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말빨의 귀재 (2)
내가 계속 속닥거렸다.
“아시겠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하십쇼. 추장님께 월족의 모서아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노라고 보고해주십쇼. 제 말씀을 알아들으셨으면 머리를 두 번 끄덕여주시죠.”
경비병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내 말에 잔뜩 긴장한 것이었다.
잠시 후, 경비병은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여, 여기서 기다리게. 지금 바로 촌장께 아뢰고 올 테니.”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명심하십쇼. 한시가 급합니다.”
“으으음. 며, 명심하지.”
경비병이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머릿속에서 천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사기를 치는군요.]
‘이 세상에 공짜인 물건은 약속과 거짓말밖에 없다. 왕국의 유명한 속담이죠.’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왕국이 멸망했는가를 잘 설명해주지요.]
나는 천사의 냉소를 무시했다.
그래, 방금 경비병한테 늘어놓은 말은 거짓말이다. 월족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 없었다. 아니,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나에겐 없었다.
왜 쓸데없이 반란까지 일으켜서 이 도시를 탈출하나?
‘임무 창.’
쏟아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문자들이 환해졌다.
+
<역사변이점>
[ 눈물 젖은 피난길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3일
(잔여시간: 2일 18시간 44분)
클리어 조건: 은월의 피를 사수하고, 부족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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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목적을 잘 봐야죠.’
이번 임무는 매우 간단하다.
은월의 피를 지킬 것. 부족을 안전하게 인도할 것.
어디에도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해라.’나 ‘지금까지 부족을 억압한 촌락을 없애라.’ 같은 지시가 없다. 구태여 폭력을 동원할 이유가 없다 이 말씀이다.
‘즉, 결론적으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냥 도망치면 됩니다!’
그것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망친다!
‘천사님. 어차피 대홍수인가 뭔가 물난리가 크게 난다지 않습니까.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이 동네는 싹 쓸려갈 텐데 뭐 반란까지 일으킵니까요. 예? 얼른 도망치는 게 제일이죠.’
천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일리가 있는 방법입니다만….]
‘어허. 섭섭한 말씀이군요. 일리가 있을 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유일한 해결책이죠.’
[지난 700년 동안 월족이 받아온 서러움은 어쩔 것입니까?]
으음? 지적이 이상했다.
‘그 사람들이 서럽거나 말거나 뭔 상관인가요.’
[이들은 당신의 선조이기도 합니다. 훗날 왕국을 세우게 될 부족이니 말입니다. 선조들에 대한 예의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까?]
‘에이, 아직 왕국이 세워진 것도 아닌데요.’
엣취! 기침이 나왔다. 하루 내내 비가 내리니까 나도 으슬으슬 추워졌다. 나는 코를 슥슥 문질러서 닦았다.
‘크흠. 선조님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공경하라는 법도 없죠. 안 그래요? 야만족은 뭘 해도 야만족일 뿐. 제가 이렇게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해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야만족들은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암요.’
[….]
‘게다가 저는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도 왕국을 배신하려 했는걸요. 하물며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나라의 서러움 따위야 알 바 있습니까!’
나는 내 자세와 태도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똑똑하게, 조금만 더 재빠르게 나라를 배신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처럼 천사와 엮이지도 않았을 거고, 외국으로 도망쳐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다.
천사가 길게 침묵했다.
그녀는 말했다.
[인정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간신입니다.]
‘음. 덕담이죠?’
[미쳤습니까? 당연히 악담입니다. 부디 지옥에 떨어지십시오.]
너무 말이 심한 천사였다.
그 때 경비병이 돌아왔다. 아까와 다르게 경비병은 날 향해서 창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손짓했다.
“어이! 나를 따라와라! 추장께서 알현을 허락하셨다.”
좋아.
‘예상대로 되어가는군.’
하긴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무시할 통치자는 없을 테지.
우리 왕국에서도 반역자는, 얼굴을 불로 지지거나 목에 흉측한 상처를 내어서 영원히 본보기로 삼았다.
나는 경비병을 뒤따라서 추장의 집에 들어갔다.
천사가 염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간신이여. 피 한 방울 없이 도망치자는 발상은 훌륭하지만, 자칫 실패하면 반역죄로 몰려 깡그리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무슨 생각으로 반란을 운운한 건지 모르겠군요. 정말 자신 있습니까?]
‘흐. 걱정하지 마십쇼.’
내가 손을 싹싹 비볐다. 탁! 열이 오른 손바닥으로 내 양쪽 뺨을 쳤다. 비에 젖어 얼어붙은 머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짓말이 바로 제 특기입니다.’
나는 추장의 방에 성큼 발을 들였다.
뭣도 모르는 야만족한테 왕국 정통 간신의 쓴맛을 보여주마.
◈ ◈ ◈
“흐으음.”
방안에 들어서는 나를 대머리 추장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추장의 좌우로 호위병들이 서 있었다. 눈빛이 다들 무시무시했다. 조금이라도 섣불리 움직이면 죽여 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무서워라, 무서워.’
나는 마음속으로 이죽거렸다.
‘하여튼 야만족 놈들. 협박밖에 할 줄 모르죠. 미개하죠.’
[딴생각은 하지 말고 집중하십시오.]
‘이래 보여도 집중하고 있습니다요.’
나는 대머리 추장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비굴한 자세와 어조로 말했다.
“오오, 소모라의 주인 고돔이시여! 그대의 미천한 하인이 감히 존안을 뵈옵니다요.”
“음.”
대머리 추장은 코를 씰룩였다.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의외인 이유야 뻔했다. 월족 사람들이 평소 취한 태도를 봐라.
‘네가 추장이면 뭐 어쩔 건데?’ 같은 식으로 삐딱하게 굴지 않는가.
나처럼 넙죽 엎드리는 월족이 드물 거다.
참고로 나는 엎드릴 때는 확 엎드릴 줄 알았다.
“이리도 야심한 밤에 찾아오는 무례를 범하였음에도 관대하게 알현을 허락해주셨으니. 오오! 태양의 아들 마르두크께서 소모라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오직 우리의 위대한 추장을 아끼시는 마음에서라!”
“….”
이번엔 추장만이 아니라 경비병들도 당황하여 술렁거렸다.
내가 ‘태양의 아들 마르두크’를 운운해서겠지.
지난 700년 간, 월족 사람들은 모질게 구박당하면서도 끝내 종교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부족민이 태양의 신을 섬기는 와중에 얘들은 뭐 이상한 잡신이나 모셨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앞장서서 태양의 신을 찬양한 거다.
‘태양의 신이든 도끼의 마신이든 다 미신인데 뭐 어때.’
내 입장에선 어느 쪽이든 이단이었지만, 여기 사람들이 느끼기엔 퍽 충격적인 것 같았다.
대머리 추장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허어. 너희가 드디어 분수를 알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구나. 그런데 뭔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이리 굽실대는고?”
“심경의 변화랄 게 어디 있겠는지요. 그저 추장님의 드높은 위엄에 복종할 뿐입니다요. 오늘 낮에도 너그럽게 우리 일족을 풀어주셨는데, 제아무리 저희가 천한 잡것들이라 하여도 어찌 추장님을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으흠.”
대머리 추장의 인상이 서서히 풀렸다.
하긴, 도시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촌동네에서 우두머리 행세를 하면서 누구한테 제대로 된 아부를 들어봤겠나.
원래 아부가 제일 잘 먹히는 사람은 정말로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그냥 그럭저럭 잘 나가는 골목 깡패다.
천사가 수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그리 잘 압니까?]
‘제가 골목 깡패 격에 해당하는 귀족이었으니까요. 아부 듣는 맛을 잘 알거든요.’
[….]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알고, 아부도 잘 받아본 놈이 잘 아는 법.
천사가 어이없어서 침묵하는 걸 무시하고, 나는 열심히 손바닥을 비볐다.
“추장님께서 저희를 석방해주실 때, 제가 사흘 안에 범인을 잡아오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제가 감히 추장님의 은혜를 헛수고로 만들어서야 그야말로 죽을죄를 저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크흠. 그야 그렇지.”
“아이고. 이제 와서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추장님께서도 참 쉽지 않은 영단을 내려주셨습니다요. 추장님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저희 월족을 다 죽여야 하네 마네, 지금 기회에 싹을 없애버려야 한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또 했겠습니까?”
대머리 추장이 머리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다. 만일 네놈이 그때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더라면 본인이 싹 목을 쳐버릴 생각이었느니라.”
“암요! 그러니까 저희 목이 멀쩡한 것도 전부 추장님의 은덕 아니겠는지요!”
“흠. 뭐. 썩 틀린 말은 아니렷다.”
드디어 대머리 추장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기가 떠올랐다.
‘이놈은 그래도 말이 좀 통하는구먼.’ 하는 시선으로 나를 봤다.
물론 월족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비가 오래 내린다며 월족 사람들을 탓한 거 자체가 웃긴 짓이지.’
비가 내리는 것과 월족 사람들이 가리비수를 섬기는 것과 뭔 상관일까!
하지만 미신이 횡행하는 야만족들의 동네에선 상관이 많은 모양이었다.
미개한 것들. 나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속으로 참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추장님의 명령을 받들고자 누가 범인인지 가만히 살펴봤습니다. 쭉 살펴보았는데….”
“보았는데?”
“아. 범인을 한두 명 찾아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싶지 뭡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더냐?”
“그것이…. 어허. 참, 아뢰기가 너무 참담하여서….”
내가 말을 질질 끌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자아, 천사님. 이번 기회에 제가 아부하는 방법을 딱 알려드리죠.’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만…. 어디 말해보시길.]
‘여기서 이럴 때 곧바로 원하는 답을 알려주면 안 됩니다.’
모든 아부는 거래다.
거래에서 공짜란 없다. 그냥 정답을 알려주면 상대방이 오히려 의심해버린다.
‘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한테 잘 보이려 할 이유가 없다!’ 하고.
그런 아부는 상대방의 의심을 키워서 역효과만 난다.
‘아부의 본질은 말입니다. 천사님. 바로 비굴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비굴한 인간… 입니까? 촌장을 찬양한 시점에서 이미 비굴해진 것 아닌지요?]
‘캬아, 역시 천사님.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한번 구경해보십쇼.’
나는 촌장에게 계속 대답할 듯 말 듯 말을 끌었다.
“아. 제가 바로 말씀을 아뢰고는 싶지만…. 이게, 너무 심각한 일이어서.”
“심각한 일이라면 어서 말하거라! 뭐 때문에 질질 끄느냐.”
“그것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두렵습니다요. 촌장님께서 분노하시면, 사실 저 같은 잡종은 바로 대가리가 박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생각하면 이건 참 아뢰어야 한다 싶다가도, 공포에 오금이 저려서….”
슬슬 애가 탄 것일까.
대머리 추장은 미간을 좁히더니, 의자 등받이에서 살짝 상반신을 들었다.
“허어, 얼른 실토하지 못할까! 무슨 말이든 너를 해코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마.”
나는 반색했다.
물론 이것도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추장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비록 발로 차긴 했지만 약혼자도 있는 몸인데…. 앞으로 아내와 함께 촌장님의 밑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또….”
“씁.”
촌장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냐. 네놈과 네 처자식한테도 안전을 보장해주마. 이 말이 바로 네놈이 원하던 것이렷다.”
전혀 아니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는 했지.
내가 원하던 건 바로 당신이 지금 지은 그 표정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