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8화 (28/261)

28. 왕녀, 비류아 (1)

잠시 후, 신관들을 물린 나는 왕녀를 막사로 초대했다.

“허허. 어서 오시지요, 아가씨. 술이라도 한잔 어떠하온지요?”

“괜찮습니다.”

비류아 왕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에는 술을 삼가고 있습니다.”

“신기한 말씀입니다. 전투는 어제 끝나지 않았나이까?”

“아닙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보다….”

왕녀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도 그녀는 전투를 앞둔 사람처럼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막사를 둘러보았다. 내 막사는 그간 받았던 뇌물들로 인해 비좁았다. 그렇게 막사를 훑은 시선이 화살처럼 내게 꽂혔다.

음.

천하의 나라도 이런 눈빛을 받으면 좀 찔리긴 하는군.

“아, 이것들입니까? 이것들은 씨족장들이 떠나신 주군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렇다면 이건 아버님께 바쳐진 것이군요.”

어라.

“음, 그렇사옵니다만….”

“하다면, 아버님의 친위대로 하여금 옮기도록 하는 것이 맞겠군요.”

음.

논리는 그렇게 되는데…. 후계자 지명권을 가진 내 앞에서 그런 논리를 꺼내다니.

내가 잠자코 있자, 왕녀는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건 차후 처리해도 될 일이겠습니다.”

오호.

“음, 예. 급한 사안은 아닙지요.”

“하여, 무슨 일로 저를 따로 보자고 말씀하셨습니까, 제사장님?”

“흐음.”

나는 주변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들(물론 모조리 남자다)에게 손짓했다.

“모두 물러나라. 아가씨와 긴밀히 나눌 말이 있구나.”

“예, 주인님.”

꾸벅. 노예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하나둘씩 막사를 나섰다.

노예들이 나서고 나자 막사는 더 적막해졌다. 작은 횃불이 피어올랐고, 횃불에서 흐르는 탄 냄새 말고는 왕녀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왕녀는 은빛 눈동자로 빤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달라지셨군요.”

그녀가 불쑥 중얼거렸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여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달라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사장님.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제, 아버님께서 명을 달리하신 이후로 눈빛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침착하게 바뀌었다고 할까요. 아니면 조금 더 마음이 읽히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요.”

여기서 나는 오늘 두 번째로 왕녀한테 놀랐다.

‘허.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 못해 그냥 꿰뚫어 보는데요?’

[…그렇군요. 다른 것은 몰라도 안목 하나만은 왕재(王材)에 걸맞습니다.]

이번 임무에서 나는 딱히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보고 사람이 바뀌었다며 단언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이것이 본능적인 직감인지, 아니면 정말로 스스로 판단하고 파악하는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허허. 저는 언제나 이러했습니다.”

“그랬습니까?”

“예. 다만 주군께서 승하하셨으니, 이 미천한 여신의 종도 평소처럼 한가롭게 율법이나 읊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내 말에 왕녀가 입을 다물었다. 군주가 죽었으니 지금은 비상 상황이고, 그런 만큼 나도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내 주장에 일단은 납득한 모양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사옵니다. 아가씨. 우리 전사들을 이끌고 싶은 마음이 있사옵니까.”

“….”

왕녀가 무표정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 궁금해서 기다리는데, 왕녀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 역시 이상한 말씀입니다. 제사장님께서는 예전부터 저를 꺼리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태어났을 때도 ‘이 아이에게는 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어라?

“이후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저를 경계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위험이 큰 전투에는 저를 장수로 삼아 파견하였고, 위험이 적은 전투에는 제 동생을 출전시켰습니다. 저는 제사장님께서 제 죽음을 바라신다 짐작했습니다만. 아니었습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지만 내심 황당했다. 내가 빙의한 제사장이 옛날에 그런 말을 지껄였다고?

‘천사님? 이거 알고 있었어요?’

[잠깐 기다리십시오. 저라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파악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검색하고 있습니다. …예, 확인 완료.]

천사도 다소 당황한 목소리였다.

[비류아 왕녀의 지적이 맞습니다. 비류아 왕녀가 태어난 날에 제사장은 불길한 좋은 예언을 입에 담았습니다.]

‘으음.’

[당시 왕녀는 족장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니라 네 번째 부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도 정실 소생과 측실 소생을 차별하자는 뜻에서 그런 발언을 했던 거로 짐작됩니다.]

젠장.

요는 정치적으로 제사장과 왕녀가 결코 호의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 사실상 적대 관계라고 말해도 무방하겠다.

‘이러니까 원래 역사에선 당연히 왕자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지!’

제사장이 미쳤다고 그동안 각을 진 왕녀를 후계자로 지목하겠나.

내가 이 사태를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왕녀가 거듭 무표정한 눈길을 보내왔다.

“제사장님, 말씀하시지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선대의 뜻이었사옵니다.”

내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왕녀가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의 뜻이었다니요?”

“주군께서는 다음 후계자에 대해서 옛날부터 고민이 깊으셨사옵니다. 혹시라도 당신께서 운명하신 이후, 도련님과 아가씨끼리 군주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되면 어쩌나 고민하신 것이지요.”

오오? 나쁘지 않다.

일단 한 번 입이 뚫리기 시작하니까 혀가 저절로 움직였다.

“여러 상황을 두고 주군께서는 고민하셔야만 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가씨께선 첫 번째 부인의 몸에서 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정통성이 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요. 더군다나 전사들 사이에선 인정받기 쉽지 않은 여자의 몸…. 주군께서는 저에게 불길한 예언을 주문하셨사옵니다.”

“….”

왕녀가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저에게 권력이 모이지 않도록 일부러 거짓 예언을 명령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께서 직접?”

“예에. 아가씨.”

비류아 왕녀는 다시금 입술을 닫았다. 여전히 그녀는 무표정했지만, 눈매나 입가 어디에선가 괴로운 기색이 엿보였다. 아마도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당신의 임기응변에 감탄합니다.]]

지금 상황을 관전하고 있는 내 조언자도 박수를 보내오긴 마찬가지였다.

‘캬아, 제가 한 말이지만 꽤 그럴듯하죠?’

[당신의 거짓말하는 솜씨만큼은 저도 인정합니다.]

‘당연하죠. 아무렴 충신인걸요.’

[이번 임무가 얼른 끝나버렸으면 좋겠군요….]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 비류아 왕녀는 어렵사리 마음을 정리한 듯했다.

왕녀 입장에선 태어날 때부터 여태까지 쭉 차별을 받아온 것이다. 얼굴이 무표정하다지만 마음까지 무감정할 리는 없다. 쉽사리 마음의 응어리가 다 풀리진 않겠지.

“…아버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아가씨.”

“아닙니다. 저 또한 머리로 이해합니다.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명해두어야 전사들도 혼란스러워지지 않으니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었습니다.”

한 박자 숨을 쉬고 왕녀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제사장님. 그렇다면 왜 지금 와서 제게 진실을 말해주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왜 마지막에 동생을 후계자로 지명하시지 않고, 굳이 제사장님께 지명을 맡기신 것입니까?”

왕녀의 눈동자엔 아직 의문이 완벽히 걷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왕녀가 질문한 것에 어찌 대답할지 얼추 그림을 그려둔 상태였다. 거짓말이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렁이 같아서, 시작하긴 어려워도 계속 키워나가기란 쉽거든.

“왜냐하면 아가씨께서 예상을 뛰어넘어 훌륭해지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리고 나는 눈앞의 왕녀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을지 예상이 되었다.

태어났을 때 이미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불길한 예언을 들은 왕녀였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고난과 차별을 겪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속에선 열등감이 엄청 심하겠지.

‘다시 말하면.’

내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보다 아부하기 쉬운 사람이 없죠.’

간신 경력 수십 년인 나의 먹잇감이었다.

“예. 본래 주군께서는 아가씨를 버리실 심산이었습니다. 허나 벼랑에 떨구어도 죽지 아니하는 사자 새끼와 같이, 아무리 어려운 고난을 내려도 아가씨는 끊임없이 극복했습니다. 주군께서는 당황하셨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하셨나이다.”

“기뻐하셨다면….”

“어쩌면 아가씨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이 아닌가, 주군께서는 고민하시기 시작했사옵니다.”

비류아 왕녀의 눈이 흔들렸다.

“제가 아버님의 뒤를…?”

“예에.”

나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주군께서 유명을 달리하시기 며칠 전, 저를 부르셔서 대화를 나눈 바 있사옵니다. 이제 돌이켜보니 아마도 주군께서는 이번 전투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실 것을 그때 이미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군께선 제게 탄식하셨습니다. 솔직히 도련님과 아가씨 중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지 이제는 모르겠노라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천사가 머릿속에서 경악했다.

[맙소사, 정말 거짓말이 줄줄 나오는군요. 어떻게 침도 바르지 않고 사기를 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당신의 얼굴을 보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천사의 말을 무시했다.

“물론 주군께선 알고 계셨습니다. 정확히 후계자를 정해야만 비로소 전사들 사이에서 잡음이 없어진다는 것을. 하지만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군께서는 도저히 결정하실 수 없었나이다. 아가씨. 그만큼 아가씨가 훌륭해졌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저도 주군과 똑같은 고민을 토로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 역시, 도련님과 아가씨 중에 누구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사옵니다.”

“…저는.”

왕녀가 주먹을 꾹 쥐었다.

“저는 틀림없이 아버님께서 저를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입술에서 오래 묵은 원한이 흘러나왔다.

“제사장님께 지명권을 하사하신 것도…. 어차피 동생이 후계자로 지목될 것이 확실하니, 그저 형식을 갖춘 것뿐이라고 여겼습니다. 달의 여신께서 동생을 선택하셨다는 식으로 치장하기 위해서라고….”

“음.”

그러게. 아마도 그게 진실일 거다.

족장이 홀로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보다 제사장인 내 입을 거쳐서 지명하는 편이 더 새로운 군주의 권위에 힘을 실어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옵니다. 주군께선 이미 아가씨의 실력을 인정하셨나이다.”

움찔. 왕녀가 어깨를 떨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떠나가신 주군을 그만 용서해주시지요.”

“….”

비류아 왕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뒤, 숨 죽여서 눈물을 참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막사가 조용해졌다. 왕녀와 나 사이엔 불이 타는 냄새에 더해서 원한이 흐르는 소리가 흘렀다. 얼굴이 아래로 향해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왕녀는 무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괜찮군요.’

나는 내 아첨이 거둔 결과에 만족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비한테 외면을 받았다는데 살면서 아부를 얼마나 들어봤겠어요?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을 거고, 특히나 아버지한테 인정받고 싶었겠죠.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권력자들에겐 약점이에요. 약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약점을 알아서 뭘 어쩔 생각입니까?]

‘어허. 보험이죠 보험. 제가 왕자의 약점을 잡아둔 것처럼요.’

[왕녀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같은 말을 왕자한테 하셨다가 어찌 되셨는지 까먹으셨나봅니다, 천사님. 제가 누구라구요?’

[빌어먹을 왕국의 염병할 충신입니다….]

천사가 이를 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식어도 좀 못박아둘 걸 그랬네.

그때쯤 비류아 왕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으려나 예상했는데 내 짐작이 틀렸다.

오히려 왕녀는 표정이 결연했다.

‘오.’

원한과 슬픔을 곱씹는 기색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는 솜씨도 뛰어난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평가가 조금씩 올라가는 가운데 왕녀는 말하였다.

“제사장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