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8화 (18/261)

18. 열 개의 계명 (2)

[신성 모독입니다!]

천사가 난리를 쳤다.

아마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 뒤로 이번만큼 격렬히 반대한 적이 없었다.

만약 천사가 임무 도중에 목소리만이 아니라 팔다리까지 직접 쓸 수 있었다면, 지금쯤 내 목을 잡고 흔들지 않았을까?

[맙소사!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찌 이럴 수가.]

“이럴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셨겠지만 사실 이럴 수도 있습니다.”

[당장 그 석판을 깨부수십시오! 그만두란 말입니다!]

내가 코웃음을 흘렸다.

“싫은데요?”

[아아아. 아아, 신이시여. 부디 천벌을 내리소서!]

천사는 슬슬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았다.

음.

아무렴 내가 천사와 완전히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마음이 맞으나 안 맞으나 천사는 나의 도우미였다.

적어도 설득하는 척이라도 하는 편이 좋겠지.

“천사님, 그런데 이거 진지한 이야기예요.”

나는 목소리를 무겁게 깔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천사님이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요. 제한시간이 여섯 시간밖에 안 되는 임무라고. 야리소연 때처럼 그냥 마을에 불만 지르고 끝나는 임무라면 쉽겠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잖아요?”

내가 허공에 임무 창을 띄웠다.

+

<엑스트라 미션>

[ 성녀 탄생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6시간

(잔여시간: 2시간 54분 20초)

클리어 조건: 당신은 월족에게 ‘신화’를 선물하였다. 이제 월족은 단순한 부족민이 아니라 ‘하늘에 선택받은 민족’으로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월족에게 더 자세한 정체성을 부여하라!

+

“보이시죠?”

나는 대놓고 천사한테 말했다.

“부족 하나에 정체성을 부여하라잖아요. 뭘 부수고 불태우고 그런 임무가 아니에요. 되게 정신적인 얘기라고요. 이걸 평범한 방법으로 어떻게 달성합니까요?”

[….]

“아, 엄청 간단한 방법이 있긴 있죠.”

내가 손도끼를 휙휙 돌렸다.

“반항하는 사람들은 제가 다 도끼로 머리를 찍어버리는 겁니다. 무조건. 그게 제일 간단하고 간편하죠. 그럼 ‘윗사람한테 까불면 죽는다.’라는 정체성을 월족이 얻겠네요.”

[그편이 차라리 더 당신의 취향에 가깝지 않습니까?]

“허어, 천사님 사람을 진짜 이상하게 보시네.”

엇차.

나는 석판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얇은 석판은 별로 무겁지 않았다.

“제가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말입니다. 아랫사람을 조질 때도 무조건 아무 이유 없이 조지면 큰일 나요. 그럴싸한 이유가 있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붙이든가. 그래야 뒤탈 없이 조용히 사람을 조지죠.”

내가 미쳤다고 무조건 도끼로 백성을 찍겠는가.

이건 귀족으로서 장수하는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러니까 먼저 율법을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율법을. ‘내가 너를 조지는 이유는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어겨서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잖아요. 얼마나 깔끔해요?”

[…그래도 저는 이 방법에 반대합니다.]

천사가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지언정, 미신을 앞세워 진정한 신을 욕보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근처의 언덕에 올랐다.

석판을 언덕 꼭대기에다 숨겨놓기 위해서였다.

“뭐. 그게 천사님이랑 제 차이점이네요. 전 필요하다면 일단 뭐든지 이용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종교든 뭐든.”

[하지만….]

거 참.

내가 답답한 마음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버럭 소리쳤다.

“신이시여! 만일 제 짓을 용서하실 수 없다면 바로 벼락을 내리쳐서 죽이십쇼!”

쏴아아아.

당연하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빗물이 떨어져서 괜히 내 얼굴을 적실 뿐.

나는 양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였다.

“봤습니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죠?”

[….]

“천사님 입장에서 불만 있다는 건 알겠는데요. 제가 정도(正道)를 지키면서도 목적을 이룰 수 있었으면 충신을 했지, 간신을 했겠습니까? 제가 괜히 간신이에요? 그냥 빨리 임무나 해결합시다.”

이 말엔 천사도 반박할 말이 안 떠올랐는지 입을 다물었다.

진즉에 그러실 것이지.

“정말 간신으로 살기도 어려운 세상….”

그때였다.

콰르르르륵!!

내가 펄쩍 뛰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안간 벼락이 내리친 것이었다.

나는 석판을 숨기다 말고 바로 땅바닥에 엎드려서 손을 싹싹 빌었다.

“아이고오! 신님, 제가 신님을 모욕하려고 그런 게 아니옵고 그저 할 수 있는 짓거리가 이런 것밖에 없어서 그랬습니다요! 아이고! 용서해주십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쇼!”

잠시 후 천둥이 잠잠해졌다.

언제 우뢰가 떨어졌냐는 듯 세상엔 조용히 비만 내렸다.

나는 머리를 빼꼼 내밀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봐, 봤습니까? 예? 저만 딱 피해서 천둥이 치는 거. 이게 다 신께서 저를 용서해주시고 굽어 살피신다는 증거입니다.”

천사가 침묵했다.

이번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차마 반박하기도 민망해서 침묵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한참 지나서 말문을 열었다.

[간신이여…. 그런 식으로 살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시끄럽다, 이 악마야.

◈          ◈          ◈

나는 석판을 숨긴 뒤 언덕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임무 창의 제한시간을 슬쩍 살피었다.

[ 2시간 10분 45초 ]

언덕을 오르고 내리느라 조금 허비한 걸까.

남은 시간이 아주 여유롭진 않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비가 그친다.’

이번 임무는 시간 싸움이다. 서두르자.

나는 재빨리 월족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몰려 있었다.

20일 내내 쏟아진 빗줄기에 신물이 났는지 대부분 불만에 찬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 비는 언제 그치는 건가.”

“풀뿌리를 캐서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못 참겠다!”

“아리야 족장! 그대가 신께 인정받은 통치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하늘이 인정하였다면 당장 기도를 올려서 비를 멈추십시오!”

우우우, 하고 몇몇 부족민이 야유를 보내었다.

나는 사람들이 불평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어이없었다.

‘와. 이것들은 대홍수로 소모라가 휩쓸린 걸 벌써 잊었나?’

내가 제때 암약하지 않았으면 이 중에서 못해도 절반은 수몰당했을 거다. 그런데 조금 배고프고 힘들다고 해서 족장을 탓해?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

‘누가 야만족들 아니랄까 봐 기억력도 참 딱하네요.’

[아니오. 사람이란 본래 힘들면 지도자를 탓하게 되어 있습니다. 야만족이든 야만족이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천사가 말했다.

[어제 먹은 한 끼의 식사가 오늘 굶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하며, 어제 따뜻하게 든 잠자리가 오늘 추운 날씨를 데워주지 못합니다. 국왕은 언제나 매일매일 준비하고 대비해야만 비로소 인정받습니다.]

‘쯧쯧.’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이래서 제가 적당히 중간 관리직 같은 귀족에 머무르는 거예요. 누릴 건 다 누리고. 책임은 별로 안 지고. 얼마나 좋습니까요?’

[간신이여. 당신의 인성이 쓰레기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더 강조하지 말아주십시오.]

‘진심인데….’

쩝.

한편, 불평을 토해내는 부족민들을 아리야가 간신히 말리고 있었다.

가리비수와 야리소연의 후예이자 어린 시절부터 월족을 대표해온 아리야에겐 그래도 권위란 게 있었다.

“참으세요! 비가 언제 그치느냐는 하늘에서 결정할 일이지, 저희 같은 인간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기도를 올릴 수는 있지 않습니까!”

“하아. 신께선 저희를 어여삐 여기어 홍수에서 구해주셨잖아요.

그 걸로도 저희는 일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거예요.

여기서 더 보채면 도리어 분노하실지 몰라요.”

내가 보기엔 꽤 상식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일부가 문제를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그 분노를 잠재우는 게 신녀(神女)이신 족장님의 역할 아닙니까!”

“옳소!”

한 명이 크게 소리치자 다른 몇몇이 호응했다.

“소모라가 이미 멸망했는데 신께서 비를 멈추지 않으실 이유가 뭐 있겠소!”

“그건 하늘의 일이고, 하늘의 일은 오직 신께서만 아시기에….”

아리야가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불만 어린 부족민들은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트렸다.

“족장은 책임을 지고 기도를 올리시오!”

“이건 가리비수 님께서 우리한테 실망하신 탓입니다!”

“그렇다! 역시 우리는 달의 여신이 아니라 가리비수 님을 다시 모셔야 한다!”

와.

진짜 개판인데?

‘천사님. 20일도 안 되어서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하는 야만인들 수준 좀 보십쇼.’

[저 사람들은 버릴 신앙이라도 있지요. 당신은 아예 믿음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천사의 말을 무시했다. 하여튼 점입가경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걸어 나갔다.

“그만. 다들 멈추시오.”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중에는 물론 아리야도 있었다. 아리야는 내 모습을 보고 눈에 띠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모서아….”

“음.”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소리 높여서 불평을 토로한 월족 남자를 쳐다봤다.

움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 족장의 책무다. 그대가 그리 말했소?”

“예, 예언자이시여. 저는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남자가 연신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아리야보다 오히려 나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예언자라.’

하긴 대홍수가 소모라를 휩쓸 거라고 얘기한 사람은 아리야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부족민들이 보기엔 나야말로 ‘신과 직접 대화하는 자’로 비추겠지.

아리야가 정치적인 지도자라면 나는 종교적인 지도자에 해당하려나?

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일리가 있소.”

“예?”

“저기 있는 아리야는 달의 여신께서 몸소 선택하신 종. 신을 대리하여 지상을 통치하는 군주이니, 정말로 아리야가 간곡히 기도를 올리면 비도 그칠 거라오.”

웅성웅성.

내가 선뜻 억지를 들어주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직접 불평을 토로했던 부족민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던 부족민들까지 수군댔다.

아마 아리야에게 정말로 그런 힘이 있을지 의문스러운 거 아닐까.

“단!”

수군거림이 더 퍼지기 전에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감히 여신의 진의를 함부로 시험하고자 한 죄. 여신께서 직접 대리인으로 선택하신 족장을 의심한 죄. 이것은 결코 가벼운 잘못이 아니라오.”

“예, 예에?”

“만일 아리야가 기도를 올렸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그녀가 신께 버림을 받았다는 증거이니, 기꺼이 족장에서 내쫓겠소. 나 또한 책임을 함께 질 것이라오. 그러나!”

내가 눈을 확 부릅떴다.

“만약에 아리야의 기도를 신께서 들어주셔서 비가 멈춘다면, 그대는 사사로이 우리의 신을 모욕하고 우리의 족장을 모독한 것이니,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오!”

“….”

월족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내 제안에 응해야 할지 말지 몹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예, 예언자 님의 말씀이 옳다! 책임을 져라!”

“비가 오면 족장이! 비가 오지 않으면 댁이 물러나라!”

등 뒤에서 다른 부족민들이 소리쳤다.

그중엔 분명히 남자와 함께 아리야를 규탄하던 사람들도 끼어 있었지만, 분위기가 바뀌자 잽싸게 태도를 바꾸었다.

이런 점에선 야만족들이 참 대단했다.

“으.”

졸지에 사람들한테 떠밀리게 된 월족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예언자이시여. 만약 진짜로 족장님이 기도를 올려서 비가 멈춘다면 제가 잘못한 걸 인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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