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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9화 (9/261)

9. 나라를 살리는 두 번째 방법(2)

대뜸 몸을 일으키는 내 모습에 대머리 추장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니. 죄인이 어디서 함부로 일어서느냐! 전사들이여, 저놈을 당장….”

퍽!

누가 맞는 소리가 울렸고, 대머리 추장은 입을 다물었다. 추장의 명령을 받고 달려오려던 병사들도 멈칫했다.

내가 발로 옆에 있는 여자를 차버린 것이었다.

“응?”

졸지에 흙탕물로 엎어진 여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일을 당할 줄 전혀 몰랐다는 안색이었다. 설마 같은 일족이 자기를 때리는 것은 상상도 못 했겠지.

나는 짐짓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한테 일갈했다.

“무엄하다! 감히 천한 족속 주제에 따박따박 어르신한테 말대꾸나 하고!”

“어? 응…?”

“어허!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려면 멀었구나!”

퍽.

나는 다시 한 번 은월의 여인을 차버렸다.

비단 그녀에게만 흙 맛을 구경시켜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묶여 있는 월족들을 전부 빵빵 찼다. 나에게 차일 때마다 월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흙탕물에 엎어졌다.

“요것들이 주제도 파악 못 하고!”

“힉!”

“어디서 어르신한테 말대꾸야, 말대꾸는!”

“윽!”

그리하여서 열 명의 월족들 전원이 땅에 쓰러졌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지라 월족들은 흙탕물에서 헤엄치듯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들을 다 쓰러트리고, 나는 대머리 추장을 향하여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

“무, 무엇이냐.”

대머리 추장이 말을 더듬거렸다. 방금 내가 벌여놓은 짓거리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간곡한 어조로 읍소하였다.

“용서해 주십쇼!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어떤 나쁜 놈이 악마와 계약해서 이렇게 비를 내렸는지, 기필코, 3일 안에 잡아내어 어르신께 갖다 바치겠습니다!”

“….”

“3일 안에 범인을 잡아서 올리지 못하면 저희 목을 그냥 다 베어버리십쇼!”

대머리 추장은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꼭 목을 다 베어버릴 필요까지야….”

“다 베어버리십쇼!!”

“아, 알겠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사흘을 기다려주마.”

그래.

힘없는 족속이면 이게 자연스러운 거지. 어디서 야만족 주제에 자존심을 세우는가.

잘못이 있든 없든 약소한 야만인으로 태어났으면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대머리 추장이 병사들을 물리면서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다.”

“말씀하십쇼.”

“아무리 너희가 저주받은 일족이라 해도, 네 약혼자를 그렇게 마구 때려도 되겠느냐?”

내가 눈을 깜빡거렸다. 약혼자?

“너희 둘의 사랑이 어릴 때부터 참 깊다는 소문을 내가 들었다만, 실상은 영 딴판이로구나. 정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맞느냐?”

“….”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은월의 여인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그게 더 무서웠다.

저 눈길을 굳이 말로 표현하면 ‘이 배신자, 어떻게 감히 네가 나를 때려?’ 정도 아닐까.

천사가 말했다.

[인간쓰레기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간신이여.]

시작부터 임무가 꼬이는 소리였다.

◈          ◈          ◈

재판에서 풀려나고, 천사는 나에게 이번 임무를 설명했다.

[건국 750년 전. 이 시기엔 거대한 재앙이 닥칩니다.]

‘재앙이요?’

[바로 대홍수입니다.]

쏴아아아….

사방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미 며칠째 비가 계속된다고 그랬던가.

나는 빗소리를 무시하며 천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간신이여. 지금 내리는 비는 자그마치 20일이 넘도록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일이라니. 20일 내내 비가 내린다는 말입니까요?’

[예. 그렇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왕국에도 물론 장맛비가 내리긴 내렸다. 하지만 수십 일 동안 그치지 않고 비가 쏟아진 적은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꿀꺽.

모든 도시와 마을이 홍수에 잠겨버릴 것이다.

‘말 그대로 대홍수로군요.’

세상이 물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러자 지금 내 앞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무섭게 비추었다. 쏴아아아! 마치 괴물이 하늘에서 물난리를 일으키는 것처럼.

[당신의 임무는 간단합니다.]

‘뭔가요?’

[이곳에서 홍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당신의 부족을 이끌고 탈출하십시오.]

스윽. 눈앞에 이번 임무의 개요가 다시 떠올랐다.

+

<역사변이점>

[ 눈물 젖은 피난길 ]

일시: 건국 750년 전

난이도: E

제한시간: 3일

(잔여시간: 2일 23시간 21분)

클리어 조건: 은월의 피를 사수하고, 부족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라.

+

‘과연.’

나는 임무를 다 이해했다.

‘3일 뒤에 홍수가 일어나는 거로군요. 그 전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야 하는 것이고요.’

[정확합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곧 재앙이 떨어질 테니 피하자. 임무를 요약하면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사님.’

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사람들한테 대홍수를 믿게 만들죠?’

믿음.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며칠 뒤에 여기가 통째로 물에 잠깁니다! 짐 다 싸고 저만 따라오세요!’ 하고 말해봤자 누가 얼마나 믿어주겠는가.

[참고로, 간신이여. 이 근처에는 본래 비가 적습니다. 홍수는커녕 시냇물이 범람하는 걸 경험해 본 사람도 없지요.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서 세상을 덮친다는 상상 자체를 못할 겁니다.]

‘…그럼 더 어렵잖아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믿게 해요?’

[물론 돈독한 신뢰 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지요.]

천사가 간단하게도 말했다.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철석같이 믿도록 말입니다.]

‘뭐든지 철석같이 믿게 만든다고요? 저를요?’

나는 천천히 옆을 바라보았다.

부족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장.

한쪽에는 도끼를 든 남자의 석상이 자리했고(아무리 봐도 가리비수였다! 세상에!), 다른 한쪽에선 부족민들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뭐라고 할까. 그야말로 배신자를 쳐다보는 시선이었다.

“실망했어요! 나한테 어떻게 손찌검을 할 수 있어요?!”

은월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 혼자서만 불평한 게 아니었다. 월족 사람들 전원이 나를 규탄하듯 떠들었다.

“약혼자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다니. 허!”

“그동안 자네를 나쁘게 안 봤는데! 참 실망일세!”

“…젠장.”

다른 사람한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나는 중얼거렸다.

‘천사님, 이 상황에서 무슨 수로 제 말을 믿게 합니까!’

그렇다. 이게 문제였다.

내 말을 사람들이 믿으려면 신뢰가 제일 중요한데, 바로 그 신뢰가 아까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자업자득이군요.]

천사가 조용히 말했다.

내 피해망상일지도 모르겠으나 꼭 꼴좋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같은 부족 사람을 마음대로 때리면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애당초 사람이 같은 사람을 함부로 때려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은월의 피가 저와 약혼 관계가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요. 힘내시길.]

이 천사는 가끔 내가 잘 되라고 도와주는 건지, 아니면 나보고 고생하라고 구박하는 건지 헷갈린다.

천사의 성격이 이렇다면 상급자인 신도 인성이 더럽지 않을까?

하아.

나는 한숨을 흘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여러분을 발로 찬 건 진심으로 미안하오.”

야만족들한테 사과하기 정말로, 정말로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일단 불만을 잠재우고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잘못 없다고 자꾸 우겼으면 어찌 되었겠소? 어? 저 대머리 추장이 빡쳐서 우리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오. 나도 다 여러분을 지키려고 그런 것이오.”

“날리라면 날리라지요!”

은월의 여인이 소리쳤다.

“저것들은 맨날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 부족을 탓해요! 이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 때도, 증조 때도, 고조 때도, 벌써 수백 년 이어지는 짓이에요! 언제까지 우리가 참아야 해요?!”

“옳다! 아리야 님의 말이 맞다! 더는 참을 수 없다!”

사람들이 팔뚝을 휘두르며 동조했다.

아마 은월의 여인은 이름이 ‘아리야’인 것 같았다. 아직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도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쯤 되어 보였다. 역시 은월의 피를 이은 후예라고 할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처럼 감정이 과격해지는 건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월족은 어디까지나 소수 부족에 지나지 않아. 섣불리 행동하면 다수의 지배층한테 순식간에 짓밟힐 걸?’

이렇게 판단하는 데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새로 알게 된 상태 창 덕분이었다.

‘도시 창.’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러자 허공에 글자들이 슥슥 새겨졌다.

+

[ 도시 이름: 소모라 ]

레벨: 2

지배자: 고돔

문명 수준: 군장 국가

도시 특성: 교역 도시

시설물: 마을(Lv.3), 시장(Lv.3), 신전(Lv.2), 목장(Lv.2), 궁전(Lv.2), 목책(Lv.2), 망루(Lv.2), 광장(Lv.1), 대장간(Lv.1), 빈민가(Lv.1)

종교: 태양의 아들 마르두크(85%), 약속의 주관자 엔릴(10%), 도끼의 마신 가리비수(5%)

플레이버 텍스트:

‘인간이 어떻게 풀만 뜯고 사나요?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재미도 있어야죠.’

이곳은 교역의 중심지입니다. 많은 부족들이 오가면서 자잘한 물건을 교환합니다. 아직은 무역도시라 불러주기도 민망스러운 촌동네이지만, 괜찮습니다. 앞으로 오백 년만 더 버티면 혹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현재 ‘장마’가 3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 현재 부족 간의 ‘불화’가 722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

야만족들이 세운 마을치고 상당히 호화로웠다. 하지만 나는 마을의 시설물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지.’

바로 종교 부분.

이 도시에서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

종교: 태양의 아들 마르두크(85%), 약속의 주관자 엔릴(10%), 도끼의 마신 가리비수(5%)

+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적다.’

도끼의 마신 가리비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겨우 5%에 불과하였다.

지난번 내 임무로 인해 신화가 되어버린 가리비수는, 월족 사람들이 모시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이 도시에서 월족의 인구는 고작해야 5% 정도라는 얘기다.

그런데 5%밖에 안 되는 부족으로 도시 전체를 향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미친 짓이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자살 행위였다.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임에도 월족 사람들은 반란을 외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당장 추장 놈의 목을 따자!”

“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지!”

“….”

나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내가 일갈했다.

이번에 빙의한 몸도 기골이 장대하여서 목소리가 컸다. 부족 사람들이 움찔,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좀 하시오! 대책 없이 떠드는 꼬라지가 차마 보기 힘들구려. 더 참지 못하겠다며 소리쳐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 거요? 칼이라도 잡고 다 함께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오? 그렇게 반란을 일으켜서 이길 자신이 있소?”

월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더욱 더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죄가 없는데 다 우리 잘못이라고 밀어붙이니 화가 나는 거야 이해하겠소. 그렇다고 해서 반란이라니? 그런 말을 입에 담을수록 저들에게 우리를 해칠 명분을 주는 것이오.”

“…하지만 모서아.”

이번 시대에 은월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 아리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서아.

그게 내가 빙의한 자의 이름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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