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7화 (17/261)

17. 열 개의 계명 (1)

‘음.’

좋아. 일단 상황은 파악했다.

‘이거 그래서 비는 언제 그친답니까, 천사님?’

[확인해보겠습니다. …확인 완료. 이 근방의 비는 오늘 오후에 개일 예정입니다. 약 5시간 뒤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겠군요.]

‘다섯 시간이라.’

분명히 이번 임무의 제한시간도 딱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맞나?

‘임무 창.’

내가 잘 기억한 건지 살펴보고자 임무 창을 띄웠다. 빗줄기밖에 안 내리는 허공에 글자들이 스르륵 새겨졌다.

+

<엑스트라 미션>

[ 성녀 탄생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6시간

(잔여시간: 5시간 58분 11초)

클리어 조건: 당신은 월족에게 ‘신화’를 선물하였다. 이제 월족은 단순한 부족민이 아니라 ‘하늘에 선택받은 민족’으로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월족에게 더 자세한 정체성을 부여하라!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임무가 딱 끝날 즈음해서 비가 멈춘다.

‘이건 잘만 하면 요긴하게 이용해먹을 수 있겠는 걸?’

좋아, 이번 임무를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 마음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모서아!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한창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아리야가 답답했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사람들이 불만을 터트리는데 어떡하면 좋겠냐고 물었잖아요.”

“음? 아. 미안하오.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소.”

“정말! 당신은 고집이 너무 강해서 내 의견을 안 들어요. 이럴 거라면 그냥 모서아가 족장을 맡는 편이 나았어요.”

아리야가 입술을 삐죽 내밀어 툴툴거렸다.

후줄근하게 젖은 그녀를 보면서 나는 새삼스레 느꼈다.

‘확실히 나이 어린 티가 나네.’

달랐다.

내 눈앞에서 삐진 아리야와 저승에서 망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리야.

두 인물은 외모가 같을지언정 이미 분위기부터 많이 달랐다.

과거의 아리야는 명랑한 분위기가 있는 반면, 저승의 아리야는 얼마간 슬픈 그림자를 끌고 다녔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알맹이는 똑같은 인물일 텐데. 신기하네요.’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천사가 단호히 말했다.

[인간은 무슨 일을 겪느냐에 따라서 성격이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아리야는 비극을 피했습니다. 반면에 저승에 있는 아리야는, 세상에 의해 모든 걸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호. 인간에 관해 제법 빠삭한 구석도 있으시네요.’

[저도 옛날에는 한없이 순수한 여자였기에 잘 압니다.]

이 천사 겸 악마가 웬 헛소리를 하는 걸까?

비가 오래 내리더니 천사의 머리 안쪽에도 곰팡이가 생겨버린 모양이다.

집구석에 핀 곰팡이는 걸레로 닦을 수라도 있지, 두개골에 박힌 곰팡이는 답이 없다는데 조금 불쌍했다.

“그래서 당신이 생각했다는 해결 방법이 뭐예요?”

“음.”

아리야가 던진 질문에 나는 턱을 끄덕였다.

“내가 볼 때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오.”

“두 가지요?”

“그렇소. 하나는 비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 다른 하나는, 월족에 명명백백한 율법이 없어서 무질서하다는 것. 두 가지만 해결해주면 사람들은 저절로 안심할 것이오.”

“그, 그런가요?”

아리야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내 말이 진짜인가 의문스러운 듯했다.

사실 백성을 안심시키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첫 번째, 날씨가 지나치게 괴팍하지 않을 것.

여기서 날씨란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역병, 괴질, 가뭄 따위도 다 포함한다.

두 번째, 법이 명확할 것.

법이 없는 곳에서 백성은 단순히 짐승이다, 짐승.

우리 왕국에서도 500년 동안 제일 중시한 정책이 바로 법전을 완성하는 것이다.

‘정작 난 별로 법을 안 지켰지만.’

내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귀족으로 태어나는 특권이란 정말 달콤하지.

그 달콤함에 비하면, 시도 때도 없이 왜 자넨 도통 맞선을 안 보냐는 소리나 듣고, 어느 가문의 누군 이미 결혼하여 후계자가 생겼는데 너는 왜 첩도 안들이냐 따위의 잔소리야 뭐 감당할 만하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을 땐 하지도 않았던 결혼과 약혼을 둘 다 죽고 나서 해버렸네요….’

[엄연히 말하면, 당신이 한 게 아니라 당신이 빙의한 이들이 한 것입니다만.]

‘즉 저의 정절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이거군요. 아주 좋습니다.’

[왜 그리 자신의 정절에 집착합니까?]

‘‘아아, 공을 사랑하네. 신하로서 절개는 못 지키는 간신이었으되 남자로서 정절을 지키었고, 처음부터 청백리는 아니었으나 마지막까지 청백지신이었던 그대여. 그대야말로 실로 왕국의 본이었다네…’ 따위의 비문이 적힐 날이 올 지도 모르잖슴까?’

[이렇게 병신 같지만 병신 같은 소리는 또 처음 듣는군요….]

천사가 탄식했다.

이건 좀 상처를 받았다….

‘마음 맞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지금 의외로 순정파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겁니까?]

‘에이 순정은 무슨. 그런 낯간지러운 말씀을 천사님은… 하여간 그냥 그렇다는 거죠.’

[뭐가 그런지 모르겠군요. 천하의 간신배에 소인배인 당신과 마음이 맞는 짝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참담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천사와 그런 소리를 주고받고 있자니 아리야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법… 이라면 우리한테도 이미 있는걸요? 소모라에서 지키던 법이요.”

음.

“그걸로는 이제 안 되오.”

내가 딱 잘라 부정했다.

“소모라는 이미 망했소. 더는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오. 이제부터 우리는 월족만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이오.”

“우리만을 위한 나라….”

아리야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그녀에게는 너무 큰 이야기라서 감이 안 잡히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요. 솔직히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만의 법이라니. 그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마을에서 덕망 높은 사람들을 불러서 논의할까요? 아니면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서 함께 만들까요?”

“어허. 그래서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오. 하루가 급박한데 어찌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물어봐서 결정하겠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루가 급박한 게 아니라 내 제한시간이 급했지만 말이다.

이번 임무의 제한시간은 고작 6시간에 불과했다.

월족 사람들과 더불어서 율법을 만들다가는 금세 임무에 실패해버릴 거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전부 알아서 해결하리다.”

“….”

“잠시 자리를 비울까 싶은데 괜찮겠소?”

아리야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고 기다릴게요, 모서아.”

나는 아리야한테 월족을 맡긴 뒤 주변을 돌아다녔다.

산야에는 20일 내내 비가 내린 흔적이 빼곡했다.

여기저기서 산사태가 일어나서 땅이 뒤덮여 있었다.

평소라면 나도 이런 난장판을 싫어했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덕분에 내가 원하는 걸 쉽게 발견하겠군.’

내가 신나서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간신이여? 율법을 만들겠다며 해 놓고선 뭐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의아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내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비록 주요 임무가 아니라고는 해도, 이번에 당신한테 주어진 시간은 6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리 시간을 낭비해도 정말 괜찮습니까?]

“야아. 오늘 제가 천사님한테 과외선생 노릇 제대로 하네요.”

[예?]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생각해보세요. 정성 들여서 법을 만들어봤자 뭔 소용이에요? 사람들이 진짜로 법을 지켜야지 의미가 있죠.”

산자락을 홀로 누비면서 내가 중얼거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혼잣말하듯 천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천사님. 백성들이 법을 지키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세요?”

[우선 법이 논리적이며 투명해야 합니다.]

“에이,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요.”

내가 단언했다.

“일단 법이 무서워야죠.”

공포!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는 무시무시한 벌이 내릴 것이라는 두려움.

이것이야말로 백성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게 하는 첫걸음이다.

최종적으로, 율법 그 자체를 신성하게 우러러보도록 만들어야 비로소 사람들은 법 아래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야 일리는 있습니다만….]

내 말을 듣고 천사가 어이없어했다.

[벌써 잊었습니까? 당신한테 주어진 시간은 여섯 시간. 아니, 이제는 다섯 시간 정도밖에 없습니다. 한나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무슨 수로 월족 사람들한테 법에 대한 공포를 심으렵니까?]

그렇다, 그게 문제다.

왕국에선 병사를 움직여서 불법을 저지른 백성을 악독하게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족에겐 군사가 따로 없고 백성이 따로 없다.

그냥, 다 똑같은 부족민이다.

아리야가 족장이긴 해도 여전히 부족민들은 서로 평등한 이웃에 가깝다.

“맞아요. 평범한 방법으로는 법에 대한 공포를 절대 심어줄 수 없죠.”

내가 씩 웃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하는 거예요.”

[특별한 방법이라면?]

“우리 인간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신께서 내려주신 법’이라면 어떻습니까?”

천사가 침묵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천사는 말문을 열었다.

[예에?]

한 시간 가까이 산자락을 뒤지고 드디어 원하는 물건이 보였다.

찾았다.

나는 얼른 달려가서 그 물건을 흙에서 꺼내었다.

산사태에 휘말려 여기까지 내려온 물건인 듯했다.

“캬아, 천사님. 됐습니다! 이제 이걸로 됐어요.”

[그건…?]

물건에 묻은 흙을 흐르는 빗물로 고이 씻었다. 그러자 이것의 자태가 드러났다.

[단순한 돌덩어리 아닙니까?]

“뭐. 그런 식으로 부를 수도 있죠.”

천사의 말대로 이것은 그저 평범한 돌이었다.

다른 돌덩어리와 굳이 다른 점을 뽑으라면 조금 평평하다는 거?

보는 각도에 따라 거의 석판으로 비출 만큼 한쪽이 평평하였다.

“하지만 이제부턴 단순한 돌덩어리가 아닙니다.”

나는 바로 이런 돌을 찾아서 산야를 돌아다녔다.

“월족의 영원한 율법이 되어줄 물건. 아니, 율법 그 자체가 되어줄 거물이죠.”

내가 품속에서 손도끼를 두 자루 꺼냈다.

한 도끼를 망치로 삼아서, 다른 도끼를 끌로 삼아서, 꼭 석공이 된 것처럼 돌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곳에 문자를 새기었다.

‘이 모든 율법은 달의 여신께서 베푸신 말씀이다.’

음.

혹시라도 글자가 잘못 새겨지면 어떻게 되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깔끔하게 나왔다.

손도끼를 사용하는 일이라면 대체로 가리비수 석상의 덕을 보는 모양이었다.

“좋아.”

나는 힘차게 연장을 휘둘렀다.

깡! 깡!

쇠가 돌을 파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석판에는 한 줄씩 문구가 이어졌다.

‘너희의 신은 나, 달의 여신이다. 내가 몸소 너희에게 열 가지 율법을 내린다.’

여기까지 적자 천사가 말했다.

[간신이여. 당신, 설마…?]

천사의 목소리에는 경악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제한시간 안에 모든 작업을 끝내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

하나,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둘, 내 이름을 알려 하지 말고 다만 달의 여신이라 흠모하라.

셋, 나를 모시는 자는 누구라도 너의 이웃이고 너의 동포다.

넷, 오직 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를 지상의 통치자로 인정하라.

다섯, 네 군주에게 충성하라.

여섯, 네 부모에게 효도하라.

일곱,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마라.

여덟, 다른 사람의 연인을 탐하지 마라.

아홉,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지 마라.

열, 전쟁이 나서 싸울 적에 분열하지 마라.

+

내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으흠.”

마지막은 특별히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 적었다.

나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왕국은 일단 전쟁이 났다 하면 도망치기 바쁘거든.

도망쳐도 나 혼자 도망쳐야 안전하지, 왕국민 전체가 도망쳐버리면 안 된다.

“어떻습니까요, 천사님. 정말 괜찮지 않습니까? 이제 이걸 신께서 선물하셨노라고 월족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끝입니다.”

나는 석판을 빗물에 말끔히 닦고 자랑하였다.

“물론 제가 가져가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 산꼭대기에 몰래 숨겨둔 다음 아리야가 발견하도록 할 겁니다. 그럼 야만족들이 다 속을 걸요? 크으. 신께서 몸소 내려주신 율법이라니, 이건 진짜 지킬 수밖에 없죠.”

그러자 천사가 소리쳤다.

[간신이여, 이건 사기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아무도 모르면 상관없죠.”

세상사가 다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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