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5화 (25/261)

25. 왕자, 주온 (1)

“으음.”

기도를 마친 내가 눈을 떴다.

“그래서. 내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네.”

“다른 게 아니라 하옵시면?”

“후계자 말일세.”

후계자란 말이 나오자, 순식간에 신관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사장님. 그 말씀은…?”

“음. 하루 빨리 후계자를 정해야 부족이 평안해지지 않겠는고. 주군께서 여신의 이 미천한 종에게 과분한 임무를 내렸으니, 어서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본인도 편해지고 싶구나.”

“도련님과 아가씨, 둘 중에 한 분을 후계자로….”

“그렇다네.”

신관들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조심 물어왔다.

“혹시 마음에 두신 분이 이미 있사온지요, 제사장님?”

있을 턱이 있나. 아직 두 사람이 무슨 성격인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우선 자네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 도련님과 아가씨에 대해서 어찌들 생각하는가?”

“….”

신관들이 서로 쳐다봤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행여나 잘못 대답하면 눈 밖에 날지도 모른다, 하고 걱정하는 것일까.

부하들의 긴장도 풀어줄 겸해서 내가 웃었다.

“허허. 걱정하지 말게. 정말로 단순히 의견을 물어보는 것뿐이 말일세.”

나는 지금 이들의 의견이 필요했다.

왕자와 왕녀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원래 역사에서는 왕자님이 왕위에 올랐긴 하지만.’

우리 왕국의 시조 주온.

본래 역사에 주온 왕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안타깝게도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고. 황당한 전설이 많아.’

왕국이 제대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제3대 국왕부터.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국왕이 알에서 태어났다느니, 달의 여신이 몸소 강림하여 왕자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느니, 머리가 셋 달린 까마귀가 애완동물처럼 졸졸 따라다녔다느니,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전설로 범벅이 되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천사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왕국이 확실히 틀을 잡으려면 멀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봐야죠.’

눈 밖에 날까 봐 계속 걱정하는 신관들을 내가 몇 번 더 찔렀다.

그러자 조심하느라 침묵을 지킨 신관들도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주온 도련님을 말씀드리자면, 아휴. 착하신 분입지요.”

신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좀 너무 착하신 거 아닌가 싶을 때도 가끔 있지.”

“눈물도 많으시고. 정도 많으시고. 사람이 참 좋으셔!”

“그래도 싸울 때는 싸우실 줄도 아니까 괜찮습니다.”

“맞아. 주온 도련님이 전투에서 물러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니까!”

왕자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착하지만 용감한 남자’.

신기하게도 왕자에 관해서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말 단점이라 할 만한 게 아예 없으시다 이 말인고?”

“그럼요!”

신관이 손사래 치며 대답했다.

“굳이 단점을 뽑자면 마음이 지나치게 고우시다는 거죠. 오죽하면 노예들한테도 친절하게 대하시겠습니까.”

“허어.”

나는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윗사람에게 나쁜 소리하기 어려운 게 세상의 이치라곤 해도 이 정도면 대단한 걸 뛰어넘어 수상했다.

‘평가가 너무 높으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운데요?’

[그러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완벽합니다만….]

‘천사님. 설령 인간이 진짜 엄청나게 좋아도 평판이 완벽할 순 없습니다.’

내가 단언했다.

‘누구한테 신중하다는 칭찬을 받으면, 꼭 다른 사람한테는 우유부단하다고 욕을 먹습니다.

다 그래요. 용감하다고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멧돼지처럼 난폭하다며 씹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착한 사람은 무슨 욕을 먹는지 알아요? 쟤 쓸데없이 착한 척한다고 욕먹어요.’

이것도 세상의 이치 중 하나였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통치자란 있을 수 없어요. 처음부터.’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에 천사는 살짝 마뜩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군요. 간신이여. 당신이 매우 음흉하고 악독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도 다 당신처럼 악랄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보는 게 어떤지요?]

‘쯧쯧. 제가 부정적인 게 아니라 천사님이 낙관적인 겁니다요.’

하지만, 하고 천사가 반박했다.

[실제로 왕자에 대한 주변의 평판이 이렇게 좋지 않습니까. 전사들이 일부러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렵니까?]

‘아, 그거요?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내가 씩 웃었다.

‘다 연기하는 거예요, 연기.’

[예?]

‘간단해요. 신중한 걸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신중한 척하고, 용감한 걸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용감한 척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사람마다 전부 다른 태도를 취하면 됩니다.’

그래. 연기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왕자는 벌써 젊은 나이에 능구렁이같이 사람들을 홀리고 있는 것이다.

[…이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수준이 아니군요.]

천사가 기가 막혀 했다.

[거의 편집증에 가깝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간신이여.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에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렇게 삐뚤어졌습니까? 세상이 당신한테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까.]

‘그럼 천사님, 저랑 내기 하실래요?’

나는 무덤덤하게 제안했다.

‘만약 왕자가 진짜 엄청 대단한 위인이라서 사람들한테 다 평가가 좋은 거라면, 천사님이 이겼다고 하죠. 그런데 만일 제 말처럼 왕자가 철면피 깔고 연기하는 거라면 제가 이긴 겁니다.’

[무엇을 걸고 내기하자는 것입니까?]

‘통 크게 가시죠. 천사님이 이기면 부탁하는 거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이기면?]

‘아, 별 건 없고요.’

내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냥 이번 임무가 끝날 때까지 ‘충신’이라고 불러주기만 하시죠.’

천사가 침묵했다. 어이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느낌이었다.

‘왜요? 안 받으시게요? 쫄리셨습니까?’

[아니오. 지나치게 유치해서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에이, 딱 봐도 쫄리셨네. 명색이 신의 사도라는 분께서 쫄리셨어, 쫄렸어. 저는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크게 양보했는데 이것도 쫄려서 못 받으시겠어요?’

[…하.]

천사가 코웃음을 흘렸다. 내 조롱에 깊이 빡친 것이 목소리만으로도 전해졌다.

[좋습니다. 단, 제가 이긴다면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각오하시지요.]

‘그렇게 나오셔야죠.’

[하지만 간신이여.]

천사는 유난히 ‘간신’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의 추측이 옳다면, 상대방은 늙은 전사들까지 능수능란하게 속여 넘길 정도로 연기에 정통한 자입니다. 무슨 수로 왕자의 연기를 간파하여 증명해낼 셈입니까?]

‘흐. 그거야 요긴한 방법이 있죠.’

나는 내 품속을 뒤져서 단검을 꺼내었다.

‘천사님. 눈에는 눈, 이라는 말 아십니까?’

[예.]

‘바로 그거입니다.’

상대방이 연기의 귀재라고?

그럼 연기에는 연기로 맞서면 된다.

◈          ◈          ◈

그날 밤.

부족민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이었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돌연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오오! 아이고, 암습이다! 암습이야!”

곧이어 내 비명을 듣고 전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누워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전사들은 잔뜩 당황하였다.

그중에는 왕자와 왕녀의 얼굴도 있었다.

“제, 제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왕자가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귀하게 자란 티가 나서 얼굴이 단정했다.

말을 더듬는 것이 누가 봐도 보호해주고 싶어질 만했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두고 봐라, 저게 다 내숭이고 연기일걸.

“암살자가 저를 공격했사옵니다!”

내가 손바닥을 보여주며 소리쳤다.

칼날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전사들을 비롯해서 왕자가 깜짝 놀랐다.

“아, 암살자라니요?! 누가 제사장님을 공격했다는 말씀입니까?”

“예에! 아이고오, 잠깐 소변을 보러 나온 사이에 이런 꼴을 당하다니!”

전사들이 동요하였다.

안 그래도 나는 군주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군주가 서거한 지금은 후계자를 지정할 권리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공격을 당했다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그 때 가만히 있던 왕녀가 입을 열었다.

“암살자의 얼굴은 보셨습니까?”

차분한 목소리였다.

혼란 속이라 그런지 그 목소리는 마치 어두운 밤의 달처럼 두드러졌다.

‘음.’

이 왕녀… 좀 제법인 것 같은데?

“얼굴은 못 봤지만 저쪽으로 도망쳤사옵니다!”

내가 고통에 낑낑거리며 군중의 한쪽을 가리켰다.

깜깜했다.

달이 구름에 숨어서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왕녀는 그 방향을 물끄럼 돌아보았지만, 왕자는 허겁지겁 불호령을 내렸다.

“뭐, 뭣들 하느냐! 어서 암살자를 잡아다가 데려오지 않고!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예, 예에!”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삼삼오오 조를 짜서 횃불을 밝힌 채, 암살자를 찾기 위해 군중을 샅샅이 뒤졌다.

왕자 역시 친위병들을 이끌고 뛰어갔다.

한밤중에 때 아닌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한편 왕녀는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가, 조금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암살자를 찾기 위해 떠나갔다.

‘음.’

[[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왕녀의 차분한 대응을 높이 삽니다. ]]

동감이다.

저 왕녀… 제법인 것 같은데?

[저기, 간신이여.]

그 때 천사가 나를 불렀다.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암살자 따윈 없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암살자가 있다는 것은 그냥 거짓말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시간과 장소를 노려서 나 스스로 적당히 상처를 내었을 뿐.

그리고 그 이유를 묻는다고 한다면….

‘제가 하는 짓이야 뭐 매한가지 아닙니까? 낚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게죠.’

[낚다니…? 이번엔 또 뭘 낚으려고?]

나는 상처를 치료받으면서 내심 미소 지었다.

‘이제 사람들이, 특히 왕자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십쇼.’

나는 당당하게 생각했다.

‘왕자가 천사님 말대로 진짜 진정성 있는 사람이라면 밤새도록 암살자를 찾다가 그냥 돌아올 겁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다르다니…?]

‘장담하는데 저 왕자가 그런 내숭꾼이라면 말이죠. 없는 암살자도 만들어서 옵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기회다.

내가 누구를 후계자로 지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왕이 될 수도 있다.

왕자와 공주 입장에서는, 나한테 최대한 호감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하다.

내 말 한마디가 자기들 운명을 결정하는데 당연하지.

만일 날 공격한 암살자를 잡는 데 성공한다면?

‘저한테서 이보다 후하게 점수를 따는 방법이 없죠.’

그러므로 진짜 암살자를 찾지 못하면 가짜 암살자라도 잡아서 올 수밖에 없다.

[…과연.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 잡아올 거라는 말씀입니까.]

‘예에. 만약 제 생각이 옳다면 말이죠.’

[하아, 사람 눈엔 사람만 보이고 짐승 눈엔 짐승만 보인다더니.]

천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주온 왕자한테 질투를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남자라니…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 말도 안 되는 정절 어쩌고 헛소리를 진지하게 입에 담는 당신이 느낄 법한 열등감이겠지요.]

‘천사님. 저를 의심하는 건 참아도 제 정절을 의심하는 건 너무 가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왕자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극까지 벌이는 것입니다. 추합니다.]

‘어허. 천사님이 여유로운 것도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시고, 제 예상대로 일이 흘러가면 꼭 ‘충신’이라고 부르십쇼.’

[당신이야말로 딴말하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밤이 점점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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