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31화 (31/261)

31. 가장 중요한 것 (2)

아리야가 내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견지를 왕자와 왕녀에게 적용한다.

다시 말해서.

“왕자가 패륜아에 구라쟁이인 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월족을 위해서인지. 왕녀가 왕자가 한 짓을 까발리려고 하는 게 월족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나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의 깊이와 바닥은 확인했으니, 이제 그걸 확인할 차례인 겁니다.”

[…타당한 결론입니다만, 그걸 또 어찌 알아내자는 겁니까?]

“일단 천사님, 과거시 좀 팍팍 써주실 수 없어요?”

천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한편으로 계속해서 왕자와 제사장의 동선이 겹치는 부분들 검색하는 중입니다. 양 손에 든 펜으로 각기 다른 글을 적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군요.]

“아이고, 고생하시네요. 우리 천사님!”

[그러게 말입니다. 임무를 수행하는 건 당신인데 고생은 왜 제가 하고 있는 걸까요?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사님도 참. 고생하시는 천사님 보는 제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주 찢어집니다, 찢어져요. 도무지 통탄을 금치 못 하겠습니다….”

[드디어 미쳐버린 충신이여. 잠이나 처 자십시오.]

어쩐지 오늘은 꿀잠이 오겠는 걸?

하지만 꿀잠을 자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턱수염을 비틀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천사님이야말로 쉬십시오. 과거시가 천사님께 부담이 된다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요.”

천사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

[…지금 저를 신경써주는 겁니까?]

“예. 어쨌든 단박에 팍 정보를 찾을 수는 없다는 거잖아요?”

[아직 임무 시간은 많이 남았습니다. 그 동안 제가 노력을 하면….]

‘천사님. 이 임무는 오래 끌어선 안 됩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군주를 정하는 게 하루 늦을 때마다 왕국의 수명은 10년씩 단축될 겁니다. 당장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이 제사장이라는 인간부터가 썩어 빠졌으니 안 그렇겠습니까.’

[뇌물을 받는 것이 천직이라던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닙니다.]

천사의 목소리에도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졌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느낌이 덜하다고 할지, 독기가 빠졌다고 할지.아마도 나랑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다.

‘그건 제가 빙의한 게 완전 후레자식이란 걸 알기 전이었죠!’

그때는 뇌물을 받는 것도 부족들 마음을 달래주는데 쓸모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고 가는 선물 속에 싹트는 인정. 오랜만에 간신 기분 내면서 뇌물을 받아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제사장이 이렇게 썩어빠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와선 같은 일도 전혀 다르게 비추었다.

‘이 제사장이 부족들 마음을 달래주려고 뇌물을 받았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 후계자와 결탁해서 자기 주군을 죽이겠습니까?’

그냥 이 자식은 사리사욕을 위해 뇌물을 받은 거다.

이 무슨 삼류 간신배란 말인가!

‘아리야가 찜찜하단 조언을 했을 때 깨달았어야했어요. 그 여자 데리고 왔던 씨족장 기억나죠? 지금껏 아주 여자 접대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왜 이러냐는 듯한 그 얼굴 그 표정… 으아아아! 내 정신적 정절이 오염되는 기분입니다!’

[충신이여, 뭐라 반응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하여간 이래서 여색에 홀려있는 놈들은 안 됩니다! 전부 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것들이라고요!’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 좀 지랄하십시오.]

‘아니요! 아직 덜 했습니다!’

한참 더 남았다!

‘그렇게 이 여색이나 밝히는 호색한 후레자식 나쁜 놈이 그렇게 많은 뇌물을 처 받았는데, 이 자식의 그런 얕아빠진 데다가 썩어빠진 본성을 뻔히 알고 있을 다른 신관들은 또 아무 말도 안 했죠!’

막사에 산더미처럼 쌓인 뇌물을 보고 내 부하 신관들이 어떻게 반응했던가? 화를 낸 신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나 뇌물을 받으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고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여기서 끝이어도 사태가 심각한데, 안타깝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제가 암살 소동을 벌였을 때는 또 어땠습니까!’

[….]

‘아무도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의심하지 않았죠! 그냥 당연히 암살이 시도되었구나, 하고 넘어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평소에도 암살 시도가 태연하게 벌어졌다는 뜻이에요!’

천사가 침묵했다.

결국 내가 대신 결론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는 썩었습니다요!’

왕국은 건국되기도 전부터 이미 썩어 있었다!

‘이러니까 아까 말한 게 중요해지는 겁니다. 왕자와 왕녀. 둘이 어떤 나라를 만들게 될 지를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쳐낼 가지를 쳐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걸 최대한 빠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때였다.

“적습이다!”

깡! 깡! 까앙!

투박한 종소리가 진영에 울렸다. 막사 너머, 보초병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습이다! 적습이야!”

“모두 무기를 들고 나와라!”

시끄러운 종소리에 뒤이어서 부족민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본능적으로 손도끼들을 챙겨서 막사를 나왔다.

암살 소동이 벌어졌던 탓일까? 내 막사 입구에선 열 명이 넘는 전사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아, 제사장님!”

“이게 무슨 난리인가!”

“죄, 죄송합니다!”

호위병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밤, 횃불로는 밝힐 수 없는 어둠의 저편에서 서서히 칼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보초병이 다급하게 외친 대로 습격이 벌어진 것이리라.

“저희도 아직 아는 바가…. 아무튼 바깥은 위험합니다! 제사장님께서는 안쪽에 계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쯧!”

나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어느 놈들이 급습했는지 몰라도, 뭘 노리고 공격했는지 정도는 뻔히 예측되었다.

“감히 주군께서 돌아가신 때를 노리고 쳐들어왔구나!”

현재 월족은 창졸간에 부족장을 잃어버렸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가 날아간 상황. 만약 월족의 성장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적대 세력이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기습을 걸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

“오랑캐들 주제에 잘도 노는 짓거리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마치 가리비수의 몸에 빙의했을 때와 비슷했다. 이 짜증나는 상황을 도끼 한 자루로 전부 찍어서 깨트리고 싶은 감각!

‘안 그래도 골 때리던 참인데 마침 잘 됐다.’

나는 손도끼를 잡아들고 터벅터벅 걸어 나아갔다.

“제, 제사장님…?”

“너희는 지금부터 내 뒤를 따르라!”

부족장이 죽은 작금에 나는 명실상부 1인자였다. 1인자의 명을 거부할 정도로 간이 큰 병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호위병들은 당황하면서도 나의 명령에 따랐다.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후계자를 지명하기도 전에 당신이 죽기라도 하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슨….]

‘습격당했는데 가만히 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작자를 어느 부족민이 인정해주겠습니까!’

얼마 안 가서 진영에 침입해오는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머릿수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기세를 타고 있었다. 보초병들이 약간 밀렸다.

즉.

‘위험하든 말든 지금은 제가 직접 나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 부족의 보초병한테 적군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보초병이 적한테 둘러싸여 참살당하기 직전, 나는 있는 힘껏 전력을 다하여 손도끼를 날렸다.

퍼억! 도끼날은 밤하늘을 가르고 적군의 머리통마저 갈라버렸다.

“오오! 제사장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보초병이 날 알아보고 감격했다.

“제사장님께서 친히 나서주시다니…!”

“당황하지 마라!”

나는 다음 손도끼를 쥐어들었다.

전사들은 여러 막사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와서 점점 더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주군의 육신이 죽어 쓰러졌다 하여도 영혼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군께서 넋이 되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늘, 한심하게 기습이나 당해서야 되겠느냐! 월족의 전사들이여! 달의 여신을 모시는 종자들이여! 정신을 차리고 창과 칼을 들어라!”

[ 연설(Lv.3)이 발동됩니다. ]

[ 상대들이 당신을 매우 신뢰합니다. ]

[ ‘연설’이 성공합니다! ]

“우오오오!”

내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부족민들도 좀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뿐. 월족의 전사들은 제각각 무기를 쥐어 잡고 함성을 질렀다.

“감히 우리의 군영을 넘본 저 이단자들의 머리통을 깨부숴라!”

“주군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본다!”

“제사장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저 잡것들을 때려 죽여!”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자 당황한 것은 월족을 습격해온 적군이었다.

“잠깐만! 이 새끼들 대장이 뒈졌다며!”

“예, 예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놈들이 당황도 안 하고-.”

좋다.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아마도 저놈이 적군의 우두머리겠지. 가리비수한테서 이어진 동물적인 감각이 내게 시끄럽게 고하고 있었다. 당장 저놈을 죽이라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서 시야가 좁았지만, 상관없었다. 목소리를 들어서 충분히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 손도끼를 날려 놈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쉬운 일.

“달의 여신이시여!”

내가 손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어두운 밤.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아 도끼날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나는 주변에 몰려든 부족 전사들한테 일부러 보라는 듯, 제대로 들으라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만일 저희를 버리셨다면 이 미천한 종의 공격이 빗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만일 아직 저희를 총애하신다면, 바라옵건대 이 공격이 적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으로 들어가게 해주소서!”

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직 미신을 모시느라 미개한 부족 전사들은, 그런 내 목소리를 듣고 ‘오오’하고 탄성을 흘렸다. 아마도 내가 신내림이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마웠다.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나한테만 들리는 목소리가 슬며시 어둠에 울렸다.

나는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힘껏 손도끼를 날렸다.

휘이이익!

도끼가 밤공기를 섬뜩하게 갈랐다.

퍼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손도끼가 안착한 곳은, 적군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자의 이마였다.

창백한 달빛 아래, 적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뇌수를 흘리며 쓰러졌다.

“조, 족장님! 족장님!”

“족장님이 당했다!”

적군이 당황했다. 그들의 혼란이 내심 반가웠다. 내가 생각한 대로 저자가 적군의 우두머리였다는 뜻이니까.

적군이 당황한 것을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아군, 월족의 전사들이었다.

“오오오오!”

“제사장님의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하셨다!”

전사들이 목청을 돋우며 크게 소리쳤다. 빨갛게 충혈된 눈들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기습을 받아서 당혹스러워한 기색은 이제 말끔히 사라졌다.

자신들이 여전히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확신하는, 한 무리의 짐승들만 사납게 숨쉴 뿐.

[ 상대들이 당신을 매우 신뢰합니다. ]

[ ‘예언’이 성공합니다! ]

그것으로 전세는 역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여신께서 우리를 총애하신다!”

전사들이 호응했다.

“여신께서 우리를 총애하신다!”

“여신께서 명하나니, 우리는 살 것이고 저들은 죽을 것이라!”

“우리는 살 것이고! 저들은 죽을 것이다!”

내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소리를 토해냈다.

“학살하여라!”

“우오오오오오!”

전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우! 우! 우! 잠자리에서 자다가 깨어난 부족민도 어느새 밤을 잊어버리고 야만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서운 짐승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짐승들은 피를 원했다.

“히익!”

“마, 막아라!”

당당하게 우리의 군영이 침입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 적군들이 뒷걸음질 쳤다. 분명히 공격해온 것은 저쪽이었으며 방어해야 할 것은 우리였다. 그런데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씹어 죽여라!”

“이놈들! 내장을 발라내서 여신께 바쳐 주마!”

여기저기서 창이 날아들었다. 쉬익! 쉭! 창은 밤하늘을 가를 적에 뱀처럼 쉭쉭거렸다. 창끝은 독사의 이빨과 같아서, 한번 명중하면 그게 곧 치명타였다. 투창에 당한 적군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당연하다는 듯 뇌물을 주고받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그 아들한테 제사장이 협력하는, 막장 부족 중에 막장 부족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모든 단점을 씹어 먹고도 남을 장점이!

‘이들은 강하다!’

잘 싸웠다.

싸움에 능하였다.

벌어진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을, 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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