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왕자, 주온 (3)
우리 왕국의 역사서에는 주온 왕자만 기록되어 있다. 말했다시피, 그 기록된 역사란 것도 믿기 힘든 전설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까 역사가 잊어버린 왕녀도 한 가닥 하는 것 아니겠나.
‘한쪽은 연기력을 타고나서 자유자재로 사람들을 속이는 왕자이고. 다른 한쪽은 무감정하긴 해도 동생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할 정도로 눈이 정확한 왕녀이고. 허어. 양쪽 다 인물은 인물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
‘어라?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천사님? 혹시 삐졌어요?’
내가 능글맞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저한테 내기를 지니까 삐졌습니까? 에게게. 천사씩이나 되는 분께서 고작 인간한테 졌다고 토라지셨습니까요? 이거 안 되겠네.’
[닥치고 임무에나 집중하십시오.]
역시 사람은 일단 이기고 봐야 돼. 승리란 얼마나 즐거운가.
마음속으로 지금 상황을 잔뜩 만끽하면서, 내가 말문을 열었다.
“그만. 거기까지만 다투십시오, 도련님. 아가씨.”
“…제사장님.”
“우리 모두 슬프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사옵니다.”
내가 짐짓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달의 여신께서 십계명 마지막에 말씀하시길, ‘전쟁이 나서 싸울 적에 분열하지 마라.’ 강조하셨나이다. 지금 저희가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더라도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나 같습니다. 부디 갈등을 멈추십시오.”
“…예. 뭐, 제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왕자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쉽게 수긍하였다. 아마도 암살 소동을 통해서 전사들의 환심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얻을 건 다 얻었으니, 이대로 물러나도 상관없다며 판단했겠지.
“….”
왕녀는 내 쪽을 향해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허례허식이 없이 사람 자체가 담백한 것 같았다. 그녀는 곧바로 등을 돌려서 막사를 나가버렸다.
“음.”
나는 왕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부하들을 불러들였다. 내가 암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탓일까? 부하 신관들은 모두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도련님이 암살자를 잡았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허어! 제사장님께서 부족의 기둥이시거늘 감히 무엄하게도 칼을 들이밀다니, 시체가 되어서도 저주해야 할 천놈입니다!”
짜식들, 누가 보면 진심으로 내 몸을 걱정하는 줄 알겠다. 내가 죽으면 저 부하 녀석들 중에 한 놈이 다음 제사장으로 책정될 거다. 겉으로야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도 속으로는 못내 아쉽겠지.
물론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내 쪽도 똑같았다.
“허허. 자네들이 염려해준 덕분에 무사하다네. 그보다 자네들에게 긴히 해줄 말이 있는데….”
“무엇이든 말씀하시옵소서. 제사장님을 위해서라면 저희 모두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퍽이나 그러겠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신관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은 내가 정말로 습격을 받은 줄 알고 있겠네만. 방금 암살 소동은 거짓이었다네.”
“예?”
“아무리 대단한 암살자라 해도 본인의 호위병들을 뚫어내기란 어려울 터. 전부 도련님과 아가씨의 성정을 시험해보기 위해 본인이 자작극을 펼친 것이라네.”
“자, 자작극이라니요…?”
신관들이 어리둥절해진 낯빛으로 서로 쳐다봤다.
“그렇다면 아까 도련님이 잡았다는 그 범인은 어찌 된 일입니까?”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본인은 분명히 자작극을 펼쳤거늘, 도련님은 존재하지도 않는 암살자를 찾아다가 여기에 대령했구먼.”
“….”
“자네들은 이를 어찌 생각하는고?”
신관들이 숨을 죽였다.
◈ ◈ ◈
암살 소동의 전말을 나한테 전해들은 다음.
“세상에! 믿을 수 없습니다!”
신관들은 분개해서 코를 벌렁거렸다.
“제사장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암살자를 만들어 내다뇨! 이, 이건 군주의 덕목이 아닙니다! 어딜 봐도 사기꾼의 수작입니다!”
“그렇습니다! 맙소사. 도련님이 그런 인간 백정이었을 줄은…!”
신관들은 이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평소에 왕자의 됨됨이를 좋게 본 사람일수록 충격이 더 컸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차기 부족장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해온 인재가 사실은 거짓말쟁이에 내숭쟁이였다는 말이니까.
“여기서 이렇게 얘기만 하고 있을 게 아닙니다!”
신관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월족 사람들한테 알려야 합니다! 도령의 추악한 일면을 널리 알리고, 후계자 따위는 넘볼 수 없게 혼쭐을-.”
하지만 신관은 막사 바깥으로 달려 나갈 수 없었다.
휘익!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신관의 코앞으로 무언가가 날아가서 스친 것이다.
다름 아니라 내 손에서 날아간 손도끼였다.
“힉…?!”
“어딜 가는가?”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가리비수의 기술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딴 무기는 몰라도 내 도끼술 만큼은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 한 뼘만 삐끗했어도 코가 잘릴 뻔한 신관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다른 부하들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침착하고 앉게나.”
“하, 하지만… 제사장님….”
“부족 사람들한테 도련님의 진짜 모습을 알린다고 해봅세.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나는 여유롭게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방금 내가 선보인 도끼술이 워낙에 인상이 깊었던 건가. 신관들은 자꾸만 손도끼가 날아간 막사 입구 방향을 힐끗거렸다. 그래서인지 대답이 다 어수룩했다.
“뭐, 뭐가 달라지다니요?”
“도령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부족민들은 실망할 테고. 어. 그럼 자연스럽게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시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비명에 가신 주군의 뜻이기도 하실 터….”
“쯧쯧.”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수준의 문명에서는 이 신관들도 제법 머리가 좋은 식자층에 속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부족 수준. 생각이 짧았다. 아니, 생각이 짧다기보다는 정치질에 미숙하다고 할까.
“이래서야 원. 답답하구만!”
“저, 저희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쪼록 말씀해주시옵소서.”
“말보다는 행동이지. 본인이 하는 걸 잘 보게나. 크흠.”
나는 목청을 쓸었다. 어느 정도 목소리를 다듬은 다음, 딱 막사 바깥에는 흘러가지 않을 정도의 음량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의 그림자로 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친애하는 월족의 전사 여러분. 저는 억울합니다….”
[ 연설(Lv.3)이 발동됩니다. ]
흠칫.
내가 입을 열자마자 신관들이 움찔거렸다. 나의 표정과 목소리,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마치 눈앞에 월족 사람들이 모인 것처럼 연설했다.
“저는 정말로 제사장님을 공격한 암살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령 증거가 부족했다고는 해도,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을 쫓아가서 잡았을 뿐입니다…! 달의 여신께 맹세하건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건, 저와 함께 암살자를 뒤쫓은 제 부하들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
“저에게 만일 죄가 있다면 단지 하나, 제사장님의 명령에 최대한 충실하고자 노력했다는 죄뿐입니다! 설마 암살자 소동이 꾸며낸 거짓말이었음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저는… 저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 아버님도 그렇게 창졸간에 돌아가셨는데… 여기서 제사장님마저 잃어버리면 우리 월족이 아예 주저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에, 필사적으로….”
신관들이 멍하게 입을 벌리고서는 내 열연을 지켜보았다.
나는 흐느끼는 목소리마저 냈다.
“아니요, 그렇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다행입니다. 네. 제사장께서 무사하시다는 것이 제일 다행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실수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오해해서 죽였다면, 저의 잘못이고 저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단지 월족의 미래를 걱정했을 뿐이라는 점은 의심하지 말아주십시오….”
어느덧 막사 안은 적막해졌다.
타닥타닥, 하고 모닥불이 조용히 피어오를 뿐.
[ 상대들이 당신을 극도로 신뢰합니다. ]
[ ‘연설’이 성공합니다! ]
“흐음.”
나는 목청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신관들을 돌아보았다.
“만약 도련님이 이러시면 어쩌려고?”
“어어, 어어어.”
그제야 신관들이 한두 명씩 정신을 차렸다.
“제, 제사장님. 이것은 대체…?”
“본인이 한번 도련님의 입장이라 가정하고 연기해보았다네.”
신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들이 방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극을 준 것이라네.”
“방심이라뇨, 제사장님. 저희는….”
“도련님은 지금까지 자네들을 속여 왔네. 자네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월족 전체를 속여 왔지. 미소를 바라는 부족민한테는 미소를 보여주었고, 전사의 함성을 바라는 부족민한테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인 양 연기했다네. 이보게나. 자네들은 이게 쉬운 일처럼 보이는가?”
“….”
“설마 도련님께서 ‘예, 부족장이 되고 싶어서 없는 암살자를 만들어다가 바쳤습니다.’ 하고 순순히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신관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신관들은 왕자를 무시했을 것이다. 조금 뛰어나다 해도 어차피 아직은 어린 전사.
후계자를 지목할 권리가 제사장인 내게 있는 이상, 얼마든지 왕자를 숙청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쉽게 생각했을 터.
‘그리 쉬운 인간이었으면 우리 왕국의 시조가 되지도 못했을 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왕자는 걸물.
사람을 속이는 재능과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면… 어쩝니까?”
신관 중 한 명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부족민들은 점점 더 도련님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아가씨를 지지하는 전사들도 있긴 있지만, 아무래도….”
“도련님을 지지하는 세력보다는 많이 약하겠지.”
“예에.”
척 봐도 그래 보였다. 왕자는 타고난 연기 실력을 이용해서 뭇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매우 외향적인 성격인 거다.
‘반면에 왕녀는 내향적인 성격이지.’
무표정하고 말수가 적다. 가끔 입을 열어서 말할 때도 문장이 뚝뚝 끊어진다. 이런 유형은 생각이 깊을지는 몰라도, 부족민들의 폭 넓은 지지를 얻어내기엔 불리하다.
“물론 주군께서 제사장님한테 후계자를 지목할 권리를 남기고 떠나시긴 했습니다만… 만약 제사장님께서 갑자기 아가씨를 후계자로 선정한다면, 많은 부족민들이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제 생각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가씨를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도련님을 후계자 구도에서 탈락시킨 다음에 그리해야할 텐데….”
“하지만 확실히 제사장님 말씀처럼 도련님께서 행동하시면 어찌할 도리가….”
“그렇다고 이대로 두는 것도 어렵지 않소? 제사장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무고한 자를 죽이다니, 우리가 그런 무고한 자에 들어갈 날이 없을 거라 자신하는 거요?”
그야말로 전전긍긍.
그런 속에서 나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걱정하지 말게. 당장은 그냥 이 사람이 이리 말했다는 것을 알아두기만 하도록 하게나. 왕자님에 대한 건은 이 사람이 알아서 하도록 할 테니.”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은…?”
“그건 나중에 차차 말해주도록 하겠네. 그보다도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다네.”
나는 턱수염에서 손을 떼고는 신관들을 둘러보았다.
“본인이 직접 아가씨를 만나봐야겠네.”
왕자의 바닥과 깊이는 이것으로 밝혀졌다.
이제는 왕녀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아볼 때였다.
‘비류아 왕녀. 어디 당신의 바닥과 깊이를 보도록 합시다.’
나한테는 얼마든지 왕국의 시조를 바꿔버릴 생각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