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지키는 자, 지켜보는 자 (1)
부족민들이 쑥덕거렸다.
“이게 무슨 가리비수 도끼춤 추는 소리여?”
“제사장님이 도련님을 끌어들였다고?”
“도련님이 족장님을 죽인 게 맞기는 맞다는 거네?”
“근데 제사장님 말을 들었을 뿐이라니 무슨….”
말꼬리를 흐린 부족민들이 나를 흘끗거렸다.
왕녀도 내리치려던 칼을 들어 올린 그대로 나와 왕자를 번갈아 보았다. 곱게 그어진 두 눈썹이 드물게도 치켜 올라가있음을 나는 알아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두고 망설이는 눈빛.
그 망설임이 낳은 틈을 왕자는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증거도 있습니다!”
왕자가 드글드글 끓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천하의 개자식아, 아무렴 내가 증거도 없이! 어, 증거 하나 없이 그런 짓을 저질렀겠느냐! 누님! 여러분! 증거가 있습니다! 제 천막을 뒤져보면 저 자식이 시켰다는 증거가 나올 겁니다!”
음.
‘뭐 당연하긴 하지.’
자그마치 군주를 암살하는 일이다. 신뢰만 갖고 가능할 리가 없다. 연판장이든 뭐든, 뒤통수 대비한 보험쯤은 들어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증거는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선택지는 크게 둘.’
첫 번째, 잡아떼기.
아무리 확실한 증거여도 현장 잡힌 것보다는 증명력이 약하게 마련. 더구나 지금 부족민들은 나를 지지하는 반면 왕자를 경멸하고 있다. 왕자가 어떤 증거를 들이민다고 해도 날조로 몰아붙이면 그만. 불씨는 남겠지만 어떻게든 짓밟아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소였다면 이걸 택했겠지만….
‘지금은 두 번째 선택지로 간다.’
두 번째 선택지.
왕자가 내게 준, ‘임무를 완전히 성공시킬 방법’이란 바로-!
“어허허허, 증거가 있을 줄이야!”
깔끔하게 인정해버리는 것!
“도련님, 이건 제가 한 방 먹어버렸군요! 증거가 있다니! 어허허허허허!”
“아니….”
부족민들은 물론이고, 왕녀, 아니, 나를 규탄하던 왕자조차 당혹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나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쯧쯧… 그치만 한심하기는. 그냥 이대로 피붙이의 손에 죽었더라면 제삿밥이라도 얻어먹게 해줬을 것을.”
수염을 잡지 않은 손으로는 도끼를 들었다.
“앞서 뒈진 족장놈도 그렇고, 하여간 은월의 핏줄들은 제대로 되어먹은 게 없구만 그래. 껄껄껄.”
부족민들도, 왕녀와 왕자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느라 숨소리도 못 내었다. 고즈넉한 달밤 아래 퍼지는 것은 오직 내 목소리뿐.
그 위로 천사가 힘겹게 말을 얹었다.
[드디어 미쳐버린 겁니까, 충신이여? 대체 지금… 뭘하는 겁니까?
‘뭐하긴요. 임무를 달성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임무를 달성하고 있다니…. 지금 하는 언동과 그게 무슨 상관이….]
“흐읍!”
손에 든 도끼를 던졌다. 가리비수의 석상으로부터 오는 도끼술의 조화로, 도끼는 노린 곳에 정확히 박혀들었다.
퍽 소리와 함께, 왕자의 머리통을 수박마냥 쪼개버린 것이다!
“헉…!”
“도, 도련님이….”
왕국을 세운 시조 주온은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머리가 박살나서 죽었다.
그의 아비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짧게나마 속으로 기도했다.
‘편안히 잠드시길, 왕국의 시조였던 자여. 당신이 막판에 지랄해준 덕에 겨우 임무를 완벽 성공시킬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제법 문명인처럼 간교하게 굴었습니다만 어쨌든 태생은 야만인이니 뒈지는 것도 받아들이시길. 그 모든 잘못이 대체로 당신에게 있나이다.’
[정말이지 이 무슨 쓰레기같은….]
[[최초의 성녀 아리야조차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반응들은 무시.
기도를 끝마친 나는 새로운 도끼를 꺼내 왕녀를 겨누었다.
“다음은 당신 차례요, 아가씨. 은월의 피는 역시 지금 씨를 말려버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
“무슨….”
왕녀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대체 무슨 말을… 무슨 짓을, 당신…? 제사장, 이해가 안 됩니다만….”
“어허, 아둔하기가 석판 같군요. 제가 오늘 월족의 새로운 군주를 정하겠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그 새로운 군주가 되겠다는 겁니다.”
왕녀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반역, 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어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사장, 성스러운 계명에… 분명하게 적혀있습니다. 오직 은월의 증거를 가진 자만을 지도자로 모시라고. 제사장, 당신에게는….”
“그건 계명이 잘못된 겁니다.”
나는 말을 잘랐다.
“부족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강한 지도자입니다. 은월의 피가 흐르든 말든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겁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적장을 물리친 것은 제가 아닙니까? 아가씨와 도련님이 송사리들과 놀고 있을 동안 부족을 구한 건 바로 저라 이겁니다.”
내가 만든 계명을 내가 부정하니 실로 적절하지 아니한가.
나는 그리 여겼는데, 시스템은 달리 해석했다.
[ 연설(Lv.3)이 발동됩니다. ]
[ 연설 스킬은 ‘신전’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신전의 계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연설’의 성공률이 저하됩니다! ]
[ 청중들은 지금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연설’이 ‘선동’으로 바뀌어 시전됩니다! ]
[ 선동이 중간 효과(Lv.2)로 발동됩니다. ]
부족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왕녀, 짓밟힌 개구락지처럼 처참하게 죽어버린 왕자를 번갈아 보면서 상황을 따라잡으려 애쓰던 그들의 시선이 어느덧 서로를 향했다.
“맞는 말씀 아니신가…?”
“무, 무슨 천벌 받을 소리를 하는 거요 댁은! 계명에 분명히 나와 있거늘….”
“적장을 죽인 것은 제사장님이잖아.”
“왕자와 함께 족장님을 죽인 것도 제사장이란 소리 아닌가! 그건 애초에 적들과 내통한 배신자도 제사장이라는 거지!”
“어쨌든 제사장님이 가장 강하시다! 가장 강한 자가 주군이 되는 것이….”
“여러분! 계명에 나와 있습니다. 은월의 피를 모시고, 적을 앞두고 분열하지 말지어다, 라고. 그런데 지금 이건….”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탕. 몇몇이 말려보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음. 솔직히 연설 관련 스킬이 발동하리라곤 예상 자체를 못했지만, 좋네요. 쓸 수 있는 건 살뜰하게 다 써야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대체 당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어허. 모르면 그냥 지켜보십쇼.’
그렇게 부족민들이 혼란을 일으킨 속에서, 나는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낡은 계율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은월의 피에 복종할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들’은 그렇게 해석을 마친 상태다 이겁니다, 아가씨!”
왕녀가 눈썹을 꿈틀했다.
“우리들…?”
“오비아!”
내가 외쳤다. 내 직속 신관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네, 네 제사장님?”
“수르투! 발로마! 빌랴! 실차우!”
나는 거듭해서 신관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같이 뇌물을 받아 챙긴 나를 부러워하던 놈들의 이름이었다. 좀 덜 부러워하던 신관들, 살짝이나마 눈썹을 찌푸린 신관들은 한 명도 부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곤투 씨족장! 알살타 씨족장! 갈리지 씨족장!”
뇌물을 바친 씨족장들 중에서도, ‘성의’의 범주를 뛰어넘는 뇌물을 가져왔던 씨족장들의 이름도 불렀다. 여인을 뇌물이랍시고 끌고 왔던 놈 이름은 특별히 가장 먼저 불러주었다.
‘있어봤자 월족의 장래에는 도움이 안 될 놈들.’
새 군주의 발목이나 잡아대고, 그 와중에 자기 이익만 챙겨댈 잠재적 암세포들을 모조리 불러재낀 다음, 나는 도끼를 치켜들었다.
“무기를 들어라!”
고함쳤다.
“우리가 맺은 밀약을 이행할 시간이다! 마침내 거사일이 도래한 것이다!
내게 호명당한 이들이 얼어붙었다. 부족민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화살처럼 쏟아졌다.
“아, 아니 제사장님….”
“우리가 언제 그런….”
호명당한 이들이 쩔쩔매면서 그런 부족민들의 시선을 떨쳐내려 하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데다가, 나의 선동으로 분열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왕녀의 친위대 중 한 명이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 무기를 휘둘렀다.
“이 저주받을 반역자 놈들 같으니!”
그 공격은 깔끔하게 신관의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피가 터져 나오고, 짙은 냄새가 밤결을 따라 흘렀다.
“이, 이 자식들이 다짜고짜….”
“아, 아냐! 진짜 아닌데, 젠장, 에이 제기랄!!”
결국, 내게 호명당한 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무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왕녀의 친위대와 내게 호명당한 자들은 그렇게 전투에 들어갔고, 조금 뒤에는 부족민들 전체가 왕녀 편과 내 편으로 나뉘어 칼부림을 시작했다.
‘완벽하군.’
그런 속에서, 나는 왕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십니까?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릴까요?”
왕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눈 위에 뜬 은빛 달이 나를 향했다.
“그대를 베겠다.”
“으허허!”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벨 수 있거든 베어보아라, 이 저주받은 계집아!”
자리를 박차 왕녀에게 덤벼들었다.
◈ ◈ ◈
내가 휘두른 도끼를, 왕녀는 검으로 막았다. 깡…! 쇠와 쇠가 부딪히고, 그것을 시소 삼아 근육과 근육이 맞섰다. 그렇지 않아도 이를 악물고 있던 왕녀의 잇몸 틈새로 피가 배어나왔다.
나는 조소를 흘렸다.
“그래갖고 벨 수나 있겠느냐?”
“으…!”
“역시 저주받은 계집은 저주받은 계집이로구나!”
“이잇…!!”
왕녀의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팡! 떨쳐내는 소리가 장절했다. 한 발 물러선 나를, 왕녀는 그 소리에 걸맞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장렬하기까지한 배신감이, 순결하기 그지없는 분노가 그 자리에 있었다.
“전부,”
왕녀가 외쳤다.
“전부, 거짓이었나!”
사자를 앞에 둔 호랑이처럼, 왕녀는 피에 젖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검을, 휘둘러왔다.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해왔었다는 말도!”
캉!
“이제야 겨우 본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됐다는 말도!”
캉!
“아버지가… 나를 인정해주었다는 말도!”
칼날이 도끼날을 씹을 때마다, 쇠끼리 울부짖는 소리가 사나웠다.
“모조리 거짓이었느냐!”
왕녀의 노호가 먼저 날뛰었다. 칼은 다만 그 뒤를 따랐다. 경로가 정직했다. 차분하던 왕자 사냥과는 완전하게 대조되는 그 모습. 갈급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나는 가리비수의 도끼술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음.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왕녀를 안타까워합니다.]]
나는 공격을 걷어내며 외쳤다.
“그렇다면 어찌하겠소!”
“나는!”
왕녀의 칼과 내 도끼날이 맞부딪혔다. 무기와 무기가 맞섰다. 나와 왕녀가 마주섰다.
“나는 어쩌면,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달빛 아래 드러난 왕녀의 표정은 허물어진 채였다. 천막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역린을 얻어맞은 왕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쩌면 처음으로 누군가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거라고….”
아비를 대신할 수 있는 이를 만난 거라고, 왕녀는 눈으로 말하고.
“그런데!”
눈으로 노하며.
“그런데 그것이 모두!”
“공격이!”
내가 외쳤다.
“뻔히 보입니다, 아가씨!”
캉! 힘주어 왕녀의 칼을 튕겨냈다. 칼을 따라 왕녀가 비틀거렸다.
쓰러질 뻔하다가 겨우 자세 다잡는 왕녀. 그 눈동자, 다시 나를 향한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가만히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봅니다.]]
왕녀의 먼 선조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왕국을 가호하는 천사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 공격으로 내가!”
달이. 은빛의 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이 내가 베일 것 같소이까, 아가씨!”
왕녀가 멈칫했다. 배신감 속에 불신이, 불신 속에 다시금 설마 하는 의심이 퍼졌다.
나는 도끼를 들어 올린 채 외쳤다.
“선언하노라!”
달빛이 도끼에 쪼개졌다. 흩뿌려진 달빛 파편들이 내 목소리에 떨었다.
“이 결투에서 승리한 자만이! 여신으로부터! 그 대리인인 천사로부터!”
외쳤다.
“그리고 바로 그 천사의 대리인으로부터 선택받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내게 선택받을 거라는 소리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고함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