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38화 (38/261)

38. 뿌려진 씨앗들 (2)

“허억, 후우….”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든 폐든 어느 한 쪽은 터질 것처럼 굴었다.

“돌을 날라라!”

“너희들의 원죄를 몸으로 갚아라, 이 더러운 씨앗들아!”

곳곳에서 채찍이 허공을 후벼 팠다.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움츠리게 만드는 소리, 그로 인해 일하는 손을 멎게 하고, 다시 그로 인해 채찍이 기어코 살을 뜯어먹게 만드는 소리였다.

“아이고!”

“일하겠습니다, 일하겠습니다!”

“제발 채찍질만은!”

그야말로 지옥. 그 지옥에서 나는 돌을 날랐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지금 예언자님께서 놓인 상황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예. 아리야. 당신이 무엇을 의문으로 여기는지 압니다.]

돌을 날랐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자신이 모서아와 결혼하였음을 지적합니다.]]

[여족장 비류아가 당신의 후예. 간신이 전 임무에서 빙의했던 제사장 역시 당신의 후예. 따라서 그 제사장의 혈족이자 간신이 지금 임무에서 빙의한 노예 소년 역시 당신의 후예라는 거겠지요.]

돌을 날랐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그렇게 같은 핏줄인데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항의합니다.]]

[아리야. 당신은 커다란 시간 단위와 자그마한 시간 단위를 구분해야 합니다.]

건설 현장은 가시처럼 돋아난 산의 입구였다. 돌들도 산을 닮아 기세가 날카로웠다. 모난 돌은 손바닥을 베고 어깨에 파고드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땀과 피가 쉴새없이 흘렀다. 아리야와 천사가 주고받는 이야기도 뒤섞여서 흘렀다.

[가리비수와 야리소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마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겠지요. 둘의 첫 번째 아이는 옆 부족의 장녀와 결혼을 하고, 두 번째 아이는 또 다른 부족의 차남과 결혼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 대만 이어져도 극적인 분화가 이루어집니다.

‘가리비수와 야리소연의 직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아리야 당신 같은 이가 존재하는가 하면, ‘같은 조상을 둔 월족의 일원’이라는 사실 외에는 물려받지 못한 모서아 같은 이가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모가 난 돌은 또한 동이 날 수 있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무렵에 빙의한 탓도 있고, 지금 내가 소년의 몸인 탓도 있어, 주변에는 혼자 옮길 만한 돌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기에 아리야와 모서아, 당신들은 같은 조상을 두었음에도 다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다시 긴 시간이 흘렀지요. 단, 가리비수와 야리소연 시절과 달리 아리야, 당신은 성녀가 되었고 모서아, 그는 예언자가 되었지요. 세속의 지배자와 영혼의 책임자. 두 개의 유산이 생겨난 겁니다.]

나처럼 헐벗은 이들과 힘을 합쳐 큰 돌을 옮기거나 감독관들의 감시 하에 산을 올라야만 했다.

[그 결과 당신과 모서아의 직계들은 두 계파로 갈라지게 된 거지요. 성녀의 유산을 물려받은 은월의 피와 예언자의 유산을 물려받은 제사장 말입니다.]

‘예에… 그리고 문제는, 성녀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증거인 은월의 눈동자는 그 발현률이 적은데 반해서, 예언자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증거는 그저 핏줄과 교육뿐이라는 거지요.’

짊어질 돌을 찾기 위해 산을 오르면서 내가 생각했다.

‘그건 그대로 신전 권력의 비대화로 이어졌을 테고. 그게 바로 지난 임무 때의 상황이었겠죠. 그래서 임무를 완전히 달성할 겸 비류아 왕녀한테 그걸 바로잡아줄 명분과 기회를 줬던 건데….’

[철저하게 바로잡지 않았습니까. 기뻐하십시오, 간신이여. 당신이 바라던 개혁이 성공한 세계입니다.]

‘덤으로 내가 노예가 될 줄은 몰랐죠!’

겨우 찾은 돌을 짊어지면서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공사 현장은 애초부터 다소 지세가 높은 곳이었다. 거기에 산을 오르기까지 했다.

찾은 돌을 짊어지고 돌아서자 저 멀리 왕국의 젖줄인 ‘대하(大河)’가 내려다보였다. 500년 뒤 사람인 내게도 익숙한 풍경.

‘도읍지.’

왕국의 수도가 채 야생의 티를 벗지 못했을 무렵의 위치였다.

‘과연 건국 0년.’

그동안 어딘지 모를 숲과 벌판, 황무지를 쏘다니던 월족도 도읍지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여름, 내려쬔 햇살이 대하의 수면에 바스러져 볕가루를 흩뿌렸다.

대하 안쪽으로 월족의 군락이 늘어서 있었고, 다시 그 안에 내가 동원되어 있는 대규모 공사현장과 한창 건설 중인 금자탑이 보였다.

실로 장관이었고 뿌듯한 모습이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경탄이 아니라 한탄뿐이었다.

‘임무 창….’

+

<역사변이점>

[ 개천(開天) ]

일시: 건국 0년

난이도: B

제한시간: 한 달

클리어 조건: 은월(銀月)의 피가 왕국을 세우도록 하라.

보상 건축: 미정

입주민: 미정

실패 시: 사망 및 멸망

+

‘염병! 이걸 어떻게 깨요!’

마음속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30년 전에 대역을 일으킨 반란 수괴의 핏줄이, 그래서 태생부터가 노예인 놈이, 심지어 약관도 안 지난 것 같은 꼬맹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서 여족장이 된 비류아를 만나고, 또 걔가 왕국을 세우도록 하는데요!’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해왔던 임무들은 모조리 은월의 피 바로 곁에서 시작했다. 미션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핵심인 은월의 피와는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바로 그 은월의 피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난관에 부딪힌 상황.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비관하지 마십시오, 간신이여. 기한도 한 달이나 되지 않습니까?]

‘한 달이 아니라 30년이 걸려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이 천사가 지금 자기 일 아니라고…!’

응? 아니지.

‘천사님! 이건 천사님 일이기도 하다구요!’

이 일련의 임무. 망한 나라 살리기 프로젝트에 매여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천사도 선뜻 동의했다.

[예, 물론입니다. 저 또한 왕국과 운명을 함께하지요.]

‘그럼 좀 어떻게 해주십쇼!’

[그게 안 된다는 건 슬슬 알지 않습니까?]

‘압니다만 그래도 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습니까!’

[흐응.]

천사의 목소리에 장난 끼가 섞였다.

[야속함을 느끼는 겁니까, 간신이여?]

‘그렇다면 어쩔 겁니까?’

[제법 귀여운 부분도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천사는?

‘저는 항상 귀여웠습니다만?’

[뭐라는 겁니까, 이 간신은?]

이유 모를 침묵의 시간이, 잠깐 흘렀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예언자님은 멋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이라오, 아리야.’

[지랄이 만개하는군요.]

천사가 한탄했다. 나는 날라 온 돌을 다듬는 곳에 내려놓으면서 팍 인상을 썼다.

‘지랄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쓴 인상에 노예 감독관이 반응했다.

“이 노예 놈이 어디서 인상을 쓰는 거야? 채찍질이 먹고 싶냐?”

“아이고, 그럴 리가요! 감독관님, 눈에 좀 먼지가 들어간 터라….”

“빨리 일해라!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느니!”

“예, 예! 물론입지요!”

나는 굽신거리면서 바로 다음 돌을 찾아 떠났다. 인상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죽겠다!

‘설령 아까 제가 한 게 지랄이라 쳐도요, 천사님. 이렇게 지랄 맞은 상황 속에 어찌 지랄이 만개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내 탄식에 답하는 천사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싱글거리는 기색이 끼어 있엇다.

[간신이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걱정이 안 됩니까?’

걱정밖에 안 되어야 정상인데 언제나처럼 천사는 정상이 아니었다.

[우선 두 가지 사실을 짚어볼 수 있겠군요.]

‘두 가지씩이나요?’

[첫 번째, 불가능한 임무라면 애시당초 자모신께서 내리지 않으셨을 겁니다.]

완벽한 무논리였다.

하긴 저런 양반이 천사라는 시점에서 이미 일말의 논리성도 없기야 했다만은….

[두 번째, 당신이 어떻게든 또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응?

‘방금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천사님?’

[말한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간신이여.]

천사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기색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수행해 온 임무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그 중에 당신이 소위 정공법으로 달성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음… 뭐가 있더라.

‘솔직히 거의 없군요.’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지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당신은 항상 방법을 찾아냅니다. 찾아낼 수 없을 때는 만들어내고요. 그렇게 꾀를 내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간신이여. 저는 더 이상 당신의 수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 뭐지?

‘어쩐 일로 칭찬을 하십니까, 천사님?’

[의외입니까?]

‘의외를 넘어 솔직히 좀 무섭네요. 그 왜,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죽을 때가 가까워진 거라던데….’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천사가 드디어 예언자님의 진가를 알아보았다며 감격합니다.]]

[호들갑들이 심하군요. 인정해야 하는 것을 인정할 뿐입니다.]

아리야의 반응에도 선선히 대답하는 천사. 시선 둘 곳이 뻘쭘해진 나는 다음 돌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래서 간신이여. 뭔가 좀 떠올렸습니까? 당신 성격에 생각 없이 돌만 나르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으음…. 그야 뭐 떠올린 것들은 있습니다만….’

마침 적당한 곳에 노예들이 힘을 합쳐 큰 바위를 나르려 드는 모습이 보이기에 재빨리 한 자리 끼어들었다.

‘일단은, 은월의 피에게 접근할 길을 찾는 게 급선무구만요.’

얼굴에는 최대한 힘든 표정을, 실제 주는 힘은 최소한으로 줄여 좀 쉬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건 꾀부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각에 드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다.

진짜 정말.

‘그러자면 뭐, 태생을 거스를 수 있을 만큼의 뭔가를 증명하거나 해야겠지요. 노동 동선을 고치거나 해서, 너는 쓸모로 가득한 노예로구나 하는 식으로 인정을 받는다든지….’

문제는 한 달이라는 제한 시간.노예가 입지를 쌓아올리기엔 한 달은 너무나도 짧았다.

‘좀 지름길로 질러가야겠는데. 어떻게 한다…. 그 때 언제냐, 대홍수 미션 때처럼 노예들 사이에 불온한 기미가 돈다고 밀고를…? 아니, 그렇게 해도 비류아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고. 또 그렇게 노예들 다 팔아먹는다고 해도 여기서 벗어나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채찍이 날고 비명과 피가 튀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어서 일해라!”

“쉬기만 해봐라 아주!”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광경.

‘이 취급은 노예조차 아니라구요.’

노예는 일종의 재산이다. 그런데 지금 이건 숫제 썩어가는 과일들을 창고에서 방출하는 꼴이다. 빨리 쓰고 치워버려야지 하는 심보가 묻어나오는 처사.

반역자의 혈족이겠다, ‘언젠가 죽으면 어쩔 수 없고’ 수준이 아니라 ‘언제든 죽어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혹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공을 세운다고 해도 입지 자체를 만들 수가 없다. 들은 체도 안하거나 감독관 중 누군가가 빼앗아가고 말겠지.

‘돌아버리겠네 진짜…. 일단은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보면서 계획을 다듬어야겠군요.’

복잡한 심경 속에 바위를 돌 다듬는 곳에 내려놨을 때였다.

“주목!”

가장 화려한 견장을 차고 있는 노예 감독관이 소리쳤다.

“모두 주목해라!”

감독관들이 먼저 채찍을 접어 넣었다. 그러자 일하던 노예들도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어 섰다.

노예 감독관이 목에 힘을 주어 외쳤다.

“위대하신 월족의 주인이시며, 나른한 벌판의 정복자이시며, 여덟 부족의 악몽이시며! 하얀 머리 산꼭대기 호수에 살던 사악한 흰 용의 목을 치신 영웅 중의 영웅! 달의 여신을 대리하시는 한낮의 태양! 비류아 족장님께서 공사 현장을 시찰하러 오실 것이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산에 우거진 수풀조차 숨을 멎어버린 것 같았다.

완벽한 고요 속에 노예 감독관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뙤약볕같은 눈빛으로 노예들을 지졌다.

“본디 너희 더러운 핏덩이들은 진창에 진 그늘 같은 것들이다! 은월을 대리하시는 태양을 어찌 감히 맨눈으로 보겠느냐! 보아봤자 눈알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 신음할 것이 뻔하리라!”

노예들은 힉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정녕 두렵다는 듯 어깨들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이 흡족했는지 노예 감독관은 한참이나 가갈을 이어갔다. 그럴 때마다 노예들은 이미 채찍에 맞아 무너진 고개를 더욱 수그렸다.

단 한 명.

‘으흠.’

나를 빼놓고는 말이다.

[보십시오, 간신이여. 이제 좀 아시겠습니까?]

‘그러게요, 천사님.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빙의의 법칙을 말이죠.’

첫 번째. 천사가 앞서 말한 것처럼, 빙의체는 이전 빙의체의 핏줄을 따라간다.

두 번째.

‘빙의하자마자 시찰을 와준다니, 이게 우연일 리 없죠.’

하루 전도 아니고, 하루 뒤도 아니다. 정확히 지금 이 시점, 내가 어떻게 비류아에게 접근할지 고민하는 이 순간에 온다는 거다.

[자모신께서는 결코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지 않으십니다.]

천사가 그렇게 표현한 것과 같이.

‘빙의체의 삶을 통틀어,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기에 비로소 빙의하는 거로군요.’

좋아.

‘임무를 달성할 방법이 다섯 가지쯤 떠올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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