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가장 중요한 것 (1)
이 혼돈과 파괴의 상황을 정리해보겠다.
첫째, 왕자는 왕위를 얻기 위해 아버지인 족장을 암살했다.
둘째, 거기에 제사장이 가담했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권력은 송아지처럼 늘어나는데 사람은 쥐새끼들마냥 새끼를 친다. 후레자식들의 등장은 필연이라 할 수 있지.
문제는….
셋째, 그 제사장이 나다.
정확히는 내가 빙의한 인물이었지만 아무튼 이 시대의 나였다.
아, 내가 후레자식이라니! 내가!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당신은 후레자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리야. 그냥 궁금하여 묻는 것입니다만 당신의 기준에서 후레자식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어쩌면 천사가 바로 그 기준에 들지 않을까 의심해봅니다.]]
[누가 이단 아니랄까봐 발상의 수준이 악마적이군요.]
성녀가 천사를 후레자식으로 인정하고, 천사가 성녀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실시간 종교 전쟁의 현장을 보니, 제사장이 족장 암살에 일조했어도 이상할 건 없겠다는 깨달음이 든다.
“제사장님?”
음.
진정 좀 하자.
“예, 아가씨….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이었던 터라.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왕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저야말로 제사장님께서 마음의 준비를 하실 틈도 없이 이런 말씀을 드린 듯합니다. …차라리 내일 이어서 말씀을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까?”
나는 임무창을 흘끗했다.
+
<역사변이점>
[ 평원의 나라, 산의 나라 ]
일시: 건국 30년 전
난이도: D
제한시간: 7일(현재: 5일 11시간 23분 15초)
클리어 조건: 왕국을 건국하게 될 시조를 선택하라.
+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들어 두는 게 낫겠지. 나중에 또 뭔지 모를 뜬금포가 터지는 것보다야 말이다.
왕녀는 한 차례 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는 답했다.
“제사장님을 암살하려 했던 자를 찾으러 다닐 때, 저와 제 친위대가 다소 늦게 나타났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바로 얼마 전 주군을 저격했던 적병의 시체를 찾았다 하셨으니, 놈을 찾기 위해 자리를 비우신 것 아니셨는지 지금에 와서 이 늙은 여신의 종은 판단을 합니다.”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머리 없는 시신을 저와 제 친위병들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왕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제사장님을 위협한 암살자의 머리라며 누군가의 목을 잘라왔었지요. 머리 없는 저격병의 시신과 몸통 없는 암살자의 머리… 하루 만에 마련된 것들 치고는 참으로 공교로운 한 쌍이 아닙니까?”
“오오…. 즉,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
왕녀는 숨을 고르고서 단번에 말했다.
“제가 가진 시신과 동생이 가져온 머리의 짝을 맞추어 보면, 마치 부러뜨린 칼날을 다시 하나로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러하다면 그것으로 확실한 물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 ◈ ◈
왕녀와의 대화가 그렇게 마무리되고 나서, 나는 알게 된 정보들을 다시금 되짚었다. 함께 정보들을 되짚던 천사가 감탄한 듯 말했다.
[주장의 내용도, 증명의 방법도 조리 있군요. 확실히 이 왕녀는 수완이 있는 인물입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거지발싸개 같은 충신의 몫이지만, 이 왕녀가 시조가 된다면 왕국은 보다 부강한 곳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아리야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의문을 표시합니다.]]
천사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어떤 부분에 의문을 표시하는 겁니까?]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발언권이 뭔가 싶었는데, 천사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야 할 내용이 긴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조언자는 당신 하나뿐이기도 하니. 자모신이시여, 종의 소망을 들어 잠시간 그 입을 허해주소서….]
천사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혹시 제가 밉보여서 허락해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뭘로 보는 겁니까. 자모신께서 말씀하시길,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와 나와서는 안 될 말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 …먼저, 사람의 몸과 목의 절단면이 부러뜨린 칼날이나 나무쪽처럼 꼭 맞아 떨어질 리 없어요. 또 계교에 능한 왕자가 아예 다른 사람의 머리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고요.]
[그 또한 그럴듯하군요. 왕녀의 말에 따라 두 쪽을 맞추어 보았는데 어긋난다면 왕녀가 주장한 내용 전체의 신빙성에 금이 가게 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왕자가 야료를 부렸는지 부리지 않았는지는 제가 과거시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니….]
천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리야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무엇보다 왕녀가 시조가 된다고 하여 월족이 부강해질 것인가 하는 데에 대해서도 의문이에요.]
[그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임무창의 클리어 조건을 보세요.]
그것은 나도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왕자에 대해서도 ‘바닥과 깊이’를 봤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거고.
남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던 것이지만, 이번 임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국의 시조를 선택하는 것이죠.”
[그게 그것 아닙니까?]
천사님의 어조에 언짢은 기색이 섞였다.
[자기 아비를 암살한 자가 왕좌에 앉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아비의 한을 풀어주려 하는 이가 왕좌에 앉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이득만 되면 거짓과 기만을 서슴지 않는 자가 영도자로서 걸맞겠습니까, 아니면 우직하게 진실을 밀어붙이는 이가 영도자로서 걸맞겠습니까. 무릇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입니다. 군주가 맑아야 신하가 맑고, 신하가 맑아야 백성들이 맑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천사님은 왕녀에게 마음이 기운 모양이다.
하지만 시대에 휩쓸려야 했던 아리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었던 저는 제 부족을 환난으로 밀어 넣었고, 거짓으로 속였던 예언자께서는 제 부족을 저토록 강대하게 만드는 기틀을 마련했지요.]
천사님은 말문이 막힌 듯 말이 없어졌다.
아리야는 들판을 때리는 빗방울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열 개의 계명. 홍수의 예언. 선택 받은 민족… 신화는 거짓이고 전설은 기만이에요. 그것이 월족을 강하게 만들었다면, 천사님. 강해지는 길이란 거짓과 기만에 있거나, 적어도 진실을 추종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건… 너무 치우친 시선입니다. 최초의 성녀여. 그대는 그대의 경험에 파묻혀 있는 것입니다.]
[예. 겪은 것 이상은 알 수 없지요.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조언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제가 조언자의 위치를 허락 받은 것은 제가 아는 것을 조언하라는 의미일 거예요.]
아리야의 목소리는 어느덧 비에 젖은 진창을 닮아 있었다.
천사는 차마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리야가 말했다.
[설령 왕자가 미치광이 살인마이고 가면을 쓴 사기꾼이어도, 그 거짓과 기만이 월족을 부강하게 할 수 있다면 그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무리를 이끄는 자들이 짊어져야할 업일 거고요.]
[으음….]
천사가 깊이 침음했다.
아리야도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생각도 끝났겠다, 나는 정리하고자 입을 열었다.
“조언들 감사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허. 당연히 아리야의 말에 일리가 있지요. 다짜고짜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들면 딱밤 한 대로 안 끝나는 게 세상사는 이치 아닙니까.”
천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언젠가 크게….]
“다만 아리야여.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있다오. 중요한 건 ‘옳고 그름을 따진다’나 ‘거짓과 기만을 사용한다’ 같은 게 아니라오.”
제사장의 몸에 빙의해서 좋은 게 있다면 말하면서 쓰다듬기 딱 좋은 위치에 수염이 달려있다는 거다.
나는 그 탐스러운 수염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이기는 게 중요한 거요.”
우선은 이길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 그게 핵심이다.
거짓과 기만은 그 위치에 서기 위한 방법론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그 위치에 선 다음의 방법론인 거지.
철천지원수보다는 사이 나쁜 부부 같은 관계라고 할까?
“그리고 이건 왕녀도 알고 있는 부분일 거요.”
나는 막사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먼저 왕녀는 이 몸이 받은 뇌물들을 봤소. 그리고 내가 계면쩍어 그건 승하하신 주군께 바쳐진 것이라 말하자마자, 그렇다면 바로 환수되어야 마땅하겠다고 말했소.”
[[기억나요. 하지만 그 다음에 그건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렇소. 말하자면 왕녀는 ‘그 뇌물을 가지고 있어도 좋다’는 식의 암시를 준 것이라오. 원칙과 명분을 최대한 지키는 선에서 말이오.”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이어갔다.
“왕자에 대한 의혹을 전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밝히려고 한 대신 우선 나를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 역시 그래서겠지. 내가 너무 당황한 것 같으니까 물증 이야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하루나 주겠다고도 하고….”
하루. 그거 대단한 거다.
무리해서라도 바로 다 말하고 싶었을 텐데 말이지.
“이기는 방법을 알고 이기기 위한 인내심을 갖추었다는 거요.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는 하오만은… 어쨌든 군주로서 부족함이 있지는 않은 셈이오.”
적어도 내가 모아놨던 신관들, 그 빡대가리들보다는 훨씬 정치를 할 줄 안다.
어디 가서 책잡히진 않는 수준이라고 할까?
“음.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아리야는 군주로서 부족했다는 말이 되니 미안하오만은….”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시간이 지나 발언권이 회수되었는지 아리야로부터의 전언이 간략화되었다. 나는 그 전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천사를 향해 수염을 비틀었다.
“그러니 문제는 차라리 다른 데에 있습니다. 클리어 조건과도 관계있는 겁니다만은….”
[어떤 문제 말입니까?]
왕자와 왕녀. 둘 다 이기는 방법을 알며, 이기려 하고 있다.
왕자는 아비인 족장을 암살했고, 왕녀는 그 암살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고.
왕자는 제사장을 포섭했고, 왕녀는 그것을 모른 채 제사장을 설득하려 하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왕자의 완승이다. 왕자가 늘 한 발자국을 앞서가고 있다.
그에 비해 왕녀는 정보가 늦고, 그럼으로써 행동도 늦으며, 그 늦은 행동도 역효과를 낳고 있다.
권력은 낙오자에게 엄정한 법. ‘본래 역사’에서 왕자가 왕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사장을 먼저 포섭했던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할까.
‘그런데 지금은 그 제사장이 나란 말이지.’
그런 줄도 모르고 왕자는 내가 포섭된 걸로 착각하고 있을 테니, 왕자와 왕녀의 정보 득실 차이는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야 이런 걸 예측 못한 게 왕자의 잘못은 아니니 그에겐 억울한 노릇이겠지만, 어쩌겠나. 그 성격과 내숭으로 억울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왔을 테니, 그 업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중요한 건 둘의 승률이 동일해진 상황에서, 이기는 쪽이 왕국의 시조가 되는 것이라면….
“이긴 다음에 뭘 할 것인가 하는 문제죠.”
승부를 가르는 포인트는 결국 이것.
왕자와 왕녀, 그 둘이 각각 어떤 왕국을 세우려 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아리야는 저한테 약속을 받았었지요.”
나는 아리야의 전언 창을 바라보았다.
“거짓과 기만을 사용하되 반드시 월족을 위해 그리 해달라고. 아리야가 제 방식을 용납한 건 사실 그래서였잖습니까? 그거랑 똑같은 견지를 적용해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