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1화 (21/261)

21. 첫 번째 입주자 : 최초의 성녀

“그렇소.”

나는 선뜻 긍정했다.

“내가 내 손으로 만들었소. 지금부터 어쩔 셈이오?”

“그건….”

“사람들한테 석판이 가짜라고 밝힐 것이오? 아니, 그대는 그러지 않겠지.”

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만일 아리야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속셈이었다면 진즉에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용인했다.

얼버무렸다.

즉.

“석판이 설령 가짜라 할지라도 매우 효과적인 통치 수단임을,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라오.”

그녀도 이 거짓말에 동참한 것이다.

“내 말이 틀렸소?”

아리야가 침묵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그것과 동시에 이번 임무의 제한시간도 빠르게 줄어갔다.

[ 0시간 1분 46초 ]

임무 창에 표시된 시간이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리야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약속해주세요.”

“음?”

“이 모든 것이 전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해주세요. 당신이 저한테,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그건 전부 우리를 위해서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지금 약속해주세요.”

아리야의 눈은 몹시 진지했다.

한 부족을 다스리는 군주의 눈인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연인의 눈이었다.

나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오. 맹세하겠소.”

어차피 모든 임무는 결국 왕국을 살리기 위해서 있다.

왕국이 살아나야 내가 살아나고 내가 살아남아야 왕국도 살아난다.

천사는 자신과 내가 운명공동체라 말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왕국과 나야말로 진정한 운명공동체인 셈이다.

“…네, 좋아요. 그럼 됐어요.”

아리야가 한숨을 쉬더니 훌쩍 일어섰다.

그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갑자기 어딜 가나 의아스러웠지만 내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하앗!”

아리야가 내 손도끼를 들어 올려, 깊고 어두운 숲을 향해서 전력으로 던졌다.

퍼서석!

손도끼가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흔들며 날아갔다.

이윽고 손도끼는 숲의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증거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 0시간 0분 10초 ]

이제 임무는 끝나기 일보 직전.

증거품까지 사라지고 말았으니 율법의 거짓말이 밝혀질 날은 영원히 없어졌다.

월족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 내부의 분열도 이겨냈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부족으로서, 미래에 세상을 제패할 나라의 주인들로서, 그들은 조금씩 비상할 것이다.

“모서아.”

아리야가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되물었다.

“음. 무엇이오?”

아리야가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마침 임무 창에 표시된 제한시간이 종막을 맞이했다.

[ 0시간 0분 0초 ]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달빛이 사라지고 비구름이 없어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흐르고 또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변해갔다.

그리고.

“아아….”

내 눈앞에는 아리야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사 속의 아리야와 ‘다른’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끌었던 월족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내부의 분열을 견디지 못했다.

한 부족을 다스리는 군주가 될 수 없었고, 한 남자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연인으로 남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현명하게 사람들을 다독였으면…. 조금만 더 자존심을 굽혔으면, 이럴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길이 틀림없이 있었는데. 아아아, 나는, 저는, 어째서 무모하게….”

회한, 한탄, 그리고 탄식.

나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조용히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그녀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서아 님. 위대한 예언자이시여.”

아리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임무 속의 아리야와 완전히 달랐다.

옷차림이 달랐으며 분위기가 달랐다.

무엇보다 과거의 아리야는 밝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지금 내 앞의 아리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같은 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바로 두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리야는 가지런히 양손을 모으고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때, 허공에 문자들이 새겨졌다.

[ 의뢰인이 임무의 성공을 인정합니다. 미션 클리어! ]

[ 의뢰인이 당신의 결말을 인정합니다. 역사가 변이됩니다. ]

[ 축하드립니다! ‘최초의 성녀 아리야’가 당신의 왕국에 입주합니다. ]

[ 입주민을 어느 시설에 배치할지 결정해주세요. ]

여전히 무수한 망령들로 뒤덮인 왕도의 폐허.

그 한복판에서 아리야가 다시 한 번 꾸벅, 인사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위대한 예언자이시여.”

나의 저승에 천사 말고 또 다른 동료가 생겨난 순간이었다.

◈          ◈          ◈

“으음.”

좀 당황스러웠다. 아리야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

‘이런 건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귀족으로 살 때 나한테 굽실거리던 인간은 많고 많았다.

오히려 굽실거리지 않는 인간이 적었지.

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사람, 심지어 ‘위대한 예언자’라며 받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천사가 옆에서 툭 던지듯 말했다.

“얼마나 인생을 헛살았으면 그랬습니까.”

“천사님, 남의 속마음을 멋대로 읽는 건 그만해주시죠.”

“당신이 깨끗한 생각만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이분이 간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

다행히 억지로 대화 소재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 일시 중단된 보상이 재개됩니다. ]

“오. 드디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추가 임무 때문에 멈추었던 보상이 마침내 제공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 임무 보상이 주어집니다. ]

[ 마을(Lv.1)이 건축됩니다! ]

[ 엑스트라 미션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신전(Lv.1)이 건축됩니다! ]

그러자 폐허에서 정처 없이 떠돌던 유령들이 움직였다.

- 우어어어.

유령들은 어디선가 나무며 돌이며 건축 자재를 갖고 왔다.

뚝딱뚝딱.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순식간에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건물들을 둘러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직은 움막집 수준이군요.”

먼저 마을.

가리비수의 석상을 중심으로 해서 천막들이 세워졌다.

솔직히 후줄근했다.

마을보다는 난민촌이라고 불러줘야 적당하지 않으려나?

“시설 창.”

내 말에 반응하여 눈앞에 설명문이 떴다.

+

[ 시설물: 마을 ]

레벨: 1

문명 수준: 깡촌

담당자: 없음

효과: 통치술(Lv.1), 농사(Lv.1)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내 집 마련의 꿈,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죠?’ 돌아갈 장소가 있는 인생은 얼마나 행복한가. 비록 그것이 천막만 있는 집구석이라 할지라도. ‘질러라! 땅값이 더 오르기 전에 지르세요.’

+

여전히 의미 불명인 설명문은 무시하고.

나는 건물의 효과를 본 뒤 천사에게 말했다.

“통치술과 농사라. 통치술은 뭐 그렇다 쳐도 농사는 어디에 써먹으란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 따지면 도끼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도끼술로 월족 사람들을 선동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전부 당신의 창의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뭐, 언젠가 써먹을 때가 오겠지.’

내가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건물은 신전.

이건 의외로 호화로웠다.

“허. 신전이 차라리 궁전보다 나은데요?”

돌기둥이라고 해야 하나?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석판들이 빙그르르 원을 그리면서 차례차례 박혀 있었다.

투박하긴 해도 웅장한 멋이 풍겼다.

“이것은….”

천사가 가까이서 돌기둥을 매만졌다. 그녀는 살짝 감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만든 십계명을 그대로 옮겨놓은 기둥이군요.”

“예?”

“자세히 보십시오, 간신이여. 돌기둥이 모두 10개입니다. 기둥마다 당신의 율법이 하나씩 적혀 있습니다.”

“어라.”

정말이다.

돌기둥 표면에 뭔가가 적혔는데 그게 다 내가 만든 율법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세워진 돌기둥엔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신전 그 자체가 십계명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와.”

나는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내 손으로 만든 율법이 이렇게 사람들한테 숭배받게 된다니.

“…이건 조금 감동인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끼를 부려서 법문을 쓸 걸 그랬나?

그런 아쉬움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법문이란 자고로 쉽고 명쾌해야 제 맛이다. 쓸데없이 멋을 부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괜한 생각 말고 건물의 효과나 구경하자.

“시설 창.”

허공에 글자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

[시설물: 신전(달의 여신) ]

레벨: 2

문명 수준: 산동네

담당자: 없음

효과: 종교 생성, 연설(Lv.3) 부여.

플레이버 텍스트:

‘우리의 유일한 주인, 달의 여신님을 경배하라!’ 달의 여신은 월족만이 가진 고유 신앙입니다. 월족은 달의 여신이 자신들을 대홍수에서 구해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정벌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 굳게 믿습니다. ‘달의 여신을 위하여!’

+

“캬아아.”

나는 설명문을 읽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였다.

바로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역시 종교빨이 있어야 사람들이 투지에 불타오르죠.”

신의 이름을 외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돌격하는 전사들!

지금 월족에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전사였다.

일단 군사력이 약간이라도 뒷받침해주어야 세력을 넓히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이번 임무처럼 다른 부족한테 맞고 다니면 안 되지. 암.’

내가 만족스러워하고 있자니 천사가 말을 걸었다.

“간신이여. 자화자찬하는 것도 좋지만 어서 아리야를 신전의 제사장에 임명하십시오.”

“네? 아아. 아까 입주민을 배치하라는 문구가 있었죠.”

생각해보면 궁전이나 마을이나 전부 담당자가 ‘없음’이라고 표시됐다.

담당자가 붙으면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천사가 채근하는 걸 보니 뭔가 더 좋은 효과가 추가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입주민은 어떻게 배치합니까?”

“간단합니다. 아리야를 신전의 담당자로 배치한다고 소리 내어 말하기만 하면 끝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리야를 신전의 담당자로 배치한다.”

곧바로 알림말이 떠올랐다.

[ ‘최초의 성녀 아리야’를 신전의 담당자로 배치합니다. ]

[ 시설물에 추가 효과가 생성됩니다! ]

그러자 예상대로 시설물의 설명문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연설만 있었던 효과에 뭔가가 더 추가된 것이었다.

+

[ 시설물: 신전(달의 여신) ]

레벨: 2

문명 수준: 산동네

담당자: ‘최초의 성녀 아리야’

효과: 종교 생성. 연설(Lv.3), 예언(Lv.3) 부여(※)

※ 담당자 보너스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언이라니. 이게 정확히 뭐죠?”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효과였다.

‘도끼술’이야 도끼를 잘 던지게 되고, ‘연설’은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잘하게 되는 효과겠지.

그렇지만 예언은 무엇인가?

‘혹시 내가 진짜 성자처럼 예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읽은 천사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거짓말을 해도 잘 들키지 않게 되는 기술입니다.”

“예?”

거짓말을 들키지 않게 된다고?

“물론 단순한 거짓말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만 발동될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한 번 아리야에게 시험 삼아 걸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흐음.”

나는 천사의 추천에 따라 아리야한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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