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라를 살리는 세 번째 방법(3)
월족의 늙은 군주와 나는 그렇게 눈을 마주쳤다.
피에 젖었으나 여전히 메마른 노인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였다.
“제사장, 내 친우여… 그대가… 선택해주시오….”
마지막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는 목소리였다.
“그대가 내 다음을… 큽, 월족의… 주인을….”
‘과연.’
이번 임무는 그런 종류인가.
“알겠습니다. 주군.”
내가 양손으로 노인의 손을 덮어 감쌌다.
“부디 안심하시길. 제 충심과 우정을 걸고 당신의 명령을 완수하겠사옵니다. 달의 여신께 맹세하나니, 어느 누가 월족을 이끌 지도자인지 사심 없이 판단하겠나이다.”
“아아.”
그걸로 안심했는지 노인이 숨을 탁 놓았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신이시여….”
그리고 노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더 흘러나오지 못했다.
다만 숨소리가 얼마간 흘러나오다가 서서히 잦아들었을 따름이다.
월족을 이끌던 부족장이 죽은 것이었다.
“아아, 주군!”
“어찌하여 이리 빨리 가시옵니까! 주군! 일어서십시오, 주군!”
전사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오열했다.
어떤 이는 땅을 두들겼고, 어떤 이는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단지 말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떨구는 자들도 있었다.
손쉽게 이기고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전투에서 군주를 잃어버렸다.
전사들의 상실감은 아마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겠지.
안타깝게도 월족 사람들은 아직 그들의 군주를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내가 고개를 스윽 돌렸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게 이것만은 아니겠다만.’
내 시선의 끝에는 왕자와 왕녀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렸다.
월족은 군주를 잃어버릴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군주를 모실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저 두 사람 중에 누가 다음 왕위를 이을 건지 저보고 고르라 이거죠?’
[정확합니다. 그리고 누가 되었든 간에 그 사람은 왕국을 건국하게 됩니다.]
천사가 조용히 말했다.
[간신이여. 당신이 왕국의 시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왕자인가, 왕녀인가.
그 선택이 이번에 나한테 주어진 임무였다.
◈ ◈ ◈
늙은 군주의 시체를 수습하고 난 후.
시체에서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내 숙소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제사장님! 앞으로도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수염을 길게 기른 부족민이 나한테 넙죽넙죽 허리를 숙였다.
이래봬도 제법 강대한 씨족을 이끄는 전사였다.
그런 전사조차 노(老) 군주가 전쟁터에서 비명횡사하자, 즉시 일인자인 나를 찾아와서 굽신거렸다.
그런 부족민이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제사장님! 저희 일족도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이건… 별 볼일 없는 성의의 표시입니다만, 아무쪼록!”
“저희가 어느 전투에서나 맨 앞줄에 서서 돌격했다는 사실을 제사장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저희의 충성과 용맹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믿어주시지요!”
“제사장님!”
“제사장이시여!”
“저희 월족의 유일한 희망이여!”
그야말로 열화와 같은 성원.
한 가닥 한다는 부족민들은 모조리 다 막사에 찾아와서 허리를 숙였다.
내가 딱히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군주가 죽어버린 이상 일인자인 내가 최고 권력자.
심지어 다음 군주로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마저 내 손에 달렸다.
눈이 달리고 머리가 달린 인간이라면 얼른 나한테 달려와서 아부하는 것이 순리였다.
내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자기들 모가지부터 날아갈 판이니까!
“어허. 어허.”
그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며 나는 어떻게 처신했느냐고?
“이거 참 곤란하구료. 어허어.”
나긋하게 털부채를 지피면서, 느긋하게 아부꾼들을 바라보았다.
“주군께서는 이 우둔한 여신의 종에게 단지 다음 군주를 선택할 권리를 맡기셨을 뿐. 내가 여러분한테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는지 모르겠소이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부족민들이 웬 말씀이시냐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저희 부족이 여기까지 드높은 명성을 휘날릴 수 있었겠습니까!
주군께서 살아계실 적에도, 여신의 곁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다 제사장님께서 부족의 중심을 지켜주시고 계시기에 저희가 오늘도 배를 굶주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고말고요! 저희가 입고 자고 먹는 모든 것이 제사장님의 은덕!”
“어허.”
나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런 내 발밑에는 전사들이 아부하면서 갖다 바친 ‘마음의 선물’들… 까놓고 말해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호랑이 가죽, 귀한 술까지.
부족의 모든 권력을 쥐게 된 나한테 전사들은 필사적으로 아부한 것이다.
“여러분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본인이 참 선물을 거절할 수만도 없고….”
“그럼요! 선물을 거절하시겠다면 저희는 오늘 아예 돌아가지 않으렵니다!”
“이거야 원. 여신의 미천한 종을 곤란하게 하시는구려….”
참고로 나는 이런 일을 제일 잘한다.
뇌물을 주고 뇌물을 받는 일 말이다.
왜?
나라 말아먹은 간신 처음 보는가?
죽기 직전까지 내가 평생 해온 짓이 이거였다.
뇌물 받아먹는 데에 있어서 나만큼 뛰어난 귀족은 얼마 없을걸.
‘보십시오. 천사님.’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뇌물을 받을 때는 말이죠. 얼씨구 좋구나 덥썩 받아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참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싸 보이거든요. 몇 번 튕겨주어야 또 주는 사람도 노력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딱 지금 저처럼….’
[지금 그게 자랑입니까?!]
참고로 천사는 아까부터 화를 냈다.
[어서 왕자와 왕녀의 자질을 시험해서 다음 군주를 선발해도 모자를 판에, 왜 당신이 뇌물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허어. 이분이 정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시네.’
내가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지금 갑자기 군주가 뒈져버려서 전사들이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겠어요? 아이고, 우리 부족이 망해버리는 건가, 당장 다음 달은 어떻게 끼니를 때우려나. 막 불안해져 있지 않겠어요?’
천사와 대화하는 이 와중에도, 나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전사들의 뇌물을 받아주었다.
전사들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끊임없이 뇌물의 세례를 내게 안겨주었다.
‘이럴 때 바로 뇌물이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는 겁니다.’
[뇌물이 마음의 위로라니….]
천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난 진심이었다.
‘국난의 시기잖아요.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고요. 이럴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 그때 진짜 혼란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높으신 분한테 뇌물이라도 드리면 최소한 마음은 편해지거든요.’
[어째서….]
‘뇌물도 일종의 계약이니까요.’
내가 담담히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뇌물을 건네는 거요. 이것도 다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이고 약속이에요. 저한테 뇌물을 주고 난 다음에 부족민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그건….]
‘이만큼이나 잘 대접해드렸으니 적어도 다음 달에 우리가 끼니를 굶을 일은 없겠지, 하고 마음을 놓게 됩니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나마 안심하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지금 일인자가 되어버린 저의 역할은 딴 게 아니라 뇌물을 받는 겁니다. 잘 받아서 부족민들을 안심시켜 줘야죠. 아시겠어요?’
천사가 침묵했다.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일리는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뭘요?’
[그냥 뇌물을 받고 싶어서 받는 거 아닙니까, 당신?]
음.
나는 내 막사에 찾아온 부족민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부족민들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월족의 빛이시여!”
“이제 저희가 마음을 기대고 몸을 맡길 분은 제사장님밖에 없습니다!”
“부디 저희가 성의를 담아 준비한 선물을 외면하지 말아주소서!”
“….”
나는 살짝 고민하다가 이내 나의 진심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예. 솔직히 기분 째지네요. 아, 드디어 내가 본래의 나로 돌아왔다는 느낌?’
[쓰레기….]
말이 너무 심한 천사였다.
‘천사님.’
[말씀하십시오. 쓰레기.]
‘원래 사람은 말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뇌물을 받는 걸 잘하고 뇌물을 받을 때 즐겁습니다. 이것은 즉, 제가 뇌물을 받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걸 뜻하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간신은 저의 천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쓰레기보다 더 심한 욕을 배워두었어야 하거늘….]
천사가 한탄했다.
이렇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부족민들의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뇌물을 꼬박꼬박 받아주었다는 뜻이다.
“음, 이 담비 가죽이 몹시 좋군.”
“호오, 이 창도 몹시 쓸 만하고….”
“아니 이건 잘 구워진 도자기가 아닌가. 뭘 이런 걸 다….”
잘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품목만은 거절했다.
“아, 그건 필요 없소. 내 천막에 한 걸음도 들이지 마시오.”
아리따운 소녀를 끌고 왔던 씨족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찌하여…?”
음.
천사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이 대쪽 같은 정절을 이런 자가 이해할 수는 없겠지….
[대쪽이 대단히 쪽팔린다의 줄임말입니까?]
천사의 헛소리는 무시하고 나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 몸은 성직자라오. 미색에 홀려서야 아니 되는 일.”
씨족장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음, 제사장님. 혹시… 이 여아의 미색이 부족한 것이라면, 좀 더 고운 여인도 있기는 합니다만은….”
“어허. 괜찮다고 하지 않소이까.”
“그치만… 어….”
씨족장이 몇 차례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환한 표정을 짓고는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닌가.
“아하! 알겠나이다. 조금 더 어린 쪽을 바라시는 것이라면….”
[[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상대방의 천박함에 말을 잃습니다. ]]
나도 말을 잃을 뻔했다.
나는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는 불쾌함을 담아 수염을 비틀었다.
“아무튼 여인은 됐소. 더구나 군주께서 떠나신지 얼마나 되었소이까? 그런 상황에서… 에잉. 가져다주려면 양이나 한 마리 가져다주시던가.”
“아하! 확실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씨족장이 물러갔다.
[[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찜찜함을 느낍니다. ]]
그러게, 나도 뭔가 좀 찜찜하긴 한데….
[간신이여. 다음 뇌물이 온 모양입니다만.]
“아, 어서 들어오시오! 허허, 뭘 또 이런 걸 다!”
일단 받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아무튼 그렇게 여인만 빼고 뇌물이란 뇌물은 다 받았다.
그 뇌물 행렬은 저녁이 되어서도 끊이지 않았는데, 이쯤이면 충분하다 싶어서 대충 해가 질 무렵부터는 방문을 내일로 미루었다.
[이제야 그 게걸스러운 배때기가 좀 채워졌습니까, 간신이여?]
‘음. 아뇨. 부족민들을 달래주는 일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서요.’
[달래주는 일…?]
‘그렇다니까요. 아, 천사님도 진짜. 제가 뭐 이 뇌물들을 저승의 왕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못 가져갑니까?’
[꿈 깨십시오.]
쪼끔 슬프다.
어쨌든 그렇게 부족민들 달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다음엔 내 부하들을 소집했다.
나는 이 부족의 제사장이었으며, 군주가 살아 있던 시절에도 일인자였다.
당연히 나를 우두머리로 받들어 모시는 부하들이 많았다.
“부르셨습니까, 제사장님.”
“그래. 어서들 오게나.”
나와 비슷하게 신관복을 차려입은 부하들이 대여섯 명 막사로 들어왔다.
그들은 막사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더미를 보고 멈칫했다.
개중엔 대놓고 탄성을 흘리는 신관마저 있었다.
“과연 제사장님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제사장님께 의지하면 오늘 하루에만…. 존경합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어허. 이게 나의 은덕이겠나? 전쟁터에서 쓰러지신 군주의 은덕이지.”
내가 근엄하게 말했다.
“눈을 감게. 우리 모두 군주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시간을 가지세.”
“아, 제 생각이 짧았군요…. 예, 알겠습니다.”
막사에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편안히 잠드시길, 나의 주군이여. 비록 저는 당신과 지낸 시간이 한 시간도 채 안 되었지만, 당신 덕분에 모처럼 간신의 기분을 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록 야만인으로 태어났으나 부디 나중엔 시조의 아비로 받들어지기를.
안 받들어지면 뭐 그건 당신이 잘못 산 탓이니 스스로를 원망하소서. 대체로 공덕은 제게 잘못은 당신에게 있나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기도는 생전에도 생후에도 처음 듣는군요….]
[[ 최초의 성녀 아리야는 기도의 창의성이 갖는 예술성을 고려할 가치가 있지 않냐고 반론합니다. ]]
[당신은 좀 변호할 걸 변호하십시오.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도 씌여서는….]
천사와 성녀와 함께하는 실로 성스러운 기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