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나라를 살리는 네 번째 방법(1)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북치는 소리였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철컹, 철컹. 창칼과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그 위에 얹혔다. 그것들은 다시금 북 치는 소리에 파묻혔고, 그 북 치는 소리는 또한 말발굽과 청동의 우짖음으로 들썩였다.
소란이 가까워졌다. 노예들이 먼저 엎드렸다. 감독관들이 뒤를 따라 엎드렸다.
멀찍이서 일어난 먼지가, 쿵, 쿵, 북 치는 소리를 따라 대류하며 흘러왔다.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흙먼지가 앉은 머리와 어깨들을 너른 그림자가 짓밟았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커다란 해파리처럼 하늘거리는 그림자.
여족장 비류아와 그 친위대가 도착한 것이다.
‘규모가 커졌네.’
족장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자기 손으로 반역을 제압했던 만큼 호신에 강박관념이 생긴 것일까?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는데….
‘안 보여.’
노예 신분인 나는 당연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나마 앞렬에서 그러고 있긴 한데, 얼굴을 들 수 없는 만큼 비류아의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운데 있으려나? 음, 어떻게든 얼굴 도장을 좀 찍어야하는데….’
[노예면서 얼굴 도장을 찍어 뭘 어쩔 생각입니까, 간신이여?]
‘그거야 그 때 가서 정해야 겠지만요.’
어느덧 친위대의 그림자가 엎드린 내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 때 가서 정한다고 해도, 비류아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겠군요. 지금 상황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야 불가능하겠지만, 천사님.’
천사의 말처럼 나는 천하디 천한 불가촉천민 신세. 친위대의 행렬 앞에서 언감생심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처지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지금 비류아 여족장이 어디쯤에 있습니까?’
이렇게 또 다른 ‘눈’이 있는데!
[…정말이지 질렸습니다. 당신에겐 신의 사도와 그 종복마저 도구로군요.]
‘에이, 도구라뇨.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운명 공동체 아닙니까, 천사님.’
[말이나 못하면. 아니, 생각이나 못하면 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안 되는군요. 생각을 못 해서야 왕국을 살리지도 못할 노릇이니까요.]
천사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 비류아 여족장의 위치는 아리야가 찾아주시고. 천사님. 기왕 운명 공동체 노릇 하는 김에, 비류아 여족장의 과거나 좀 훑어보고 계셔주십쇼. 검색어는, 그렇네요. 비류아 여족장 혼자밖에 모를 것들. 심복조차 모를 것들로 탁 좁혀주시고.’
[어떻게 써먹으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간신이여. 다만, 비류아의 위치 찾기를 아리야에게 넘길 필요까진 없겠습니다.]
‘음? 어째서요?’
되물은 순간 나는 북 소리가 멎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발굽 소리도, 갑옷과 창칼이 덜그럭거리던 소리도 멎어 있다. 그 뿐일까, 일렁이던 그림자도 멈추어있다.
대신 퍼져 나가는 것은 웅성거리는 분위기.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고개를 들 것을 권고합니다.]]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은빛의 달과 눈을 마주쳤다.
‘왕녀.’
아니, 이제는 여족장이 된 비류아가 말에 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나는 바로 지난 미션에서 왕녀 시절의 비류아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족장이 된 비류아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3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했다.
30년.
비류아의 수식언들로부터 깨닫고 있던 일이었다.
한 사람이 벌판을 정복하고, 여덟 부족의 악몽이 되며, 차후 왕국의 영봉(靈峯)이라 불리는 하얀 머리 산을 답파하고, 그 호수에 살던 괴물을 죽이는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비류아의 몸은 왕녀 시절처럼 멀끔하지 못했다. 청동 갑옷과 가죽 망토로도 가릴 수 없는 상처들이 이마부터 발끝까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 흉터 하나하나가 누대에 걸쳐 이야기될 만한 과업들을 노래하는 듯 했다.
왕녀는 족장이 되면서 세상에 담금질 당한 것이었다.
노파라고 부르기엔 살 날이 창창하고, 처녀라고 말하기엔 원숙하기 그지없는 중년의 여족장은 조용한 눈빛으로 나를 쬐었다.
그런 비류아의 모습에 감독관이 당황했다.
“조, 족장님. 이 천한 노예 놈이 무슨 무례한 짓이라도…?
비류아는 대답 대신 한 차례 감독관을 바라보았다. 감독관이 움찔하여 입을 다물자 그녀의 시선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좋아.
‘얼굴 도장은 찍었고.’
나는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패들을 점검했다.
‘먼저 예언.’
이건 상대가 나를 신뢰해야 하는만큼 아직은 사용하기 어렵겠지.
병영이 주는 Lv.1짜리 각종 무술들. 이건 애초에 보여줄 기회조차 없을 것 같다. 노예한테 무기를 줄 리 없잖은가.
‘그 밖에는 농업, 통치술, 수공업, 그리고….’
나는 머릿속으로 이번에 받았던 보상의 정보를 되새겼다.
+
[ 시설물: 시왕의 금자탑(金字塔) ]
효과: 계급 생성. 독심술(소모성, 임무 당 3회) 부여
+
‘독심술!’
세 번밖에 쓸 수 없는 능력이었지만 아까워할 때가 아니었다. 사람의 심리를 읽는 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왕녀 시절에도 무표정하던 비류아는 30년이 지난 지금 좀 더 두꺼워져 있었다.
스킬로 뚫어야 한다.
[ 독심술을 사용합니다. (2/3) ]
[ 비류아 족장의 생각을 읽습니다. ]
곧바로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이 아이.> <마지막.> <말했었는데.> <당신.> <기억.> <본보기.> <제사장.> <배은망덕.> <나.> <안타까움.> <혈족.>
잠시 어질했다.
얇은 얼음판에 박치기를 한 것처럼 무수한 생각의 파편들이 박혀 들어왔다.
‘…독심술이란 거, 이런 능력이었군요.’
천사나 아리야와 대화를 나눌 때처럼 깔끔한 문장으로 떠오를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비온 날의 죽순처럼 불쑥불쑥 떠오르는 파편화된 사고들을 볼 수 있는 것이 독심술의 힘이었다.
[제대로 된 문장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
‘맞는 말, 인정합니다. …그러니 제가 정리해야겠지요.’
나는 비류아의 생각을 문장으로 정리했다.
<제사장에게 당신을 기억하겠다고 말했었는데, 나는 당신의 혈족을 이런 상태로 놔두고 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과연.
‘이건 일이 좀 쉬워지겠는데요?’
숙청으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비류아는 제사장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음.”
하지만 그뿐.
비류아는 월족을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모반자의 혈족을 어떻게 해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마음의 빚으로 남는다고 해도 그러했다. 그저 기억하고 눈여겨볼 뿐. 군림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비류아는 몸을 돌리려 했다. 천한 노예 소년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마저 시찰을 하기 위해 말을 재촉하려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순간을 노리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 아아….”
나는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고는, 비류아를 올려다보면서 소리쳤다.
“나의 님이시여…!!”
◈ ◈ ◈
세상이 얼어붙었다.
그 속에서 나는 계속하여 비류아를 올려다보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그런 내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천사의 목소리였다.
[…이건 대체 또 무슨 지랄이냐고 묻진 않겠습니다만, 간신이여. 한 가지만 여쭙시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눈물을 뽑을 수 있습니까?]
‘요령을 여쭈셔도 쫌… 숨 쉴 때 어떻게 쉰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요? 그냥 쉬는 거지.’
[과연….]
‘하여간 이쪽 신경 쓰지 마시고 과거시나 계속 써주십쇼.’
그렇게 천사를 정리한 나는 계속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아아, 오셨군요, 드디어 오시었군요! 봄에 돋아난 잎을 하나씩 밟고, 여름의 소낙비가 내린 자국을 한 점 한 점 더듬어, 드디어 제 앞에 오시었군요…!”
비류아가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나는 쿵,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꿈 속의 님이시여…!!”
그야말로 영혼을 담은 외침.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감독관의 우두머리였다.
“이, 이 새끼가 미쳤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야 임마! 고개 안 처박아!”
“천한 반동 놈의 새끼가!”
돌발 사태에 당황하여 채찍을 추어올리는 감독관들. 그 소리들을 꿰뚫으며 내가 외쳤다.
“꿈을 꾸어 왔사와요…!”
고개를 조아린 채 계속해서 외쳤다.
“항상, 항상 꿈을 꾸어 왔사와요! 어릴 무렵부터… 영문도 모르고 계속 꿈을 꾸어 왔사와요. 어두운… 어두운 달밤에, 창칼이 날뛰어 소란스러운 그 밤에….”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지난 임무의 마지막 장면.
“님께서, 아아, 달을 머리에 인 채 칼을 들고 계셨사와요….”
날 내려다보던 비류아 왕녀를 떠올리면서 눈에서는 계속 줄줄 눈물을 흘려댔다.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지요…. 그러며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거리셨어요, 말씀하신 것이어요, 제게, 님께서는--”
“이 미친놈이 진짜!”
팡! 허공을 뜯으며 날아온 채찍이 내 어깨를 후려쳤다. 단박에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느낌, 고통은 조금 뒤에야 찾아와 비명을 쥐어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달려든 건장한 감독관들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깨를 낚아챘다. 허리를 짓밟았다.
나는 그렇게 사냥당한 짐승처럼 장정들의 손길에 포박당했다.
“노예 놈이 어디서 개소리를 지껄여!”
“죄송합니다, 족장님! 저희가 관리를 똑바로 못해서…!”
“이런 실태를 저지르다니 차마 드릴 말씀이….”
그때였다.
스윽. 비류아가 오른손을 들었다.
하나의 손동작에 불과했지만 거기에 담긴 무게는 정신없이 떠들던 감독관들의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렇게 좌중을 짓누른 월족의 여족장은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를 꿈에서 보았다고 했느냐.”
감독관들의 우악스러운 손들로 틀어 막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비류아는 눈짓으로 그들이 손을 풀게 만들었다.
내가 흑, 소리를 내면서 입가를 짚고는 훌쩍였다.
“그렇게 말씀드렸사와요, 님이시여….”
“내가 꿈에서 네게 무언가 말했다고 했더냐.”
“예, 님이시여.”
“무어라 말했더냐.”
문답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노예 노릇 때문에 건어물 비슷한 신세인데 탈수증이 올까 쪼끔 걱정되지만 필요 경비라고 생각해야지.
“저를… 잊지 않으시겠다 하셨어요….”
비류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비류아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 뿐만이 아니어요…. 계속하여, 계속하여 저는 님께서 나오는 꿈을 꾸어왔어요….”
“어떤 꿈을,”
비류아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어떤 꿈을 또한 꾸었더냐?”
나는 곧바로 천사를 불렀다.
‘천사님. 그래서 뭐 좀 과거시로 본 것 있습니까? 비류아 본인 외엔 절대 모를 것들이요.’
[와.]
천사도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와, 진짜.]
‘와 진짜 뭐요. 아 이 쪽은 급하거든요? 빨리빨리 좀 부탁드립니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음, 그러니까 비류아 족장이 나른한 들판을 정복하려 하기 전날 밤에….]
나는 천사가 불러주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입에 담았다.
“어떤 천막에, 님께서 앉아 계셨어요…. 홀로 앉은 채 한숨을 내쉬시었지요…? 그러며 중얼거리시기를, 아아, ‘언제까지 이렇게 천하의 피를 빨면서 살아야하는가. 내 대는 견디더라도 아이들이 빨아먹을 피는 남아나겠는가. 저 밀을 기르는 이들처럼 발붙여 살아갈 터전을 잡아야한다’라고….”
[그녀가 하얀 머리용과 싸우던 무렵의 일입니다만….]
“용과 대적하는 님의 모습도, 저, 꿈에서 보았어요…! 산맥의 수염처럼 새하얀 숨을 흘리고 계셨지요…. 고개를 수그린 채 중얼거리시기를, ‘전쟁 없이 산맥 남쪽을 산하에 들이기 위해서는 네 머리가 필요하다. 내가 너로 인해 흘리는 피 한 방울마다 우리 부족원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 모습을 꿈에서 볼 때마다 저는 지금처럼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비류아가 여덟 부족의 악몽이라 불리게 된 사건은 사실….]
“아, 그 꿈도 꾸었사와요…. 당신께서 홀로 산야에 앉아계셨지요. 뻗어나가는 불길을 바라보고 계시었어요. 그것은 당신께서 지른 불이 아니었지만, 당신은 무명보다 악명이 필요한 시기라면서--”
“그만.”
비류아가 내 말을 멈추게 했다.
“그만하여라.”
나는 바로 말을 끊으면서 흐느꼈다.
한 쪽 손으로 입가를 움켜쥔 채 한 떨기 은방울꽃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선대왕을 모시던 상선(尙膳) 영감을 흉내 내니 완벽한 자세가 나왔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상선 영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합니다.]]
[환관…. 그러니까 내시 우두머리를 뜻하는 관직 용어입니다.]
어라, 의외로 잘 아시네 천사님.
아무튼.
“네가 말한 모든 것들이 정녕 네 꿈에 나왔더냐.”
비류아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눈동자의 흔들림은 감추지 못한 채였다.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을 평생 노역장에서 보내온 노예 소년이, 그것도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인물의 후예가 입에 담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눈으로는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이 심장을 걸고 맹세하건대 사실이어요…!”
[간신이여, 이것도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당신은 심장 없이도 살 수 있는 겁니까?]
‘아유 천사님도 참. 그런 사람이 천지에 어딨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걸어댈 수 있는 겁니까?]
‘왜 못 겁니까? 어차피 제 심장도 아닌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