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가장 중요한 것 (3)
이기는 방법!
‘그것이야말로 우리 왕국에 필요한 것 아니던가!’
수백 년 후에 왕국이 잊어버리고 마는 것.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을, 이 야만스러운 선조들은 아직 잘 알고 있었다.
‘사리사욕 때문에 뇌물을 좀 처먹으면 어떤가. 아들이 아비의 권좌를 노리면 어떤가.’
그런 광경은 어차피 나중에 왕국에서도 일상다반사로 벌어질 일들.
아니, 왕국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일어날 것들이었다.
아리야에게 말했던 대로….
‘아무튼 이겨야 한다!’
어느새 월족의 전사들은 적군을 학살하고 있었다.
군영을 침범한 적군은 꼴사납게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걸 보고 우리 쪽 전사들이 껄껄걸 웃었다.
“제사장님! 저놈들이 꽁지 빠지게 도망칩니다!”
“명령만 하십시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겠습니다!”
“음.”
전사들은 피 맛을 봐서인지 모두 혈기가 돌고 있었다. 정말로 추격하고 싶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마 군주를 잃어버린 탓에 모두 알게 모르게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겠지. 방금의 싸움은 딱 적절하게 기분을 환기시켜주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되었다.”
내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싸워서 이긴 것으로 족하다. 지금 우리는 저런 약골들한테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전사들이 머리를 수그렸다.
“하옵시면…?”
“도련님과 아가씨를 불러라.”
횃불이 땅바닥에서 타닥타닥 타올랐다. 아군이 쓰러트린 것일까 적군이 쓰러트린 것일까.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달을 노려보았다.
“오늘 밤이 다 가기 전에, 후계자를 선정하겠다.”
◈ ◈ ◈
얼마 안 가서 왕자와 왕녀가 왔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제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왕자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으며, 왕녀는 아까 전과 다를 바 없이 딱딱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들 역시 다른 곳에서 적군과 싸운 모양이었다. 왕자와 왕녀는 물론이고 호위하는 전사들의 갑주 역시 피범벅이었다.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왕자의 갑옷을 한 차례 눈여겨보았다.
“음.”
내가 고개를 까닥였다.
“어서 오시지요. 아가씨. 도련님.”
“….”
꿈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왕자의 눈썹이 움직인 것을, 나는 목격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도련님 아가씨’ 순서가 아니라 ‘아가씨 도련님’ 순서로 불렀기 때문이다. 왕자처럼 영리한 인간이라면 이런 작은 호칭에도 무언가 낌새를 느낄 것이다.
“두 분이야말로 별 탈 없으신지요? 무사하십니까?”
“아하하.”
그러나 왕자는 곧바로 표정을 관리했다. 어두운 밤. 횃불들만 간신히 주변을 밝히는 군영에서 왕자의 얼굴은 더욱더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마 부족민들은 왕자가 눈썹을 꿈틀거린 것 따윈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
“예, 무사합니다. 전부 제사장님 덕분이죠!”
왕자가 방실방실 웃었다.
“제사장님께서 활약하셨다는 얘기, 이곳에 오면서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고생하셨습니다.”
반면에 왕녀는 꾸벅,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제사장께서 제때 전사들을 다독여주시지 않았다면 자칫 위험할 뻔했습니다. 결국 저희가 이겼을 것이지만, 지금보다 피해가 훨씬 더 많이 나왔겠지요. 제사장님의 공이 큽니다.”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나의 공로를 계산하는 모습이었다.
완전히 상반된 두 남매.
천사가 내 머릿속에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니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겠죠.’
만일 왕자가 다음 부족장으로 선출되면 어떻게 될까?
‘왕자가 군주가 되면 평소엔 참 모시기 쉬울 겁니다. 맨날 허허 웃으면서 신하들을 대할 테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가면을 쓰고 있을 순 없어요.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언젠가 부하들도 깨닫게 될걸요.’
자신들의 군주가 무시무시한 이중인격자라는 것을.
‘눈길에 나면 죽습니다. 암살당하고 독살당하죠. 앞에서는 허허 웃을지 몰라도 뒤에선 칼과 독을 준비하는 주군이라니. 심지어,’
나는 한 번 더 왕자의 갑주를 눈길로 훑었다.
말했듯 왕자의 갑주는 피와 육편으로 더러웠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왕자의 갑옷에 묻은 피 위에는 진흙이 덮여 있었다.
‘저 녀석, 뒤에서 싸우는 척만 하다가 온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싸우는 중에 적을 베어 피를 뒤집어썼으면 진흙 위에 피가 묻었겠죠. 그 반대라는 건? 피 흐른 진창에 일부러 한 바퀴 구른 겁니다. 갑옷이 깨끗하면 혼자 눈치 보일 테니까요.’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그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린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감탄하지 마십시오, 아리야. 보나마나 이 사악한 충신도 왕국이 야만족들에게 멸망당할 때 똑같은 짓을 해보려고 했었겠지요.]
아무튼!
‘위험할 일에는 철저하게 자기 몸을 사리는 군주. 최악 아닙니까? 이 왕자는 절대 죽을 때까지 월족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군주는 신하 입장에서도 참 모시기 어려운 유형이다. 심지어 잘 죽지도 않는다.
그러니 무조건 주군이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간신들밖에 안 남는다.
생전의 나처럼.
‘반면에….’
내가 슬쩍 왕녀를 쳐다보았다.
왕녀의 갑옷은 전사의 그것이었다.
‘왕녀는 모시기 편해요.’
주군과 일할 때는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왕자처럼 밝게 웃어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 맞춰주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10년 넘게, 20년 넘게 일하다 보면 역시 알 수밖에 없다.
‘기준이 명확하거든요.’
왕녀야말로 모시기 편한 군주라는 사실을.
‘선을 넘지만 않으면 돼요. 자기 마음에 들든 마음에 들지 않든, 그것과 상관없이 일만 잘하면 얼마든지 중용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면 군주한테 평가받을지, 어떤 짓거리를 저지르면 점수를 까먹을지, 다 훤히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군주.
명확한 기준에 따라서 만사를 평가해주는 왕.
그리고 자기 부족을 위해 위험할 때 나서 싸울 줄 아는 왕!
[충신이여, 그 말은….]
‘예.’
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둘이 어떤 왕국을 세우게 될지 알았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니 누굴 후계자로 삼을지 역시 정했습니다.’
[아아.]
천사가 감탄사를 흘렸다.
[마침내 당신도 진정으로 왕국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군요. 그리하여 왕자가 만들 나라보다 왕녀가 만들 나라가 더욱 이상적인 나라에 가까우리란 사실을, 당신은 아무런 사심도 없이 깨우친 것이군요.]
천사는 감격에 겨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충신이여. 사람은 성장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바뀐다는 것을 당신은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비록 간신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이 내게 내기로 강요하였던 꼭 그것처럼 실로 왕국의 충신….]
‘그렇게 해야만 다음 시나리오가 쉬워집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예?]
‘예?’
잠시간 더 침묵이 흐르고 나서, 천사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다음 시나리오가 쉬워진다니요?]
‘아니, 그걸 짐작하지 못하셨습니까?’
잊지 말자.
얼핏 보였던 메인 시나리오 리스트에 따르면, 다음 역사 특이점은 건국 0년이다.
‘그리고 건국 0년이라는 건, 지금 고르는 시조가 그 때 가서 왕국을 세운다는 뜻이죠.’
즉!
‘다음 번 역사 특이점도 지금 고르는 양반이랑 함께 가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왕녀를 골라놔야 다음 시나리오 난이도가 좀 내려간다고요!’
천사의 반응이 돌아온 것은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의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이지 쓰레기 충신입니다.]
가히 시적인 평가였다.
◈ ◈ ◈
도끼를 들고 나선 내게 전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늘 낮과는 조금 달라진 시선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단순히 연설을 들었을 때나, 아니면 뇌물을 바칠 때와는 달라진 눈길.
바로 우두머리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가씨. 도련님.”
“….”
“여신의 이 미천한 종은, 여신께도, 그리고 주군에게도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오늘 이 자리에 섰나이다. 모자라고 부족한 소인이 우리 월족을 이끌어나갈 다음 군주를 선발하게 된 것이옵니다.”
왕자와 왕녀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아무리 걸물이라 하여도 이런 순간조차도 태연자약하긴 어려웠다.
“소인은 본디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서 후계자를 정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지요…. 허나, 오늘 적도가 쳐들어온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에. 이 노구의 생각이 지나치게 짧았던 것이지요.”
“그 말씀은…?”
왕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후계자를 빨리 정하시겠다는 뜻인가요, 제사장님?”
나는 왕자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소식이 군영 전체에 퍼진 것인가. 전사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서 공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 부족민뿐만 아니라 노인, 아낙네, 어린아이들도 보였다.
모두가 느낀 것이다.
오늘이 부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밤임을.
그런 운명의 밤 한복판에 서서,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수상하지 않으십니까.”
“예?”
왕자가 눈을 깜빡였다.
“수상… 하다니요?”
“아무리 주군께서 돌아가셨다지만, 아직 하루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공터를 걸었다. 뚜벅, 뚜벅. 어디로 향하기 위한 걸음이 아니었다. 그저 공터의 변두리를 둥글게 돌았다. 자연스럽게 부족민들의 시선이 내 등을 쫓아왔다.
“우리 월족이야 주군께서 승하하신 것을 알고 있다지만, 다른 부족들이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지요. 그런데도 오늘 우리의 군영을 침입한 적군은 어찌 이리도 빨리 주군의 승하를 알아들었을까요?”
“….”
“오오, 도련님. 아가씨. 이 노구가 헤아리기로 답은 하나밖에 없나이다.”
마치 신을 두려워하는 노사제처럼 내 목소리가 떨렸다.
“주군께서 승하하셨음을 누군가가 적군에게 알린 것이옵니다.”
“그, 그건…?”
“예. 내통자, 배신자가 있사옵니다.”
웅성웅성.
부족민들이 서로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내통자라니….”
“우리 부족에서? 누가….”
밤이 어두웠다. 초승달이 흐릿했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더욱 나지막하게 어둠에 스며들었다. 횃불이 일렁일 때마다 부족민들의 그림자가 울렁거렸다.
놀란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배신자라니. 간신이여, 정말입니까?]
천사도 당황한 목소리였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안 중요해요.’
[예?]
‘거 참. 지금 중요한 건 진실 같은 게 아닙니다. 천사님. 부족민들한테 경계심이랑 경각심을 일깨우는 게 급선무죠.’
누구인지 모르지만 배신자가 있다.
그 배신자와 내통한 세력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 자체가 이 상황에는 필요하다.
[어째서…?]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로 단합하거든요.’
나는 간단히 정답을 말했다.
내부의 배신자와 외부의 적.
이 둘은 언제나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해주니까.
‘보통 그렇게 하나로 모아진 충성심은 군주한테 향하지만.’
현재 월족에게는 군주가 부재한다.
즉!
‘지금은 저한테 모이겠지요.’
내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부족민들한테 시간을 주었다. 배신자라는 말에 놀라도록. 혼란이 퍼지고 동요가 스며들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부족민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때쯤이 되어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
“월족이여. 달의 일족들이여! 여신의 이 미천한 종이 말하건대, 지금은 느긋하게 아가씨와 도련님을 시험하거나 평가할 때가 아니오. 정체를 모를 배신자가 숨을 죽인 늑대처럼 우리를 노리고 있소이다.”
“….”
“늑대는 무리를 지어서 바깥의 동료들을 부르고 있다오. 오늘밤, 바로 방금 전에 감히 우리를 습격한 것이 바로 그 동료들이오. 그리고 우리는 저 평원 너머에 간악한 늑대들이 얼마나 더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모른다오!”
부족민들의 낯빛이 딱딱해졌다.
긴장감. 불안감.
그러나 무엇보다도 분노가 그들의 얼굴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감히 어떤 놈들이….”
“주군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재채기도 못한 주제에.”
“지금이면 우리들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뇌물이 오가며, 너무나도 당연한 듯 신관들이 타락했기에, 나는 잠시간 아주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들은 전사였다.
아직 야만스러운 본성을 간직한 전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