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36화 (36/261)

36. 지키는 자, 지켜보는 자 (2)

나의 예언이 밤하늘을 뒤덮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청중들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예언’이 성공합니다! ]

좋았어.

‘거의 다 됐다.’

이제 남은 건!

“설마,”

왕녀가 주춤하면서 나를 본다. 그 눈에 떠있는 것은 이제 혼란이다. 기대다.

“설마 제사장, 당신 일부러….”

“흐랴아앗!”

자리를 박찬 내가 왕녀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멈칫한 왕녀가 부지불식간에 검을 들었다.

교차하는 그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빈틈을 보였다. 목울대를 향해서 칼길을 열어준 것이다.

“아,”

본능은 의지보다 빠르다. 그러기에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자 그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하는 것이다.

왕녀의 눈보다 왕녀의 어깨가 먼저 움직였다. 뒤따른 칼날이 그 뒤를 이었고, 그리고,

“아,”

내 목으로부터 피가 터졌다.

“아아, 아아아,”

칼을 맞은 것은 나인데, 왜 신음은 아가씨가 흘리시는지.

눈으로 그리 말하면서, 나는 무너졌다.

내가 웃고 있다는 것을, 왕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사장…!”

달려오는 왕녀.

그녀의 양 허리 너머로 주변의 정황이 비친다. 내가 호명했던 신관들과 씨족장들을 비롯한 ‘내 편’과 다른 부족민들 사이의 전투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명분이라곤 한 톨도 없는 ‘내 편’이, 다시 말해 월족의 암세포들이 절대적인 열세였다. 내가 당하기까지 했으니, 저 쪽도 금세 정리당하겠지.

“제사장, 당신, 지금 설마 일부러,”

“쉿….”

나를 붙든 왕녀의 말을, 내가 막았다. 숨 멎은 왕녀를 올려다보며 나는 겨우 말했다.

“아가… 씨….”

망할, 칼에 갈린 목줄기가 뜨겁다. 진짜 막 뜨거워 뒈질 것 같다.내 몸이 아닌데도, 내 몸이 화살 맞을 때만큼이나 아파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굳세게… 꿋꿋하게….”

그래도 어쩌나. 임무를 성공시키려면 이럴 수밖에 없는데.

속으로 온갖 욕설을 씹어가면서도, 얼굴로는 철저하게 순교자를 표방하면서 말했다.

“입지… 단단히… 월족의, 장래….”

“제사장,”

왕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 얼굴이 다시 허물어져있다. 내 어깨를 잡더니 흔들기 시작한다.

“제사장, 눈을 떠보십, 제사장, 아아, 제사장.”

“그만….”

아니 씨발, 흔들지 마. 안 그래도 아파 뒈질 것 같은데 왜 흔들고 난리야 이 아가씨야.

“그만, 하십시오, 아가씨….”

“하지만 제사장, 아아, 지금 즉시 치유를,”

“주위,”

사람들 다 보고 있잖아. 난 지금 반역 수괴라고. 그런 사람한테 무슨 치유야.

알아들어? 알아듣지? 내가 선택한 왕재니까, 알아들을 수 있지?

“제사장, 당신….”

아니 혹시 못 알아들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해두자.

“저를 베시고… 배신자들… 모조리 숙청… 참수… 교시를, 그래야만 의미가….”

“아아, 제사장, 당신은….”

“후계자….”

아가씨, 듣고 있지?

임무 주시는 신님, 듣고 계시죠?

“저는, 당신을 선택….”

필사적으로 짜낸 그 말을, 적어도 왕녀는 눈동자로 받았다. 햇빛을 받아 달이 빛을 내듯이, 왕녀의 눈동자가 한 차례 빛났다.

그리고.

“예, 당신이 저를 선택했다는 것을, 제사장.”

그래, 그거야. 이제 쿵짝이 맞네.

으, 아파 뒈지겠으니까 이제 좀 슬슬,

“잊지 않겠습니다.”

속삭임 멀다.

몸 안 움직인다.

어둡다.

칼 드는 소리 들린다.

“당신을 결코.”

바람 가르는 소리.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펼쳐졌다.

[ 당신의 빙의체가 사망했습니다. ]

[ 남은 제한 시간과 상관없이 미션이 종료됩니다. ]

◈          ◈          ◈

한 차례 겪었다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죽음인 듯하다. 어두운 광장 속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이 느낌이라니.

‘죽어가는 도중보다는 낫지만.’

몸이 안 움직이면 혼도 안 돌아가는 법.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는 말도 생각도 아기 옹알이 수준밖에 안 되어서, 돌이켜보자니 영, 뭐라고 할까….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감동했다고 말합니다.]]

그래!

감동의 절정이다!

[쪽팔림의 극치겠지요.]

천사가 어이없다는 듯 딴지를 걸었다.

[뭔가 그럴듯한 장면이었습니다만 결국 ‘내가 선택했습니다.’ 하나를 확실히 하기 위해 그 개지랄을 벌인 것 아닙니까, 간신이여.]

‘임무 끝났다고 바로 호칭 돌리시는 건 그렇다 쳐도, 너무 입이 걸어지신 것 아닙니까? 천사님 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개지랄이 뭡니까, 개지랄이.’

[용 발광이라고 하면 좀 고상해지겠습니까? ]

‘최선의 노력이 엿보이던 모습이라고 하면 더 정확해지겠습니다. 희곡으로 만들었으면 천만 관객 확정이라구요.’

[천만의 개소리 만만의 개떡이로군요.]

그렇게 천사와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 축하드립니다! ]

주변이 확 밝아졌다.

[ 역사변이점 ‘평원의 나라, 산의 나라’ 완료! ]

날 둘러쌌던 어둠이 물러났다. 어스름이 걷히고 어슴푸레한 빛이 지평선으로부터 위아래로 퍼져나가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저승의 왕국에 몸을 지닌 채 서있었다.

신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아리야가 날 반겼다.

“예언자님! 고생하셨어요!”

달음박질쳐서 와락 안기려 드는 아리야. 나는 다급히 게걸음을 쳐서 그 포옹을 피해냈다.

“예, 예언자님?”

“아니 그… 반가운 건 알겠소만, 아리야. 너무 다가오진 마시오.”

“제, 제가 혐오스러우신가요?”

“그건 아니오만…. 그, 뭐라 그러나. 그런 게 있잖소.”

난처해하는 아리야와 곤혹스러워하는 나 사이에 천으로 몸을 감싼 인물이 끼어들었다.

천사였다.

“이해하십시오, 아리야. 저 간신은 ‘정절’을 중시 여긴다지 않습니까. 남녀칠세부동석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사상에 젖어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음. 그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의 정절 따윈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 정절만이 중요할 뿐이지요.”

“굉장한 말이군요. ‘정절’ 대신 ‘재산’이나 ‘목숨’ 같은 단어를 집어넣어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것이, 그리고 그 또한 당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이 특히 굉장합니다.”

천사가 독설을 내뱉었지만, 아리야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중얼거렸다.

“정절을 지키시는 예언자 님….”

“아리야. 방금 제가 한 말을 듣기는 했습니까?”

“예, 천사님. 재산을 지키시는 예언자 님…. 목숨을 지키시는 예언자 님…. 어느 쪽도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요.”

“간신이여. 입주민 좀 빨리 늘리십시오. 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제정신인 입주민이 하나는 필요합니다.”

음.

“어디 임무 결과를 봐보지요. 마침 막 뜨고 있군요.”

우리 셋의 시선이 임무 창으로 향했다. 임무 창에서는 거듭 축포가 터지고 있었다.

[ 차기 군주를 선택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차기 군주가 가진 의욕도, 차기 군주에 대한 지지도가 모두 최고치입니다. 서브 미션 클리어! ]

[ 차기 군주의 걸림돌이 될 세력들을 일소했습니다. 히든 미션 클리어! ]

[ 지금부터 역사변이도를 측정합니다. ]

개지랄이든 용발광이든 무슨 상관인가.

내 노력이 옳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물이 이처럼 명백한데.

[ 50%… 70%… 100%… 130%…. ]

[ 역사변이도 180% 달성! ]

[ 임무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보상을 기다렸다.

[ 임무 보상이 주어집니다. ]

[ 궁전(Lv.2)가 건축됩니다! ]

[ 마을(Lv.2)가 건축됩니다! ]

[ 병영(Lv.1)이 건축됩니다! ]

전처럼 유령들이 바쁘게 일하기 시작했다. 초가집에 불과하던 궁전이 마침내 기와지붕을 뒤집어썼다. 크기도 앞뒤 위아래로 와라락 불어났다. 지금까지 저승의 왕국 중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은 신전이었는데, 이제는 궁전이 그 위용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궁전의 발전상이 워낙 극적이어서일까, 그에 비하면 마을의 발전은 좀 더뎠다. 그럼에도 난민촌을 방불케 하던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뛰어나졌다. 다 쓰러져가던 천막들은 최소한 비바람은 막을 수 있는 나무집으로 바뀌었으며 그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목책으로 둘러싸인 원형 공터가 만들어졌다. 그 공터 안에는 몸에 칼과 화살이 꽂혀있는 허수아비들이 늘어섰다.

나는 시설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

[ 시설물: 궁전 ]

레벨: 2

문명 수준: 군장 국가

담당자: 없음

효과: 통치술(Lv.2)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느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유할 수 있느냐. 그것으로 권력의 척도를 셈한다면,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궁전에 권력이 좀 집중되기 시작했군요!

[ 시설물: 마을 ]

레벨: 2

문명 수준: 군장 국가

담당자: 없음

효과: 농사(Lv.1), 수공업(Lv.1)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많이들 집을 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제 좀 마을이라고 할 만한 게 생겼네요. 손재주 있는 사람은 길쌈을 하고, 힘 좋은 사람은 땅을 일구는 오후 여섯시! 활기 가득 찬 우리 고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흐음.

“문명이 군장 국가 수준으로 올라갔군요.”

“네, 예언자 님. 그리고 마을에 있던 Lv.1짜리 통치술이 궁전으로 옮겨가며 Lv.2가 됐네요….”

아리야가 말했다.

Lv.1이니 Lv.2이니, 스킬이니 퀘스트니 하는 낯선 용어들도 이제는 제법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수공업이란 게 새로 생겼군요. 군락의 규모가 커지면 분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지요. 사유재산 제도가 본격화된다는 의미입니다.”

나, 아리야, 천사가 한 마디씩 했다.

다음은 새로 지어진 건물 차례였다.

+

[ 시설물: 병영 ]

레벨: 1

문명 수준: 군장 국가

담당자: 없음

효과: 궁술(Lv.1), 창술(Lv.1), 검술(Lv.1), 도끼술(Lv.1)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전사로 거듭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여! 병영으로 오라! 부족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

+

햐아.

“갓 지어진 건물치고는 주는 것도 많네요.”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리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 Lv.1 짜리인데 좋은 건가요…?”

“좋을 겁니다. 신들린 것 같은 가리비수의 도끼술이 Lv.3이라는 데에서 역산하자면, 활을 쥐든 창을 쥐든 한 사람 몫은 해낼 수 있다는 걸 테니까요.”

천사가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도끼술은 가리비수 석상이 있으니 상관없겠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가리비수 석상을 흘끗했을 때였다.

“어라?”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가리비수 석상의 목이 잘려 있었다.

+

[ 시설물: 훼손당한 마신(魔神) 가리비수의 석상 ]

효과: 신화 생성. 도끼술(Lv.3)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오오, 가리비수. 오오, 무시무시한 도끼의 악마! 사람이든 숲이든 잔혹하게 불태우나니. 그의 도끼날에 영혼이 찢기고 정령도 소멸한다네. 그는 어미의 죽음을 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지! 연민도 동정도 없는 마신 가리비수를 경배하라! 도끼의 악마를 찬양하라!’

※ 현재 효력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

“아리야, 천사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리야와 천사도 당황했다.

“그, 그러게요. 예언자님께서 임무에 들어가실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석상의 위치도 바뀌었군요.”

둘의 말 대로였다. 임무에 들어갈 때만 해도 가리비수의 석상은 멀쩡했다. 석상이 주는 효과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장 제사장 그 후레자식에게 빙의했을 때 톡톡히 가리비수의 도끼술을 써먹지 않았던가.

또한, 본래 마을 한가운데 있던 가리비수 석상이 지금은 변두리로 밀려난 채였다. 거기다가 목까지 잘렸다.

머리 없는 거한이 도끼를 들고 선 조각상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괴기스러웠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스럽게 느껴졌다.

“임무 수행 전에는 멀쩡했는데 임무 수행 후에는 이리 되었다면, 답은 하나뿐이지요. 간신이여.”

천사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이 이번 임무 수행 중에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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