“꼭 잠들어있을 때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깨어있을 때에도… 갑자기 선 채로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는 해요.”
‘굳이 잠자리에 들 필요는 없음.’
“다만, 다만 체력의 소모가 크고… 또, 매번 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근데 안 될 때도 있음.’
“이, 이상이에요…. 번잡하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긴장했나봐요….”
나는 어깨를 떨면서 흐느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핵심이 되는 정보들을 모두 건네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가.’
‘그 제한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모두 전한 만큼, 나를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도 자연스레 보일 것이다.
‘구라도 좀 섞여있지만.’
그거야 몸값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의 몸값은 자유의 범위를 의미한다. 기껏 노역장에서 빠져나왔는데 그런 자유가 있어야 노예 신분도 벗고 가문도 세우고 임무도 완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십 할, 아니 백 할 가능합니다.’
천사의 물음에 나는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비류아가 은인의 후손인 저를 이 꼴로 놔두고 있는 건, 비류아가 족장이기 때문이지요. 꺼내주고 싶어도 꺼내줄 명분이 없고, 그렇다고 명분 없이 꺼내자니 자신의 권좌를 공고히 했던 숙청이 근본부터 흔들려서 그러는 거예요.’
자, 그런데 그 내가 예언의 힘을 가졌다면? 너는 돌이나 나르기엔 참 아까운 노예로구나 하면서 냉큼 꺼내줘야 마땅하다!
‘저를 내버려둔 게 족장으로서 당연한 판단인 것처럼, 저를 꺼내주는 것도 족장으로서 당연한 판단인 겁니다.’
이것은 지당한 결론이어서 사적인 감정 따윈 일절 개입할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비류아의 죄책감을 마구 자극하는 식으로 말한 건 어디까지나 덤을 좀 더 받기 위해. 그리고 그런 힘을 가진 제가 노동으로 교화되어 경계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서인데….’
[….]
‘…음, 천사님?’
왜 말이 없담.
의아하게 느끼고 있자니, 천사는 한참을 침묵했다가 되물었다.
[간신이여.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압니까?]
‘어떤 말이요?’
[다시 말해, 비류아는 제사장의 핏줄을 얼마든지 노역장에서 꺼내줄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지 못한 것은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는데 아주 약간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뜻이고요.]
‘어… 아주 약간은 아니죠. 말했듯이 숙청을 한 게 근본부터 흔들리는 탓에--’
[그렇다고 해도,]
마치 채찍이 맨땅을 때리듯, 천사의 목소리는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가능하기는 했다는 것 아닙니까. 감수하려고 했다면 감수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만회하려 했다면 만회할 수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음.’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잖습니까.]
나는 지금 고개를 조아리는 자세였다. 물론 눈앞의 비류아에게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난 내가 지금 천사님께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당연하잖습니까.’
하지만 그 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비류아는 군주니까요.’
야리소연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리야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그런 것쯤 ‘사소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권위가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그야말로 어떻게든 해주었을 것이다. 특히 아리야는 내가 부족원의 손모가지를 자른 것을 두고 탓하기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렀다. 월족은 이제 그 규모가 커졌다. 월족의 우두머리는 벗하여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 군림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들도 존재한다.
‘집단의 위에 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까?]
‘천사님.’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왕국이 세워지면 집단의 규모는 앞으로도 커질 겁니다. 이런 일은 계속해서 벌어질 거고요.’
[그러니 익숙해져야 한다는 겁니까?]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나는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나라를 살린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아니요.]
그 정적은 천사의 부정으로 깨졌다.
[아닙니다, 간신이여. 나라를 살린다는 것은, 결코 그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천사는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바로 조금 전에, 앞으로 더 노예로 태어날 바에야 왕국과 동반자살하고 끝내버리자고 했었지요. 그런 방식으로 살아날 나라라면, 그리하여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왕국이라면, 간신이여. 그런 나라를 무엇하러 살리고, 무엇하러 유지시킵니까. 그저 천명이 바뀐 것이라 여기면 되는 것을.]
그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끌려와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구르게 됐노라고, 그게 뭐 내 탓이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왕국을 살려야 나도 죽은 목숨 다시 건지고, 높은 자리 꿰어 차서 꿀을 빨 수 있지 않느냐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어쩐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대신에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천사님. 솔직히요. 지금 내 몸이 속한 핏줄, 그러니까 제사장 핏줄이 무고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가 빙의해서 급 희생 안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주온 왕자랑 쿵짝 맞추면서 얼마나 해 처먹었겠어요.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 천사님?’
[하지만 그래도 그건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신이 지금 빙의한 몸은 10대 중반도 안 되었습니다.]
‘그건 연좌제가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되어서 논점이 어긋나는 것 같은데….’
[어긋나지 않습니다, 간신이여. 제가 모시는, 그리하여 당신에게 기회를 준 자모신의 교리는 세상에 잘못 태어나는 존재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에 비추어 따지자면 연좌제는 잘못된 게 맞겠네요. 그치만 천사님. 월족은 그 교리를 몰라요. 자모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천사님의 존재조차 모릅니다. 왕국 500년 역사 속에 나름 학식 있던 저조차 몰랐는데 지금 쟤들이 뭘 알겠어요? 그저 제가 날조한 석판을 보고 달의 여신이 있는 줄 알 뿐이고, 그 전에는 마신 가리비수를 모셨을 뿐이죠….’
임무에 들어선 나로서는 저승에 있을 천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긴 어차피 베일을 두르고 있을 거라 볼 수 없을 얼굴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지금, 천사가 입술을 깨물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군요.]
그 말에 더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긴 생각을 마치고 일어선 비류아가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개를 들라.”
나는 그렇게 했다.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여군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월족은 외우내환의 위기에 처해있다.”
결정을 내린 눈빛이었다.
“그대를 내 곁에 두겠다. 그 사실을 나의 친위대에 전달할 것이다. 친위대장 시우의 종자가 되어, 월족에 닥쳐올 변고들이 있다면 감지하는 즉시 전하도록 하라.”
원하던 말이었고, 노리던 위치였다.
“예, 님이시여…! 최선을 다하여 돕겠사와요…!”
하지만, 그렇게 뜨겁게 소리치는 내 마음은 어딘지 조금 힘이 빠져 있었다.
◈ ◈ ◈
그로부터 한동안 천사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자신이 천사를 달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음.
‘고맙소, 아리야.’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천사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즉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리다. 다만 지금은 좀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내 종자라고?”
역시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은,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는 미남자, 친위대장 시우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예, 시우 님. 족장님께서 결정한 일이세요….”
시우는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여족장의 충신은 더 딴지를 거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기다란 막대기였다.
“봉이라는 것이다.”
시우가 말했다.
“너처럼 부정한 핏줄을 타고 난 놈이 돌 외에 다른 것을 손에 쥐어본 적이 있을 리 없겠지. 가벼운 호신술 정도는 가르쳐주겠다.”
오.
‘좋은 놈이네.’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시우는 눈을 부라렸다.
“착각하진 마라.”
시우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족장님을 가장 곁에서 지키는 전사다. 그런 내 종자라는 놈이 무기 하나 다루지 못해서야 나 자신이 수치스럽기에 지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네가 가졌다고 여겨지며 족장님께서 아끼고자 하는 기이한 힘을 적들에게 넘어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다.”
말하며 시우는 자신도 봉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 팟 소리와 함께 내 앞머리가 휘날렸다. 봉을 쥔 시우가 느닷없이 내 머리에 찌르기를 날려왔던 것이다. 봉끝과 내 이마 사이에는 정확히 머리카락 하나 간격만 놓여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달인이다!’
시우랑 닮은 부분이 있던 은월수호기사단장보다는 조금 모자랐지만, 야만족에게 붙어먹었던 수문장 급은 되는 달인의 기술이었다.
‘하긴 비류아 자체가 이미 용 살해자였지.’
그 친위대장이니 이쯤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시우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봉을 회수하며 말했다.
“따라해 보도록.”
나는 시키는 대로 봉을 붙잡았다.
“어… 이, 이걸 잡고, 그러니까….”
“아니. 그보다 더 아래를 붙잡아라. 그리고 발바닥을 땅바닥에 붙여라. 발바닥으로부터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다시 어깨로, 어깨에서 단번에 봉 끝으로 무언가를 쏘아낸다고 생각하며 단번에 내질러라.”
말하면서 시우는 이번에는 천천히 견본이 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치만 처음 봉을 잡아보는 내가 본다고 뭘 알겠는가.
시우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물론 이 찌르기 동작 하나만 숙달하려 해도 몇 주일은 걸리겠지만--”
그 말이 중간에 끊어진 것은 내 찌르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 창술(Lv.1)이 발동됩니다. ]
호흡을 죽이고, 발바닥에서 무릎, 무릎에서 허리, 허리에서 어깨, 어깨에서 팔꿈치, 팔꿈치에서 손, 그리고 다시 봉 끝까지, 단숨에 쏘아내듯 내질렀다.
병영이 주는 스킬 효과, 창술 Lv.1로 그럭저럭 쓸 만한 자세를 선보인 내 모습에 시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주눅 든 태도와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이, 이렇게 하는 것… 맞나요?”
시우는 조금 지나서야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처음 잡아보는 것 맞나?”
“네… 그… 어, 어쩐지, 잡아보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것 같아서….”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눈길로 나를 쓸어보던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재능이 있나 보군.”
스킬이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