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9화 (19/261)

19. 열 개의 계명 (3)

내가 근엄한 얼굴로 음, 하고 만족하였다.

“좋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이길 게 뻔한 내기니까!

‘천사님. 임무 시작하고 대충 다섯 시간 뒤에 비가 멈춘다고 그랬죠?’

내 질문에 천사가 황당해했다.

[당신…. 처음부터 이걸 노렸습니까? 그래서 언제 비가 멈추느냐고, 임무가 시작하자마자 물었던 것입니까?]

당연하지.

비를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비를 멈추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살아생전 왕국에서도 물을 다스리는 것은 국왕의 덕목으로 여겨졌다.

하물며 야만족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나는 간단히 시간을 확인했다.

‘임무 창.’

+

<엑스트라 미션>

[ 성녀 탄생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6시간

(잔여시간: 2시간 1분 44초)

+

이번 임무를 시작한 지 대략 4시간이 흘렀다.

즉!

‘뭐, 앞으로 1시간 정도만 더 버티면 되겠네요.’

이건 처음부터 내가 이기고 들어간 임무라 이 말씀이었다.

천사는 내 말을 듣고 신음을 흘리었다.

[당신만큼 사악한 인간을 저는 달리 본 적이 없습니다.]

‘에이. 그냥 잔머리가 좀 잘 돌아간다고 칭찬해주십쇼.’

이 정도면 약과에 불과했다.

나보다 훨씬 독하게 왕국을 털어먹은 귀족이 얼마나 많았는데.

내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월족 남자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그, 그런데 예언자님. 혹시 제가 틀리면 어떤 식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까?”

“흐음.”

생각 같아서는 모가지를 날려버리고 싶지만 말이야.

종교 지도자인 내가 백성의 목을 치는 것은 여러 가지로 그림이 나쁘다.

훗날 왕국이 세워지게 되면, 자칫 신전이 지나치게 권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괜히 성직자들한테 권력을 과하게 줄 필요는 없지.’

권력의 핵심은 나 같은 귀족들이 누려야 하는 법.

‘적당히 자비를 베풀어 볼까.’

나는 품속에서 스윽 손도끼를 꺼내었다.

흉흉한 물건이 나타나자 월족 남자는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도끼날에 머리가 날아갈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님. 그, 그건.”

내가 턱을 끄덕였다.

“손모가지만 자르겠소.”

“….”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보다는 관대하지 않소?”

월족 남자는 울상을 지었다.

◈          ◈          ◈

“우오오! 손목을 걸었다!”

“전사답구나! 용맹한 우리 부족답다!”

다른 부족민들은 구경꾼이 되어 환호성을 질렀다.

종일 비만 내려서 싫증이 난 참에 내기판이 벌어지자 흥분한 것일까.

이런 점에서도 쟤들은 영락없이 야만족이 맞았다.

“자, 잠깐만요. 모서아.”

그런 야만족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아리야가 허둥지둥 끼어들었다.

“왜 저를 놔두고 제멋대로 약속을 주고받는 건가요? 제가 기도를 올리는데 비가 안 내리면 큰일이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신력(神力)이 없다구요!”

“나를 믿으시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리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머리를 기울여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가면 석판이 하나 있소.”

“네?”

“여신께서 직접 내리신 석판이라오. 귀히 여기고 가져오시구려.”

아리야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근엄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뭐 하시오? 어서 기도를 올리러 다녀오지 않고.”

“…기도를 올리려면 하다못해 숫양이라도 한 마리 잡아서 바쳐야지 않을까요?”

“어허.”

안 그래도 식량이 부족한데 귀한 가축을 희생할 순 없지.

“우리가 새로이 모시게 된 달의 여신께서는 잔인하시나 또한 관대하신 분이오. 굳이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다 알아서 소원을 들어줄 것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

“흑. 너무해요. 제물도 없이 기도를 바치라니….”

결국 아리야는 힘없이 돌아섰다.

언덕을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처량하였다.

꼭 노예상인한테 끌려가는 고아 소녀 같다고 할까.

여태까지 아리야를 탓한 부족민들도 왠지 모르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소곤소곤 떠들었다.

“세상에. 양 한 마리 잡지 않고 기도하라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닌가.”

“어떤 신이 공짜로 소원을 들어줘?”

“예언자님이 심했네, 심했어. 이래서야 그칠 비도 안 그칠 거야.”

아마 야만족들에겐 ‘제물 없는 기도’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듯했다.

하긴 왕국민들도 제사상은 되도록 정성스럽게 차리는 것을 덕목으로 여겼다.

당장 나도 생전에는 달의 여신께 제물을 듬뿍 바치곤 했다.

뭐, 이번만은 제물 따위를 안 올려도 상관없지만.

“흐음.”

나는 여유만만하게 근처의 바위에 엉덩이를 깔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다 맞아주었다.

반면에 월족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아리야가 올라간 언덕 방향으로 힐끔거렸다.

쏴아아아….

비가 흘렀다.

시간도 흘렀다.

언덕에 올라간 아리야의 뒷모습은 멀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족민들의 소곤거림은 의심으로 물들었다.

“역시 아무런 일도 없는 거 아니야?”

“처음부터 좀 이상하더라니까요. 불의 신이면 불을 다스리고, 비의 신이면 비를 다스릴 건데, 어떻게 하나의 신이 세상만사를 다 관장하겠어요. 말이 안 돼요.”

“이대로 영원히 비만 내리면 정말 세상이 끝날 텐데….”

불안, 초조, 의심.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실어서 부족민들은 나를 훔쳐봤다.

이 세상에서 제일 서글픈 직업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실패한 예언자’다.

예언에 실패한 사제는 추종자들을 전부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한테 조롱당한다.

그래서 좌절해버린 예언자가 역사엔 수두룩했다.

만일 내 예언이 틀린다면 나 또한 불쌍한 신세로 떨어지겠지.

‘임무 창.’

물론 나는 그러지 않을 자신이 넘쳤다.

왜냐하면 천사가 예고한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졌으니까.

나는 눈앞에 떠오른 임무 창의 제한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 1시간 5분 19초 ]

이제 약 5분이 남았다.

‘천사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쭙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설마 천사님의 예고가 틀릴 가능성은 없겠지요?’

[없습니다.]

천사가 단언하였다.

[걱정하지 마시길. 당신의 성공이 제 성공이며, 당신의 실패는 곧 제 실패입니다. 간신이여. 당신이 임무를 해결하는 방식이 제 방식과 일치하진 않더라도 저와 당신은 운명공동체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을 믿었다.

당연하지만 부족민들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거 봐. 비가 안 그치잖아.”

“내가 뭐랬어요. 기도를 올려도 제물은 바쳐야 한대두.”

“신께서 관심을 거두신 거야. 예언자한테 실망하신 거지.”

왁자지껄.

아리야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방금까지 작게 소곤거리던 부족민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대놓고 나를 비난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비난의 소리가 조금씩 들끓었으나 나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하하. 예언자님, 이거 제가 이겨버린 거 같습니다?”

반면 나와 손모가지를 걸고 내기를 벌인 남자도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졌다.

내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풀이 죽었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희희낙락댔다.

“예언자님이 손목을 잃게 되면 참 슬프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진 마시지요! 신들이란 워낙 변덕스러운 분들 아닙니까. 어제 사랑과 관심을 주었다가 오늘 총애를 거두기 일쑤지요.”

“음.”

“어쩌면 예언자님도 속아버린 걸지 모릅니다. 아하하. 이래서 함부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입을 놀리면….”

“시끄럽구려.”

내가 툭 말했다.

“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소. 손목이나 깨끗하게 씻어두시오.”

“…안 되겠군요. 비가 안 내려도 제가 예언자님의 손목을 끊는 건 참아주려고 했습니다만.”

월족 남자는 얼굴이 싸늘해졌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족장이 돌아오면 바로 손목을 잘라드리겠습니다. 각오하십시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단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월족 남자의 신경을 더 건드린 모양이었다.

남자는 ‘두고 보십쇼!’ 하고 씩씩거렸다.

가소로웠다.

두고 보라고 말하는 인간치고 정말 두고 볼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

딱 그쯤이었다.

“어.”

부족민 중 누군가가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어, 어어?”

그 부족민은 제대로 된 말을 발음하지도 못했다.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애처럼 그냥 어, 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걸로도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도 서쪽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하늘이….”

“저거 봐, 구름들이….”

하늘이 개고 있었다.

지난 20일 동안 우중충했던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다만 구름이 걷힌 하늘의 틈새로 햇빛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서쪽 하늘의 구석에서만 빛이 쏟아졌다.

그러나 점차 구름에 틈새들이 더욱 벌어졌다.

북쪽 하늘에도, 남쪽 하늘에도, 마침내 동쪽 하늘에도 틈새가 벌어졌다.

노을이 빨갰다.

저녁이었다.

사람은 틈이 생기면 피가 흐르는데 하늘에 상처가 나니 붉은빛이 흘렀다.

[비록 미신이기는 해도.]

천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태양을 최고신으로 모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것을 보고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랬다.

“아아. 아아아….”

부족민들이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기적이다.”

“신께서 또 한 번 기적을 보여주신 거야.”

사람들은 감격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마치 햇빛을 받아 마시려는 듯 양손을 벌렸다.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20일 만에 비춘 햇살에 인간들은 눈물을 흘렸다.

“….”

터벅.

아리야가 언덕에서 내려온 것은 그때였다.

부족민들이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부터 내려오는 아리야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녀는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붉은 태양이 아리야를 비추었다.

그녀의 미끄러운 살결은 노을의 빛으로 환해졌다.

“오오, 아리야 님….”

“우리의 족장이시여.”

아리야가 입은 옷은 허름했다. 허름한 만큼 빈 구멍이 많았다.

평소라면 보기 싫었겠지만, 지금은 그래서 더 성스러웠다.

옷 구멍으로 드러난 살결마다 노을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 것이었다.

부족민들이 보기에 그녀가 하산하는 모습은 마치 여신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처럼 비추지 않았을까?

“자아.”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어 아리야를 가리켰다.

“여신께서 우리의 군주가 올린 기도를 받아주었소! 우리의 군주는 아리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인이고, 이 여인은 가장 위대한 신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라오.”

“그렇다!”

부족민들은 감정에 벅차올라 소리를 질렀다.

어떤 부족민은 아예 아리야가 있는 방향으로 연거푸 이마를 찍었다.

나는 분위기에 힘입어 목소리를 더욱더 키웠다.

“아리야가 우리를 다스리는 이상, 그리고 아리야의 자식이 우리의 후손들을 다스리는 이상, 우리는 신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 세상을 지배할 것이오! 우리야말로 신께 약속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이오!”

“그렇다!”

기나긴 장마가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

큰 재앙을 피하여 살아남았다는 도취감.

그것들에 취하여 야만인들은 야만스럽게 환호했다.

“아리야여! 우리의 위대한 통치자여.”

어느덧 가까워진 아리야에게 내가 말했다.

“그대, 언덕에 올라갈 때는 빈손이더니 지금 내려올 때는 무언가를 껴안고 있구려.”

그렇다.

아리야는 품에 석판을 안고 있었다.

미리 내가 언덕에 숨겨놓은 석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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