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왕자, 주온 (2)
존재하지도 않는 암살자를 찾느라 전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런데 서서히 새벽이 익어갈 시간이 되어서, 문득 군중 한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오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전사들은 지친 기색을 잊고 웅성거렸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이제 일이 끝나겠구나, 하고 안심하는 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설마…?]
천사가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썩은 간신의 말처럼 세상사가 흘러갈 리는….]
미안하지만 이번엔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터벅, 터벅.
왕자가 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걸어왔다.
왕자의 오른손에는 무언가 묵직한 물건이, 어디를 어떻게 봐도 사람 머리통으로 보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한창 현실을 부정하던 천사는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제, 제사장님.”
왕자가 내게 공손히 사람 머리를 바쳤다. 놀랍게도 왕자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히, 힘들지만 잡아왔습니다! 수상한 녀석이 저를 보니까 도망치더라구요. 아, 쟤가 암살자구나, 여기서 놓치면 큰일이겠구나 생각해서 얼른 화살을 쏴서 잡았습니다. 웨, 웬만하면 생포해서 제사장님께 대령하고 싶었는데….”
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순수하게, 오직 제사장인 나를 위하여 새벽까지 뛰어다녔다고 믿어버릴 만큼, 주온 왕자는 입가에 천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월족 전사들은 전부 ‘뭘 모르는 사람’에 해당했다.
“역시 도련님이야!”
“주온 도련님께선 일을 해야 할 때 꼭 하신다니까!”
전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왕자를 찬양했다. 그런 전사들을 향해서 왕자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아하하…. 뭐, 제사장님은 이제 내 두 번째 아버지와 같은 분이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몸을 해친 범인을 잡아야지 않겠나.”
“오오오!”
전사들은 더욱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효자 났네, 효자 났어.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당신의 사람 보는 눈에 감탄합니다!]]
왕자의 철면피에 경악한 것일까. 그동안 조용히 있던 아리야가 열렬히 문자를 보내왔다.
이 아이가 나한테 감탄하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정말로 반응을 원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천사님? 어허, 뭐 하십니까?’
[….]
‘이제 임무 끝날 때까지 절 충신이라고 불러주셔야죠?’
안 봐도 천사의 얼굴이 썩었을 것이다.
◈ ◈ ◈
‘천사님? 이상하네요. 제 귀가 이상해진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립니다요?’
천사는 침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봐주는 법을 몰랐다.
‘아이고. 내 귀가 잘못된 게 맞네, 맞아. 천사님의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뭐 쥐새끼 찍찍거리는 소리처럼 하나도 안 들리네. 이거 참 이번 임무도 잘 수행해야 하는데 귀머거리가 되어서야 어쩌나. 이번 임무는 글렀어.’
빠드득!
머릿속에서 이빨 갈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제가 틀렸습니다. 충신이여. 이걸로 됐습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뇨.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속한 대로 이번 임무 끝나기 전까지 쭉 그렇게 불러주셔야겠습니다.’
[정말 나중에 두고 보겠습니다.]
두고 보자고 말하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한편, 내 눈앞에서 사람 머리통을 바친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 당황스러운 느낌이 왕자의 얼굴에 있었다. 내가 천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왕자에게는 침묵하는 모습으로 비춘 모양이었다.
“제, 제사장님? 뭔가 만족스럽지 않으신가요? 열심히 범인을 찾았는데….”
음, 천사님과 잡담하는 것도 좋지만 임무가 더 중요하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왕자에게 집중했다.
“아니옵니다. 도련님께서 저를 위해 이리도 애써주신 것에 감격한 나머지 그만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도련님이야말로 전에 없는 효자이십니다.”
“아하하, 제사장님도 참. 과찬이시네요.”
왕자는 쑥스러운 듯 이마를 긁적였다. 이제 20대가 될까 말까 한 나이로 보이는데 순둥이인 척 연기하는 솜씨가 가히 60살은 챙겨 먹은 능구렁이와 같았다.
그때였다. 왕녀도 자기의 친위병을 이끌고 가까이 걸어왔다.
왕녀가 다가오는 걸 보고 왕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 누님. 오셨습니까.”
“….”
왕녀는 힐끗 동생을 바라봤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나를 향하여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사장. 사방으로 암살자를 찾아보았지만, 범인으로 의심할 만한 자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왕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했다. 갑작스러운 암살 소동에 허겁지겁 일어나서 수색 작업을 펼쳤을 텐데도, 왕녀는 물론이고 왕녀의 친위병들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왕자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걸었다.
“아. 누님, 암살자는 제가 찾았어요!”
“…네가?”
“예!”
그제야 왕녀는 왕자와 눈을 마주쳤다.
왕자가 자기 손에 들린 머리통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자, 보세요! 저를 보자마자 도망치길래 확 모가지를 잘라버렸죠.”
“….”
왕녀가 차가운 눈으로 이미 죽은 자의 수급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제왕의 핏줄을 증명하여 은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로 그게 암살자라고 확신하느냐.”
“네?”
“암살을 저질러서 도망친 게 아니라 다른 잘못을 저질러서 도망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도망쳤는지 도망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구나. 그게 암살자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즈, 증거라니….”
왕자가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사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 같은 표정과 달리, 왕자는 사람들에게 빤히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구, 군중에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그럼 뭐 때문에 도망치겠어요? 저희가 암살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 다 알려졌는걸요. 자기가 잘못이 없고 떳떳하다면 바로 저희의 조사에 응했겠죠. 그러지 않고 도망쳤다는 건, 뭐랄까….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아니겠어요?”
“설령 그렇다 해도 조사했어야지.”
왕녀가 말했다. 핏줄이 같을 텐데도 왕녀는 자기 남동생과 목소리가 확연히 달랐다.
동생인 왕자의 목소리는 자유롭게 툭툭 튀었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내야 할 때는 움츠러들었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야 할 때는 높아졌다.
그러나 왕녀는 목소리의 높낮이랄 게 없었다. 쭉 일정하게 차가웠다.
“조사도 없이 단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사살하다니. 전사는 함부로 죽음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누님…. 정말 너무하네요.”
왕자가 울상을 지었다.
“어제 아버지가 불운한 운명을 맞이하셨어요. 오늘은 제사장님이 암살까지 당할 뻔했고요. 이럴 때일수록 빠르게, 확실하게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데…. 누님처럼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가는 잡을 범인도 못 잡는다고요!”
캬아.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보세요, 천사님. 저 왕자 좀 봐요. 암살자 얘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아버지에 대한 얘기까지 끼워 넣잖아요.’
[…그렇군요. 제법 교활합니다.]
천사가 대답했다. 이제는 천사도 조금 왕자의 성격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월족 전사들은 아직 군주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 군주의 죽음을 이용하려 들고 있군요. 암살자 소동과 군주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전혀 상관없는데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왕자가 진짜 암살자를 잡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말에 동요했던 전사들은, 왕자의 말을 듣자마자 약간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왕자의 근위병들을 중심으로 성난 소리가 터졌다.
“도련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은 앞뒤 가리면서 느긋하게 범인을 재판할 때가 아닙니다. 재판 따위 없이 의심스러운 놈들은 즉결로 처형해야지요!”
“제사장님을 공격한 건 달의 여신을 모욕한 짓이나 다름없죠! 그런 새끼의 머리는 보이자마자 박살을 내야 마땅합니다! 아니면 여신께서 저희에게 실망하여 저주를 내리실 겁니다!”
“….”
반면에 왕녀는 조금도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왕녀의 친위병들이 발끈하여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그녀는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진정해라. 아버님께서 어제 급사를 맞이하여 제군들이 슬프고 당황스러운 것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제군들, 비록 이번에 우리가 적을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하여도, 아직 일족 전체를 먹여 살리기엔 식량이 부족하다. 다음에는 어디를 약탈할지 오늘부터 바로 의논해야만 한다.”
“하.”
왕녀의 냉철한 주장에 왕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약탈, 식량, 의논…. 누님 머리에는 그런 것밖에 들어 있지 않지요? 약탈, 중요하죠. 식량, 정말로 중요하죠. 그렇지만 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적어도 며칠쯤은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지 않나요?”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애도하고 있다.”
왕녀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버님께서는 훌륭한 전사셨다. 젊으실 때나 늙으셨을 때나 언제나 항상 우리를 앞장서서 지휘하셨다. 또한, 아버님께서는 훌륭한 군주셨다. 아버님께서 성스러운 십계명에 맹세하신 이후로, 우리 일족은 단 한 번도 굶주린 겨울을 보내지 않았지. 나는 아버님께서 눈을 감으신 것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어.”
하지만, 하고 왕녀가 말했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내일의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 한다. 아버님께서 우리가 눈물로 하염없이 시간을 낭비하길 바라실까? 그것이 아버님의 소망이겠느냐. 어제의 슬픔은 어제에 묻어두고, 우리는 당장 이번 봄을 무사히 보내도록 다음 약탈지를 생각해야만 해.”
“가끔 보면…. 누님은 그냥 감정이 없는 돌덩어리 같아요.”
왕자가 한탄했다.
“사실 처음부터 암살자를 열심히 찾을 생각도 없었죠?”
“….”
“제사장님이 불운한 일을 겪든 말든, 누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달의 여신께 제물을 바치는 일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저희를 이끌어주신 아버지께 애도하는 일도, 누님에겐 그냥 다 필요 없는 일들이지요?”
왕녀는 동생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입술을 닫았다. 왕녀가 입을 닫자 전사들의 술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사들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는 눈으로 왕녀를 쳐다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왕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생아.”
“예, 누님.”
“너는 나를 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보고 있지 않다.”
왕녀가 작게 도리질을 쳤다.
“그러니 내가 뭐라고 대답해도 똑같다. 어차피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아. 내가 설혹 진심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사람을 속인다 하여도 하늘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왕자가 잠깐 멈칫했지만 즉시 표정을 관리했다. 왕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로 서글프게 눈매를 내렸다.
“제가 누님을 보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면, 누님은 아버지를 보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비록 아버지께서 육신을 떠나셨다지만 지금도 넋이 되어 저희를 지켜보고 계세요. 아버지께서 슬퍼하실 거예요, 누님.”
“….”
그걸로 끝이었다.
왕녀는 더는 왕자를 바라보지 않았고, 왕자도 왕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왕자를 지지하는 전사들과 왕녀를 따르는 전사들이 두 패로 갈려서, 열심히 서로 노려볼 뿐이었다.
‘이거 봐라.’
참고로 나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처럼.
‘역시 왕녀도 제법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